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1941년 2월 16일 소련 연해주의 라즈돌노예 마을에서 태어났다.
북한은 2022년 김정일 80회 생일 행사를 거창하게 진행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81회 생일행사여야 한다. 한국 언론들도 북한의 조작을 바로 잡지 않고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여과없이 따라 보도하고 있다.[1]
김정일의 출생 연도 고증
김정일은 실제로는 1941년 2월 16일 생이나, 후계자로 공표된 후인 1982년부터 1912년생인 김일성과 소위 꺾어지는 해(5년 단위로 크게 기념하는 해)를 맞추기 위해 생년이 1942년이라고 조작하였다. 조선중앙방송은 1981년 2월과 1982년 2월 2년 연속으로 김정일 40회 생일 방송을 내보냈다고 한다.[2][3][4] 이어 1984년 발간 된 김정일의 전기 <김정일 지도자>에서 ‘백두산의 항일유격대 밀영에서 탄생했다”고 처음으로 언급하며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못 박고 있다.[5][6]
1975년에 발표된 오기완의 논문 ‘김정일 이야기(월간 『북한』, 1975)’ 및 1980년에 발행된 중국의 ‘역대 국제 인물사전’에는 김정일의 출생연도가 1941년으로 기록돼 있다.[7]
6.25 전쟁 중 한국 신문에 보도된 김정일
6.25 전쟁 중인 1951년 3월 1일에 부산의 국제신보는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8]의 증언을 보도하는데, 김일성의 자녀로 11세된 아들 김유라, 5세인 딸 김경자가 있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김정일은 한국전 당시까지도 김유라로 불리고 있었으며, 동생 김경희의 처음 이름은 김경자일 가능성이 있다.
당시 김정일이 11세라 했는데 이는 한국의 전통적 셈법을 따른 나이일 것이므로, 그는 1941년생이 맞다고 볼 수 있다. 김경희는 1946년생이므로 한국식 셈법으로는 6세가 되어야 하나 5세로 한 살 적게 보도되었다.
한국 신문기사에서도 김정일은 1941년생으로 확인돼
한국 신문에 김정일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하는 것은 후계자로 부상하는 1974년부터이다. 처음에는 그의 생년을 정확히 몰라서 1939년생이라 한 기사도 있다.
- 北傀(북괴)2人者(인자) 金正一(김정일)정체 勞動黨(노동당) 實權(실권)을 모두장악 對韓(대한)·日(일)공작의 우두머리 1974.11.19 경향신문 3면
- 1939년 소련태생, 본명 수라, 소련명 유리
또 김정일은 김일성의 차남으로 소련식 이름이 에라이며, 장남 슈라는 죽었다는 부정확한 보도가 많았다.[9][10] 성균관대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교수는 김정일이 차남 아닌 장남(본명 「슈라」)이며 나이는 33세라고 했다.[11][12] 이것이 만 나이(현재년 - 출생년)라면 김정일은 1941년생이 맞다고 할 수 있다.
1975년에는 나이가 35세라 한 기사가 많다. 1940년 또는 1941년생으로 볼 수 있는 표현이다.
- 北傀(북괴) 金正一(김정일)의 프로필 1975.03.05 동아일보 2면
- 北傀(북괴) 金日成(김일성)아들 金正一(김정일) 정체 1975.03.05 경향신문 3면
1976년 10월 26일자 경향신문은 김정일의 정확한 나이가 35세라고 보도하였는데[13], 이는 그가 1941년생임을 뜻한다. 1976년부터 김정일의 생일 2월 16일이 휴무일로 지정되었다.[14]
1977년 이후 1981년 이전의 한국 신문들은 대체로 김정일이 1941년 2월 16일 출생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 金正一(김정일)의 正體(정체) 1977.02.24 동아일보 3면
- 金正一(김정일)의 正體(정체) 1977.02.24 경향신문 3면
- 金日成(김일성), 곧 金正一(김정일)에 權力委讓說(권력위양설) 1977.04.08 동아일보 1면
신동아 2000년 8월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7]
1975년에 발표된 오기완의 논문 ‘김정일 스토리’[17] 및 1980년에 발행된 중국의 ‘당대 국제 인물사전’에는 김정일의 출생연도가 1941년으로 기록돼 있다. 또 한국의 국토통일원이 1987년에 발행한 ‘북한의 기관 및 단체별 인명집’에는 1940년 출생이라고 돼 있다.
국토통일원의 1980년 8월 보고서에는 김정일이 1941년 2월 16일 생이며 처음 이름은 슈라라고 했으나, 1940년 2월 16일생이라는 설도 있다고 했다.[18]
1978년 10월 1일자 미국 CIA 문서에는 김정일의 생일은 2월 16일에 기념하나, 생년은 불확실성이 있으며, 많은 보고들은 1940년 또는 1941년이라 한다고 했다.[19] 1940년 2월은 김일성이 아직 만주에 있을 때이므로서 이를 제외하면 1941년 2월 16일생이 된다.

이런 기록들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된 후 그의 생년이 1942년이라고 주장하기 이전의 것이므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 김정일의 생년을 마음대로 추정하여 쓰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당시 북한의 문헌을 참고했을 것으로 보인다.
1980년 10월의 당대회 직후부터 김정일은 이름의 한자 표기를 金正一에서 金正日로 바꾸었다. 이후 한국, 중국, 일본 언론에서도 金正一로 쓰던 이름을 金正日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21][22]
김정일이 1941년생인 결정적 증거
다음의 1981년 한국 신문기사들은 김정일이 1941년생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 北傀(북괴) 金正日(김정일) 생일 祝賀(축하) 日革新系(일혁신계)서 파티열어 1981.02.17 동아일보 5면
- 親北傀日人(친북괴일인)참석…新聞(신문)들 비난 東京(동경)서 金正日(김정일) 생일파티 1981.02.17 경향신문 4면
- 조총련서 김정일생일파티 중앙일보 1981.02.17 종합 2면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지하고 김정일 선생의 탄생 40주년을 축하하는 모임」이라는 긴 이름이 붙은 이날 생일 「파티」의 주최자는 「이와이(岩井章)」 전 총평사무국장, 「마끼에다(槇枝元文)」 총평의장, 「미노베(美濃部亮吉)」 전 동경도지사(東京都知事)등 좌익계 인사 10명.
이날 「파티」로 김정일의 생일이 1941년 2월 16일생임이 확인됐다.
- 총평(總評) :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日本勞動組合總評議會)
- 이 기사에 나오는 김정일의 출생일 1941년 2월 16일은 소스가 북한 당국의 조종을 받는 조총련이다. 북한 당국이 배후에 개입한 행사이므로 당시 북한이 인정하는 김정일 출생일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40회 생일이라 특별히 한 행사이므로 몇 회 생일인지 정확히 몰라 틀렸을 가능성도 없다. 이것은 북한도 1981년까지는 김정일의 출생일을 1941년 2월 16일로 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듬해 1982년부터 1942년생으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1982년부터 김정일이 1942년생이라 조작
북한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1974년부터 주민들에게 그의 출생연도를 1941년으로 홍보하다가 후계자로 공식 추대된 2년 뒤인 1982년 김일성이 70회 생일을 맞던 해부터 1942년으로 선전했다.[23]
1982년 한국언론의 김정일 생일과 관련한 보도를 보면 이해부터 북한이 1942년생이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 증명된다.
1982년 2월 3일자 국내 신문 기사는 일본의 통일일보 보도를 인용하면서 김일성이 후처 김성애와 김정일의 권력 암투에 분노하여 김정일의 41회 생일 축하 행사 규모를 축소하라고 지시했다고 하였다. 지난 해에 40회 생일 행사를 했던 것에 비추어 1982년에는 41회 생일이 맞고, 북한은 이 날짜까지도 김정일의 41회 생일이라며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 金日成(김일성), 朝總聯(조총련)에 金正日(김정일) 生日(생일)행사 縮小(축소)하도록 지시 1982.02.03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 朝總聯(조총련)에 "金正日(김정일) 생일행사 줄여라" 金聖愛(김성애)와의 暗鬪(암투)에 분노 1982.02.03 경향신문 2면
【東京聯合(동경연합)】 北傀(북괴) 金日成(김일성)은 최근 朝總聯 (조총련)에 대해 金正日(김정일)의 41회 생일 축하행사 규모를 축소하도록 지시했다고 東京(동경)에서 발간되는 교포 일간지 統一日報(통일일보)가 3일 보도했다.이 신문은 北韓(북한)를 다녀온 소식통을 인용, 金日成(김일성)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는 후처 金聖愛(김성애)와 전처 소생 金正日(김정일)간의 암투 및 金正日( 김정일)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격노한 나머지 그동안 朝總聯(조총련)이 대대적 으로 준비해온 2월 16일의 생일 축하행사를 축소하도록 돌연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2월 13일자 경향신문은 주간 아사히(朝日)의 보도를 인용하여 조총련이 일본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일 예정이던 김정일의 생일 축하행사를 돌연 취소했다고 하면서 김일성은 70회 생일(4월 15일), 김정일은 40회 생일(2월 16일)을 맞는 것으로 보도했다. 조총련은 김일성의 70회 생일과 김정일의 40회 생일을 같은 해에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10일 사이에 1982년 김정일의 생일은 41회에서 40회로 바뀐 것이다.
- 金正日(김정일) 生日宴(생일연) 취소 1982.02.13 경향신문 4면
그러나 취소되었다던 생일 행사는 축소된 규모로 열렸고, 북한은 공식적으로 김정일이 만 40세 생일을 맞는다고 발표했다. 김정일은 40세 생일을 1981년과 1982년 연속으로 두번 쇤 것이다. 이때부터 북한은 김정일의 생년을 1941년에서 1942년으로 조작하여 공식화한 것이다.
- 金正日(김정일) 올해 滿(만) 40歲(세) 北傀(북괴), 첫 公式(공식)발표 1982.02.16 동아일보 2면
- 金正日(김정일) 生日(생일) 축하 朝總聯(조총련), 각종 行事(행사) 1982.02.16 경향신문 4면
【東京(동경) 黃炳烈(황병렬) 특파원】 在日朝總聯(재일 조총련)은 16일상오 東京(동경) 시내 朝總聯 (조총련) 문화회관에서 金正日(김정일)의 40회 생일을 축하하는 중앙대회를 개최한다.
朝總聯(조총련)이 북괴 金日成(김일성)의 아를 金正日(김정일)의 생일을 공식적인 행사로 축하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日本人(일본인)도 포함하여 대규모 축하행사를 벌이려던 당초 계획은 北傀(북괴) 지시로 돌연 축소돼 여러가지 의혹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김정일 40회 생일 북괴, 선전에 극성 중앙일보 1982.02.17 종합 2면
1982년 3월 초 작성된 미국 CIA 문서에도 김정일이 지난 달에 40세가 되었다고 하여 1942년생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북한 방송이나 한국 신문이 보도한 것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24][25]
김정일과 같은 인물이 나이 40이 넘어서 생년이 바뀐다는 것은 조작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변 학자의 주장
연변의 모 역사학자는 김정일의 출생 연도는 1942년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7]

―김정일이 태어난 것은 정말로 1942년입니까?
“틀림없습니다.”
―김정일의 출생 연도가 확인될 만한 기록이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런 문서는 없습니다.”
―그러면 1942년이라고 단정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빨치산의 증언으로 그렇게 판명됐습니다. 제88여단 주보중(周保中) 단장의 부인 왕일지(王一知) 여사도 자신의 딸이 태어난 해와 같은 해에 (김정일이) 태어났기 때문에 틀림없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으로 귀국한 뒤에 주보중이 쓴 ‘동북항일유격일기’를 읽어보면 왕일지가 딸(가리나)을 출산한 것은 1941년 8월이며, 하바로프스크의 병원에서 낳았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그가 한 말 중에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의 부인 왕일지(王一知, 1916~1987)가 자신의 딸 주위(周偉)와 김정일이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단언했다는데, 주보중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에는 왕일지가 1941년 8월 8일 하바로프스크의 병원에서 딸 주위를 낳았다고 나온다.[26]
[一九四一年] 八月 八日
上午十时, 女主人及翻译同志来告余, 谓一知在医院已生产, 得一女孩, 母女平安。小孩重量异常, 约三千四百格兰姆①。分娩如此迅速平安, 是证一知身体从来健康, 因无什病痛苦楚。然而, 此不过就一般临盆生产, 未至危险而言。至于母性之因临产而倍 受之痛苦则非男子所知, 大自然之负担属于母性, 母性苦矣!
①格兰姆, 俄文грамм(gram)的音译, 即“克”。
김정일과 주위가 동갑이라고 왕일지가 말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김정일은 1941년생이다.
다른 사람도 북한이 넘겨준 자료에 김정일 생년월일이 1942년 아닌 1941년 2월 16일이라 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 김정일 陰性강해 하체不實型-運氣法으로 풀어본 체질.성격 중앙일보 1994.10.30 종합 2면
............
6.25 때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
6.25 때 평양에 진주한 미군이 1950년 10월 16일 ~ 10월 20일간에 노획한 북한 문서[27] 중에 김정일의 생년과 출생지에 관해 나오는 것이 있다고 한다.
- [장성민의 시사탱크] 충격 공개! 北 '노획문서'…김씨왕조 속살 드러나 TV조선 2013.06.06
이 방송에서 우종창 기자는 노획문서 중에 "김정일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오케안스카야 야영지(군대 주둔지)에서 1941년 2월 16일 출생했다 (16분 25초)"고 나오는 것이 있다 한다.
해방 직후 북한 문서로도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출생인 것이 입증되는 셈이나, 해당 문건의 이미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관련 자료
- ‘광명성절’ 앞둔 北... 김정일은 41년생? 42년생? 주간조선 제2745호 2023.02.11
함께 보기
각주
- ↑ 북, 김정일 국방위원장 80회 생일 기념 순금, 순은 주화 발행 중앙일보 2022.02.15
- ↑ (김씨 왕조의 실체) 김정일 출생을 둘러싼 비밀 자유아시아방송 2009-11-16
- ↑ 말썽꾸러기 김정일은 어떻게 최고통치자 됐나? 데일리NK 2011.06.12
- ↑ 김정일의 생애와 숨겨진 비밀 자유아시아방송(RFA) 2017-04-18
- ↑ 김정일 출생(1941.2.16) DailyNK - 2005.02.16
- ↑ [사건으로 보는 북한] 82년 김정일 백두산출생 신화 NK조선 2002-03-09 : 생모 김정일 낳을 때 소련병영에 머물러 / 김정일 본인 40회 생일 앞두고 출생설 조작
- ↑ 7.0 7.1 7.2 완전해부 인간 김정일 미스터리 :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신동아 2000년 08월호 / 491호 (pp.122~131)
- ↑ 金日成 전속 간호부 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金日星(김일성)의 看護婦(간호부) 合同搜査本部(합동수사본부)서 逮捕(체포) 부산일보 1951-03-01 - ↑ 黨(당) 祕書局長(비서국장)에 金日成後繼(김일성후계)에 金正一(김정일)(次男(차남)) 1974.04.09 동아일보 3면
- ↑ 在日統一(재일통일)일보 報道(보도) 金日成(김일성)후계에 次男(차남) 正一(정일) 옹립 경향신문 1면 1974-04-09
- ↑ 김일성 후계에 아들 김정일 중앙일보 1974.04.09 종합 1면
- ↑ 「김정일 후계론」속단 못해 중앙일보 1974.05.14 종합 1면 - 33세
- ↑ 金正一(김정일), 東獨空軍大(동독공군대)서 修學(수학) 1976.10.26 경향신문 3면 - 정확한 나이 35세
- ↑ 金正一(김정일)의 生日(생일)을 休務日(휴무일)로 1976.02.24 동아일보 3면
- ↑ [김씨 왕조의 실체] 김정일 출생을 둘러싼 비밀 자유아시아방송 2009-11-16
- ↑ 말썽꾸러기 김정일은 어떻게 최고통치자 됐나? DailyNK -2011.06.1
- ↑ 오기완(吳基完), 《김정일(金正一) 스토리》, 『북한(北韓)』 제41호 (4권 5호) (서울 : 북한연구소, 1975-05-01) pp.152-161
- ↑ 김일성후계체제와 김정일 (국토통일원, 1980년 8월, 관리번호 : C11M33830) p.29 : 국가기록원
- ↑ CIA, THE NORTH KOREAN SUCCESSION Publication Date: October 1, 1978
- ↑ 北傀(북괴) 金正日(김정일) 생일 祝賀(축하) 日革新系(일혁신계)서 파티열어 1981.02.17 동아일보 5면
- ↑ "金正一(김정일)은 金正日(김정일)" 北傀(북괴)서 정정요청 1980.10.16 경향신문 3면
- ↑ 金正一(김정일)을 金正日(김정일)로 北傀(북괴),黨大會(당대회)뒤 改名(개명) 1980.10.16 동아일보 2면
- ↑ <김정일 사망> 37년간 `北 절대자' 군림 김정일 연합뉴스 2011-12-19
- ↑ THE NORTH KOREAN SUCCESSION March 1, 1982 : 김정일이 40세, 김일성은 다음달에 70세가 됨.
- ↑ NORTH KOREA: THE DYNASTY TAKES SHAPE March 3, 1982 : 김정일이 지난 달에 40세가 되었다고 하여 1942년생으로 봄.
- ↑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611 : 1941년 8월 8일 왕일지가 병원에서 여아를 낳음.
- ↑ 국회도서관에 "한국전쟁시 미군 노획 문서"라는 제목의 [마이크로자료] 총 101권이 소장되어 있다 : 한국전쟁시 미군 노획 문서. v.1 [마이크로자료] ~ 한국전쟁시 미군 노획 문서. v.101 [마이크로자료] (서울 : 국회도서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