주체(朱棣, 1360년 5월 2일 ~ 1424년 8월 12일)는 명조 제3대 군주이다. 그는 명태조 주원장의 4남으로 정난의 변을 일으켜 조카인 혜황제를 폐위시키고 찬탈로 황위를 차지했다. 재위기간 동안 대숙청을 통해 황권을 강화했으며 국외로는 정복사업을 추진해서 패권주의를 내세웠다. 보통 제위기간내 연호 였던 영락에서 따와 영락제라고 불린다.

생애

1360년 5월 2일 홍건적의 지도자 중 하나인 주원장의 4남으로 태어났다. 아비를 따라 전장에 나가 군사적 분야에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아버지가 원조를 무너뜨리고 명조를 창건하여 초대 황제로 즉위한 덕분에 황자가 되었다.

연왕책봉

1368년 연왕(燕王)에 책봉되어 변경으로 나가 북원을 비롯한 북방민족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1392년에 형인 의문황태자가 죽고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주윤문이 황위에 오르자 황위찬탈의 계획을 세우고 군사를 정비한 뒤 정난의 변을 일으켰다.

재위기간

수도인 남경은 점령되고 주윤문은 실종됐으며 주체는 1402년 7월 13일 제3대 황제로 즉위했다.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방효유를 비롯한 주윤문의 가신들과 그들의 일가친척, 동료들을 극형에 처하고 내치를 다졌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각지로 군사를 보내어 대규모 정복사업을 추진했다.


비판도 많이 받는데 대외원정을 많이 했지만 속빈강정 실속이 없었다는 것. 게다가 쿠데타로 조카를 쫓아내고 집권 했기에 사대부 세력들은 영락제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등용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영락제는 황제권의 친위세력인 환관을 신뢰해서(환관의 특성상 본인들의 지위는 전적으로 황제의 존재에 기반하기에 황제에 친위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등용했고, 영락제의 이러한 환관을 이용한 정치로 명나라는 이후 환관의 전횡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된다.

수도를 남경에서 본인의 본거지 연 즉 북경으로 옮긴 인물이다. 이때 이후 남경을 수도로 뒀던 중화민국 정도 빼고는 수도는 줄곧 북경이 된다. 영락제 아들은 북경에서 다시 남경으로 환도 하려고 하다가 짧은 즉위기간 만에 죽었고 결국 북경이 수도가 되서 청나라까지 이어진다.

중국인이 자랑하는 대항해인 정하의 대원정이 바로 이 영락제 때 영락제의 명령으로 시행된 것이다. 정하도 환관이었다. 원나라 때 몽골 다음 계층인 색목인 출신이었는데, 명나라 때 색목인 중 상당수가 강제로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다.

영락제 이후 정하의 대원정은 명나라 내에서 뻘짓으로 여겨 비판 받았고 기록까지 삭제 당했다. 그래서 현재까지 내려오는 기록도 별로 없다. 서양의 대항해시대는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이후 인류의 역사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지만, 정하의 대원정은 이후에 역사에 미친 영향이 극히 미비하다. 인류가 아니라 중국역사에 미친 영향도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