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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당시 [[전두환]]은 | 1980년 5.18 당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직에 있어, 광주사태를 진압하는 계엄사 지휘라인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시 소문에 전두환이 실세라는 말이 파다하여, 5.18 진압에 대한 책임을 전두환에 돌리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말만 무성할 뿐 이를 입증하는 어떠한 증거도 나온바 없다. 당시 총책임자였던 계엄사령관 이희성도 전두환은 5.18과는 무관하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후 대통령을 지낸 탓으로 마녀사냥 당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 ||
* [https://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1018 '조선일보에 게재되지 못했던'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최보식의 언론 2021.05.18 | * [https://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1018 '조선일보에 게재되지 못했던'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최보식의 언론 2021.05.18 |
2021년 8월 10일 (화) 14:54 판
5.18 광주사태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건으로 광주민중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명칭
광주사태는 5·18, 광주항쟁(光州抗爭), 광주학살(光州虐殺), 광주사태(光州事態), 광주민중봉기(光州民衆蜂起),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광주사태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에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는 광주사태를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판단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정부의 공식 명칭인'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이후로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이 되었다. 한편, 신군부의 군사독재와 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이 중심으로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문제점
화려한 휴가? 화려한 사기
북한 공작원들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전남 광주의 동네 양아치들을 꼬드겨서 무기를 쥐여주고, 4시간 만에 전남 지방의 38개소의 무기고를 털고, 자동차 공장을 턴 사건. 나무위키에서는 광주 시내의 군필자들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하나, 계엄군에게 붙잡힌 사람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군대를 면제받거나, 방위 출신이거나, 미성년인 경우가 상당했다. 체포된 사람들의 직업도 무직자, 날품팔이, 학생, 구두닦이, 철공, 목공 등등이 대부분이다.
- 첫째, 시민군이라는 것도 서로 일면식도 없었던 점.
- 둘째, 강경파니 온건파니 나뉘어서 말싸움만 한 점.
- 셋째, 총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1,2 명 정도만 있었고 모두가 오합지졸이었던 점.
등을 보면 상기했 듯 4시간만에 전남지방 38개소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점이 설명되기 어렵다.
한편, 도청 지하실에 깔려있던 TNT를 전남대생 김창길(22)이 계엄군에 제보하여 도청을 사수했다.
- 1995년 8월 17일짜, 검찰, 국방부가 공동 작성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보고서‘(증5) 92-93쪽에 있는 내용
- 1985.5.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 사태 상황 일지 및 피해 현황”(증6)의 제40-41쪽에 있는 내용
사태 기간 내내 광주의 운동권은 체포돼 있었거나 깊이 숨어있었고, 대학생들과 지각 있는 시민들은 모두 숨어 있었다. 단지 판단력 없는 10대와 사회에 불만을 가진 20대의 넝마주이, 구두닦이, 껌팔이, 석공, 목공 등이 이들 600명의 눈부신 도시게릴라 작전에 부화뇌동했을 뿐이다. 이것이 5.18의 실체다.
이 부화뇌동한 10대와 20대가 5.18의 영웅이 되어 있고, 국가 유공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5.18 유공자 명단은 보훈처에서 공개하지 않는다. 2010년 평양에서 찍힌 사진(5.18 기념식)과 1980년 광주에서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한다.[1]
나무위키에서는 한사코 북한과 관련이 없다, 사망자들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라고 주장을 한다. 5.18을 뭐라 평가하든 그건 표현의 자유고, 양심의 자유다. 집단적 표시에 대한 명예훼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조항과 판례가 있다. 5.18을 폭동이라고 칭한다고 해서 그 사망자에게 고소 당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국가 안보, 개인의 권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가 박해 받을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정부에서 민주화 운동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불러라? 그렇게 해본들 공식 행사, 공문서에만 해당하지 일상 용어까지 강제할 수는 없다.
단계
- 북한 공작원(괴한)의 작전기간(5.18-21)
각종 시가전, 방화, 파괴, 약탈이 자행되었다. 칼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정, 실탄 13만여발, TNT 10여상자, 수류탄 2백7십여발을 탈취하였다. 전남 도청을 폭도들이 무단 점령했다.
- 무기 반납 및 협상 기간, 강온 대립(5.22-25)
강경파와 온건파들이 서로 설전을 벌이다가 온건파가 퇴출되었고, 전남 도청 지하실에 TNT 8t 분량이 조립이 된다. 그것을 전남대생 김창길이 제보하여 해체한다.
- 소수의 20대 노동자들이 벌인 객기의 기간(5.26-27)
윤상원, 박남선 이런 뜨내기들이 객기를 부리다가 계엄군에 체포되었다. 계엄군이 전남 도청을 탈환하고 사태를 진압함으로써 유혈 사태는 막을 내린다.
전두환 책임론의 문제점
1980년 5.18 당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직에 있어, 광주사태를 진압하는 계엄사 지휘라인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시 소문에 전두환이 실세라는 말이 파다하여, 5.18 진압에 대한 책임을 전두환에 돌리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말만 무성할 뿐 이를 입증하는 어떠한 증거도 나온바 없다. 당시 총책임자였던 계엄사령관 이희성도 전두환은 5.18과는 무관하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후 대통령을 지낸 탓으로 마녀사냥 당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 '조선일보에 게재되지 못했던'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최보식의 언론 2021.05.18
- 전국 계엄 상황이었으니, 내가 전권을 쥐고 통괄
-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 내게 '형님' 하며 어려워 해
- 날 뛰어넘어 월권했다?… 내 성격 알면 이런 말 안 나와
-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국가 위기 상황을 군은 걱정
- 치매 걸린 90살 전두환을 향해 집단몽둥이 휘두르는 게 정의 구현인가 최보식의 언론 2021.08.10
참고 자료
- 戒嚴司(계엄사) 발표 光州(광주)사태 死亡(사망) 170명 1980-05-31 동아일보 1면
- 戒嚴司(계엄사) 발표 「光州事態(광주사태)」 1980-05-31 동아일보 3면
- 「光州(광주)사태」戒嚴司(계엄사) 추가發表(발표) <全文(전문)> 死亡者(사망자) 명단 1980.06.05 경향신문 6면
- 戒嚴司(계엄사)발표 光州(광주)사태 死亡者(사망자) 名單(명단) 동아일보 1980-06-05 1면
- 光州(광주)사태 死亡者(사망자)명단 동아일보 1980-06-05 6면
- 수배자명단 동아일보 1980-06-05 6면
- 1차 1,146명 이어 679명은 곧 訓放(훈방) 光州事態(광주사태) 375명 계속 調査(조사) 1980.07.03 동아일보 1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참고 자료
- “DJ는 교활·냉혹” “폭력은 필요악!” [문갑식의 진짜 TV] 2019. 7. 6
- 월간조선 뉴스룸(2019년 7월 1일) [문갑식의 진짜 TV] : 13분 30초 부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 이야기가 나옴.
- 戒嚴司(계엄사)가 中間(중간) 발표한 金大中(김대중)씨 搜查(수사) 全文(전문) 1980.05.22 동아일보 3면
- 金大中(김대중)등 37명 軍裁(군재) 회부키로 — 戒嚴司(계엄사) 발표 1980.07.04 동아일보 1면
- 戒嚴司(계엄사) 발표 金大中(김대중) 內亂陰謀事件(내란음모사건) 수사결과 全文(전문) 1980.07.04 동아일보 3면
- 金大中(김대중)등 24명 內亂陰謀(내란음모)등 사건 公訴狀(공소장) 全文(전문) 1980.08.14 매일경제 9면
- 金大中(김대중)등 24명 内亂陰謀(내란음모)등 事件(사건) 公訴事實(공소사실) 1980-08-14 동아일보 2면
- 선동·權謀術數(권모술수)로 얼룩진「僞善(위선)의 化身(화신)」金大中(김대중)을 벗긴다 1980.09.11 경향신문 3면
- 公判(공판)과정서 드러난「出生(출생)서 親北傀(친북괴)활동까지」 解放(해방)후 左翼(좌익)에 加入(가입) 共産(공산)활동 벌여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필 진술(上) "본인이 부족한 점 많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반공 일념만은 확고" pennmike 2018.11.29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필 진술(下) "미국 교포들의 ‘망명정부 수립' 제안 거부" pennmike 2018.11.29
같이 보기
- 5.18 상황 일지
- 5.18 관련 미국무부 문서 (2020년 5월 공개)
- 5.18에 대한 문제 제기
- 광주사태 체험 공수부대원의 수기
- 광주사태 당시 '전남도청 독침사건' 진상
- 518가산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