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Георгиевич Лебедев, Nikolai Georgievich Lebedev, 1901년 ~ 1992년 5월 10일)는 소련의 군인이다.[1]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의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평양 소련군정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당시 계급은 소장이었다. 소련군이 교육시켜 데려 온 대리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워 북한 정권을 수립해 가는 전 과정을 지휘하였다. 평양 소련군정을 총지휘한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다.


생애
- Nikolai Georgiyevich Lebedev Wikipedia
- Лебедев, Николай Георгиевич ( Lebedev, Nikolai Georgievich, 러시아어 wikipedia)
- 니콜라이 레베데프 위키 백과
그는 소련군정 기간에 소련측 대표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하러 몇 차례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 1967년부터 1980년까지 김일성의 초대를 받아 해마다 국가명절이 된 김일성의 생일(4월 15일)에 북한을 방문했다. 1980년 방북한 레베데프 소장은 김일성을 만나고 평양을 관광한다. 김일성과 과거를 회상하며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무심코 그의 어깨를 툭쳤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는 초청받지 못했다 한다.[2][3]
레베데프의 김일성 가짜 증언
그는 상당히 장수하여 1990년 10월 한국과 소련이 수교할 당시까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1991년 모스크바의 자택으로 찾아간 한국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하여 소련 군정 당시의 일에 대해 많은 중요한 증언을 하였다.[4][5][6]
소련군정은 당시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사실상 무명인사였던 김성주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레베데프는 증언했다. 당시 일에 대한 레베데프 소장의 증언은 1991년 가을에 있었으며, 아래와 같다.[7]
사령부 첩보국과 특수선동부는 김일성의 출생지에서부터 가족사항, 학력, 성분, 중국공산당 입당과 활동사항, 빨치산 운동 등 그에 대한 일체의 신상조사를 끝냈다. 우리는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로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정치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작전을 찾아야 한다고 지도부에 건의했다. 이 아이디어는 핵심지도부를 놀라게 했다. 훗날 북조선 민주기지 건설의 총 지휘자 스티코프 장군도 이 아이디어는 ‘조선의 민주기지 깃발’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붉은 군대는 김일성을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
그를 수령으로 올려 놓기까지 붉은 군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일성도 소련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까지 소련과 소련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대해 최대의 존경과 감사함을 갖고 행동했다."그는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이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서던 날 있었던 일에 대헤서도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8][9] 이 대회의 막후 지휘자였던 레베데프의 증언은 당시 소련의 속생각을 드러내주고 있다.
대회전날인 13일 밤 김일센이 양복차림으로 왼쪽 가슴에 소련훈장을 달고 찾아와 「사령관님,이 복장으로 내일 대회장에 나가 인민들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명연설을 하겠습니다」면서 으쓱거리더군요. 나는 소련훈장을 달고 나가면 군중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으니 떼고 나가라고 지적했지요. 그러나 연설장에서 보니 훈장을 달고 나왔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김일센의 연설원고는 우리 사령부에서 작성해 준 것입니다. 소련장교가 소련어로 작성해 고려인이 한글로 번역(외무성부상 박길용 박사는 시인 전동혁이 번역한 것이라고 증언)한 것이지요. 이날 연설에서 조만식은 조선해방에 대한 감사와 민주조선 건설을 위해 투쟁해 나가자고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김일센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이 주석단앞까지 몰려와 「가짜 김일센이다」며 소동을 벌였지요.
조금은 난감했습니다. 주최측은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몽둥이를 휘두르기까지 했으니까요. 이같은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대회후 기자들을 만경대 김일센 생가로 데리고 가 그의 조부모·숙부와 숙모 등 친·인척 모두를 소개했지요. 그랬더니 인민들의 여론이 가라앉는듯 했습니다.』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권 (중앙일보사, 1992년 05월 05일) pp.88~89
장준익(張浚翼, 1935~ )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1991년 8월 22일 소련 모스크바의 레베데프 소장을 찾아가서 나눈 대담 중에는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김일성 환영집회에 대한 증언도 있다.[6]
레베데프의 증언대로 10월 14일 김일성이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 가짜 소동이 벌어지자 기자들을 김일성의 고향 만경대로 데려가 친지들을 만나는 장면을 연출할 당시의 사진도 남아 있다. 김일성과 강 미하일 소좌,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의 복장이 김일성이 연설하던 날의 복장과 동일하여 같은 날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종북화된 한국 학계에서는 소련군정 당시 평양에서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정치공작을 총지휘한 장본인인 레베데프 소장의 이러한 후일 증언은 철저히 외면하고,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1946년 7월 스탈린의 김일성ㆍ박헌영 면접시험에 관한 증언

소련 군정이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키며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앉혀 사실상 그를 북한 지도자로 표면에 내세우자 이에 불만을 품은 박헌영은 소련 측에 여러 차례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1946년 7월 초순 김일성과 박헌영을 같이 모스크바로 불러 재차 지도자 면접시험을 보게된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을 지도자로 재확인하고 박헌영에게는 격려의 말만 해주었다. 이 면접은 사실상 박헌영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요식행위였다. 당시 사정에 대한 레베데프의 증언이 아래에 나온다.
- 김일성이냐 박헌영이냐 / 레베데프 당시 정치사령관 첫 증언 중앙일보 1991.11.30 종합 1면
- ◎스탈린이 면접 지명 / 46년 7월 크렘린서 극비리에 / 당시 군부·외무성 다투자 / 스탈린,김에 공산화 지시
- 스탈린/김일성 오른쪽 앉혀 낙점암시 / 45년만에 밝혀진 북한 비사 중앙일보 1991.11.30 종합 3면
- ◎평양에 군용기 보내 김·박헌영 불러 / “박은 지명도 낮다” 판단 탈락 / “차기후보” 주위 위로에 박 불만없이 소에 수긍 / 면접뒤 연안파 합당등 김 체제 확립
-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9) 박헌영-김일성 4차 회동(3) 중앙일보 1992.01.06 종합 11면
-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1992), pp. 326-330.
김일성 수령 만들기 공작에 대한 증언
레베데프는 또한 소련군이 김일성을 수령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 북조선 인민의 '위대한 수령'은 북조선 인민의 의사에 의해 추대된 것이 아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소련공산당 정치국과 스탈린의 직접적 구상에 따라 평양주둔 붉은 군대가 교육시켜 창조한 것이다. 일개 소련군 정찰부대의 대위를 일약 '김일성 장군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가로 추켜세운 작업은 특정 장교의 특수임무가 아닌 평양주둔 소련군정 체제의 전반적 기구가 동원됐다. 이 작업의 총책임자는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주 당비서를 지냈고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특명을 받은 육군 중장(후에 대장 진급) 스티코프였다. 그의 지휘 아래 25 야전군 군사위원회 군사위원인 나와 소련 야전군 특수선동부장 중좌 코브젠코, 민정을 담당했던 소련군 육군소장 로마넨코, 그의 정치담당 보좌관 대좌 이그나치예프, 25 야전군 첩보국 책임자 육군소장 아노힌, 소련군 극동사령부 7호정치국 정치담당관 중좌 메크레르 등이 특명을 수행했다.
- 이 과정에서 우리는 소군정이 주관했던 조선신문과 라디오평양 등 선전매체를 동원했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세운 김일성대학에 소련학자 박일(朴一· 현재 카자흐 수도 알마아타 거주)을 부총장으로 앉혀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치도록 했다. 그리고 특수임무 수행을 위해 소련출생 조선인 2세 장교 15명 정도를 모스크바에서 급파해 오기도 했다.
-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고 한반도에 민주기지를 창설하라'는 특명수행을 위해 때로는 거칠게, 양심의 가책도 없이 철면피하게 거의 ‘무(無)’에서 지도자 김일성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 붉은 군대는 3년여 동안(정확히 말하면 3년 4개월 동안) 김일성이 '위대한 수령'이 되기 위한 기초를 닦아 놓았다.
레베데프 비망록
그가 남긴 비망록이 강원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송광호 기자에 의해 1994년 말 발굴되어 국내 언론에 공개되었다.
- 송광호 칼럼 <47> 모스크바 특파원(초대-2대)시절 회고 사색의 향기 2012-09-17
-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1] 사라져 버린 레베데프 사령관 비망록 World Korean 2021.05.10
1948년 김구, 김규식 등 남측 인사들이 방북하여 남북협상을 할 당시 일의 내막을 아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원본은 강원일보 송광호 기자가 발굴했으나 중앙일보는 자신들이 발굴한 것처럼 기사를 실었다.
- 48년 남북정치협상은 소(蘇)각본 - 소(蘇) 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1면
이와 함께 소(蘇)군정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이 남북(南北)지도자 연석회의를 결렬시키거나 회의에서 퇴장하면 이들을 「미제(美帝)간첩」으로 폭로하는 대책을 수립해 놓았다.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 『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 5월 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 『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 『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 <평양의4김회담>1. 레베데프 비망록-자료적 가치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8면
- <평양의4김회담>1. 46년만에 밝혀진 南北정치협상 진상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8면
- <평양의4김회담>2. 金九 올때까지 대표자회의 연기 [중앙일보] 1994.11.16 종합 8면
- <평양의4김회담>2. <해설> 蘇군정 남한정세 손금보듯 [중앙일보] 1994. 11.16 종합 8면
- <평양의4김회담>3. 蘇,김일성에 신문보도 일일이 지시 [중앙일보] 1994.11.17 종합 8면
- <평양의4김회담>4. 白凡 "나는 김일성 만나러 왔을뿐" [중앙일보] 1994.11.21 종합 8면
- <평양의4김회담>5. 蘇 朴憲永도 빠뜨려선 안된다 [중앙일보] 1994.11.22 종합 8면
- <평양의4김회담>6. 蘇 南대표에 총선후 정부수립 약속받아라 [중앙일보] 1994.11.23 종합 8면
- <평양의4김회담>7. 끝 조만식 南行 白凡요구에 金日成침묵 [중앙일보] 1994.11.24 종합 8면
비망록의 전체 내용은 아래 책들에 나온다.
- 전현수 역, 『레베제프일기(1947~1948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2006.
- 북한현대사 관련 러시아 기록사료(Russian Archives) 조사연구 - 구소련 군정문서.외교문서(1945-1960)를 중심으로 기초학문자료센터 (KRM)
- 북한현대사 관련 러시아 기록사료(Russian Archives) 조사연구 - 구소련 군정문서.외교문서(1945-1960)를 중심으로 3 레베제프 일기 러시아어 원문
- 북한현대사 관련 러시아 기록사료(Russian Archives) 조사연구 - 구소련 군정문서.외교문서(1945-1960)를 중심으로 11 레베제프 일기 번역문
- 김영중(金英仲) 편, ≪레베데프 비망록 : 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1947.5.14~1948.12.26 기록≫ (제주, 해동인쇄사, 2016) / (Naver 책 : ISBN 480B170805082)
- 레베데프 비망록.pdf (전 제주경찰서장 김영중)
- 쉬띄꼬프 일기.pdf
레베데프 비망록 발굴 당시 부산일보도 전문을 기사로 연재하였으며, 인터넷 검색으로 볼 수 있다.
- 「레베데프 비망록」 발견 의미 : "北 정권 수립 이면사(裏面史) 밝힐 단서" 부산일보 1994-12-30
- 청진·나남 우라늄 채굴 노려 蘇, 6·25 北남침 지원 : 金九 협상제의 역이용 부산일보 1994-12-30
- 북한정권 수립 이면사(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 : 인민위원 84%가 노동자·농민 부산일보 1995-01-06
-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2 : 北 릴레이식 군중집회로 대표단 전송 부산일보 1995-01-10
-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3 : 蘇의 임시정부案 47년 5월 22일~26일 부산일보 199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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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6 북로당 2차 당 대회 48년 3월 24일~4월 8일 - 부산일보 1995. 3. 7.
- 북한 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20 : 김규식, 「통일조선 미래」논의 제안 부산일보 1995-03-21
- 북한 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21 : 김책, "美帝·남한 쳐부술 힘 있다" 부산일보 1995-03-24
- 북한 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22 : 北韓 정권수립과정 내막 재현 (최종회) 부산일보 1995-03-28
《수행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고》
그의 회고록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고》라는 글이 있고, 1976년 소련과학아카데미에서 출판한 『조선의 해방』이란 책에 수록되어 있다.
- N. G. 레베데프, 《遂行하여야 할 義務를 自覺하여》, 『(蘇聯 科學아카데미 東洋學硏究所 發行 1976년판) 朝鮮의 解放』, (서울 : 국토통일원, 1988) pp.82 ~ 133.
- 소련 과학 아카데미 편, 『레닌그라드로부터 평양까지 : 조선해방에 있어 소련장성 11인의 회고록』 (서울 : 함성, 1989년 05월 01일)
- pp.65 ~ 100 : 제2장 수행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면 : N.G.레베데프 소장
참고 자료
- ≪비록(祕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 [상] 1992년 05월 05일, [하] 1993년) : 중앙일보 취재반이 1991년 레베데프 소장과 인터뷰한 내용이 들어있음
- 김국후 저, 『평양의 소련군정 : 기록과 증언으로 본 북한정권 탄생비화』 한울아카데미 2008년 06월 21일
- 장준익(張浚翼), ≪북한인민군대사(北韓人民軍隊史)≫ (서문당, 1991년 11월 1일) : 1991년 8월 22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레베데프 소장과 저자(전 육군사관학교 교장)가 대담한 내용 나옴.
- 레베데프의 북한 정권 요인에 대한 평정서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 포털
함께 보기
각주
- ↑ Лебедев, Николай Георгиевич (러시아어 wikipedia) : Lebedev, Nikolai Georgievich 구글 영역
- ↑ 김일성 고향이 만경대로 알고 계시죠? 사실은요 DailyNK - 2013.12.26
- ↑ Сделан в СССР :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No.9/268, Опубликовано: 1 Сентября 2011 (Made in the USSR "Top Secret", No.9 / 268, Published: September 1, 2011) / Сделан в СССР softmixer 전재
- ↑ ≪비록(祕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 중앙일보 취재반이 1991년 레베데프 소장과 인터뷰한 내용이 들어있음.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증언 / 미소공위 소 대표 레베데프 사망 [중앙일보] 입력 1992.05.14
- ↑ 6.0 6.1 장준익(張浚翼), ≪북한인민군대사(北韓人民軍隊史)≫ (서문당, 1991년 11월 1일) : 1991년 8월 22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레베데프 소장과 저자(전 육군사관학교 교장)가 대담한 내용 나옴.
- ↑ 박길용, 김국후 저, 『김일성 외교비사』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용 (朴吉用, 1920~1997)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는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 ↑ ≪비록(祕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상권 pp.84~90
- ↑ 김일성 환영대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중앙일보 1991년 09월 05일 종합 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