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구카이는 일본 헤이안 시대 초기의 승려이다. 시호는 홍법대사(弘法大師)[2].
속명은 사에키노 마오. 지금의 카가와현인 사누키노국(쿠니) 호족의 3남으로 태어났다.
사비를 털어서 당나라에 견당사로 갔으며 일본에서 진언종을 개창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승려였던 사이초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나중에 틀어졌다)
사이초는 구카이보다 처음에는 더 유명했고 나이도 7살정도 위임에도 불구하고 밀교에 관해서는 사이초를 거진 스승으로 모시고 의지를 하였다.
(초반에는 사이초가 구카이에게 도움을 많이 줬던 것으로 보인다. 둘 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당나라에 갔는데(같은 배로 가지는 않았다) 사이초는 국가장학생 비슷하게 국가에서 내주는 돈으로 갔고, 구카이는 자비로 당나라에 갔다.
또 같은 해에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구카이는 원래 나라에 의해서 20년 동안 당에서 공부를 해야 했는데, 스승이 입멸했다면서 2년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건 나라에서 정한 것을 어겼기에 처벌 대상이었는데, 사이초가 사바사바해서
처벌을 면하고 천황과 귀족들이 있는 수도인 교토에도 상경할 수 있게 해줬다는 설이 있다.
교토에서 이미 유명했던 사이초가 구카이를 밀교에 관해서 스승처럼 배우하자 교토에서도 구카이가 유명해지게 되었다.)
추측컨대 서로간의 견해차가 있었던 것 같다.
일본 불교의 성지 중 하나인 종교도시 고야산이 바로 구카이가 세우고, 구카이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당시 유학승이었기에 지식인이었고 당나라에서 불교 뿐만 아니라 토목에 관련된 지식까지 배워와 일본에 수많은 토목공사에 기여를 했다고 한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과 비슷한 코보(홍법대사도)도 문자를 틀린다. 라는 말이 일본에는 있다.
일본에서는 승려들이 여자를 범하는 것은 계에 어긋나지만, 남자 즉 동성애는 괜찮다는 특이한 풍습이 있는데,
이 풍습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가 구카이의 기록이다.
어떻게 동성애를 해야 되는지 좀 노골적인 내용의 기록을 남겼다. (이것도 밀교 승려였기에 때문에 이랬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