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프락치 사건은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현역 국회의원 13 명이 검거, 기소되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항소심이 시작되기 전에 6.25 전쟁이 발발하여 이들 중 12명이 월북하거나 납북되었다.
개요
좌경화된 기존 학계에서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대부분 이승만 정권의 조작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발굴된 북한과 소련 측 자료에 의하면 다수의 남한 국회의원들이 북한에 포섭되어 활동한 것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구속된 의원들과 1심 형량은 아래와 같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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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적 시각
- 국회프락치사건(國會프락치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회 프락치 사건 - 위키백과
일부 소장파 의원들이 북한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주장을 하는 것이 건전한 정부 비판활동인지도 의심스럽고, 정부 출범 당시 많은 좌익들이 남한에 남아 있었고, 북한의 남한 유력인사 포섭공작도 활발했는데, 이들을 견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해야 한다는 것은 적화통일되었어야 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이들에 대한 재판 중에 적화통일을 위한 북한의 남침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에는 이미 엄격한 탄압과 감시체제가 구축되어 어떠한 우익세력도 공개활동은 할 수 없고, 지하활동도 거의 불가능해, 남한에 동조하는 세력은 있을 수도 없었다. 남한만 북한에 동조하거나 북한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은 국가가 존립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우파적 시각
- 얼간이거나 프락치거나, 제헌국회 소장파 의원 : 주익종 이승만TV 2021. 10. 4.

북한과 소련측 자료
북한과 소련측 자료에는 자신들이 남한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공작을 펼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 슈티코프(Terentii F. Stykov)가 스탈린(Joseph Stalin)에게 보낸 '남북 조선의 정치경제 상황 개요'라는 1949년 9월 15일자 비밀보고서[2][3]
- 슈티코프는 해방직후 북한 소련군정의 최고 책임자로 김일성 정권의 산파였고, 북한 정권 공식 출범 후 북한주재 소련대사로 있었다.
- 해외사료총서 11권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53년 > 제1장 전쟁 직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및 중화인민 공화국과 소련의 군사정치 협력 > 1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대사가 소련 내각회의 의장에게 보낸 보고, 남북 조선의 정치경제 상황 개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TELEGRAM, SHTYKOV TO STALIN : The political situation in the south of Korea (러시아어 원문 및 영역) SEPTEMBER 15, 1949 : Wilson Center
노동당은 남조선의 국회의원들 중 일부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사업을 조직했습니다. 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이들 국회의원들은 의회 내에서 남조선에서 시행되는 미국 정책 및 남조선 정부 당국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요구 사항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성시백 동지의 <국회>공작에, 적들이 얼마나 놀랐던지 남조선의 한 출판물은 이렇게 썼다. <,,, 배후에는 성시백이 움직였다. 그는 마침내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남조선 정권을 흔들어 놓기 시작하였다. 국회는 갈수록 변색되어 우리의 <국회>가 아닌 남의 <국회>로 멀어져 갔다.> (대한년감 1975).
- 유영구, 『남북을 오고간 사람들』, (글, 1993년 06월 01일) pp.61~63
- 전 북한 노동당 간부 박병엽(朴炳燁, 1922~1998) 증언록
국회 프락치는 정식 당원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좌익 관계 동조자로 형성된 소조 형태의 조직망이었다. 남로당의 정치적 지도를 받는 정치소조였지만, 정확한 의미에서 남로당 프락치 조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미군철수와 남북협상에 관한 국회동의안에 행동통일한) 소장파 의원들 중에는 남로당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도 몇몇 섞여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61~63쪽)
- 이태호 저, 신경완(申敬完) 증언, 『압록강변의 겨울 : 납북 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 (다섯수레, 1991년 10월 31일) p.117
- 국회 프락치 사건 연루 국회의원은 모두 13명인데, 그 중 12명이 6.25 때 월북했다. 신경완(申敬完)은 박병엽(朴炳燁, 1922~1998)의 가명이며, 월북한 이들이 자신들이 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제대로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고 증언했다.
- "우리가 남로당 비밀당원으로서 국회에서 큰 활동을 했고, 감옥살이까지 했기 때문에 북에 오면 큰 대우를 받을 줄 알았는데..."
참고 자료
- 國會푸락치事件判決 : 조선문제자료총서14권 1950-03-14 서울地方法院 刑事部 : 공훈전자사료관
- 【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39)> 제헌국회 프락치 사건과 이승만의 반공 정책 SBN뉴스 2021.02.14
- '국회 프락치사건' 도화선 정재한은 실존인물이었다 중앙일보 1998.08.17
- 아래는 정재한 체포 당시 동아일보 기사
- 戰慄(전율)! 莫府(막부)의 第五列(제오열) 1949-07-23 동아일보 2면
-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1) 行商人(행상인)으로 扮裝(분장) 新版(신판) "마타하리"의 正體(정체) 1949-07-23 동아일보 2면
-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2) 軍警機密書等三百餘點(군경기밀서등삼백여점) 逮捕端緖(체포단서)는"疑問(의문)의집"에서 1949.07.24동아일보 2면
-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3) 白晝(백주)에 往來(왕래)한 機密文書(기밀문서) 巧妙(교묘)한 方法(방법)으로 街頭連絡(가두연락) 1949.07.25 동아일보 2면
-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4) 暴露(폭로)된牒報團正體(첩보단정체) 苦難(고난)과忍耐(인내)의尾行繼續(미행계속) 1949.07.26 동아일보 2면
-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5) 連絡系統完全把握(연락계통완전파악) 搜査網三八線(수사망삼팔선)으로擴大(확대) 1949.07.27 동아일보 2면
-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6) 越北直前文件押收(월북직전문건압수) 1949.07.28 동아일보 2면
-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完(완)) 半年(반년)의辛苦(신고)는結實(결실) 命令一下瞬息間(명령일하순식간)에打盡(타진) 1949.07.29 동아일보 2면
각주
- ↑ 국회프락치사건(國會프락치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얼간이거나 프락치거나, 제헌국회 소장파 의원 : 주익종 이승만TV 2021. 10. 4.
- ↑ 【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39)> 제헌국회 프락치 사건과 이승만의 반공 정책 SBN뉴스 2021.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