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설야(韓雪野, 1900년 8월 3일 ~ 1976년 4월 6일)는 일제시대부터 활동한 좌파 작가이다.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하며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글들을 많이 썼다. 1963년경 숙청된 후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후일 애국열사릉의 묘비가 공개되면서 1976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후(死後) 어느 시점에서 복권된 것으로 보인다. 본명은 한병도(韓秉道)이다.
개요
- 한설야(韓雪野, 1900-1976) 한국 근대 지식인 관계망,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설야 (韓雪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설야 - 위키백과
김일성을 찬양한 작품들
좌경화된 남한의 문학계에서는 그가 마치 대단한 작가인 것처럼 찬양일색이지만, 해방 후 북한에서 그는 김일성의 제일가는 나팔수 노릇을 했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확산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한설야는 그가 마치 대단한 항일영웅인 것처럼 미화하는 글을 수도 없이 썼다. 그는 김일성의 괴벨스나 다름없었다. 남한의 작가 중에 누군가가 그렇게 이승만을 미화하는 글을 썼다면 작가 취급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설야가 쓴 맹목적인 김일성 찬양 글은 마치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평하고 있다.
- 한설야(韓雪野), 《김일성장군 인상기(金日成將軍 印象記)》
- 『김일성 장군 (金日成 將軍)』 - 北朝鮮 五一節 紀念事業準備委員會 (平壤 紀新社, 1946년 5월 1일) : 팜플릿 (소책자) 수록.
- 이 글은 북조선공산당 기관지 『정로(正路)』 1946년 5월 1일, 7일, 11일, 17일자에 연재되었다.[1]
- 한설야(韓雪野), 《혈로(血路)》
- 『우리의 太陽 : 김일성장군 찬양특집(金日成 將軍 讚揚特輯)』, ([平壤] : 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pp.40~58.
- 한설야(韓雪野), 《北朝鮮特輯 : 作家가 본 金日成將軍》 : 북한의 한설야가 1947년 2월 남한 잡지에 기고한 글
- 월간잡지 『민성(民聲)』 제3권 제1-2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7.02.01 (국립중앙도서관) pp.30~31.
- p.31 에 북한 김일성이 1936년 5월 5일 조직했다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이 나오지만,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 월간잡지 『민성(民聲)』 제3권 제1-2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7.02.01 (국립중앙도서관) pp.30~31.
- 한설야(韓雪野), 『영웅 김일성 장군(英雄金日成將軍)』 (釜山: 新生社, 1947).[2][3]
- 1946년 9월 김일성의 흔적을 찾아 중국 동북지역을 답사한 후 집필.
- 1946년 10월 노동신문 연재 후 단행본 출간.
- 항일무장투쟁기를 중심으로 김일성의 생애를 약술(略述)한, 이른바 ‘살아 있는 영웅의 전기’라 할 수 있다. 총 열 장의 본문(「學生時代」-「東滿反日遊擊隊形成時期」-「人民革命軍時代」( 1 ) ( 2 ) -「東北抗日聯軍時代」(1)(2)(3)(4)-「結語」-「附記」)과 「附錄」으로 구성. 「附記」는 본문의 마지막 장(章)으로 1) 將軍의 戰死說, 2) 倭軍의 暗殺陰謀, 3) 夫人의 戰記, 4) 將軍의 近親들, 이렇게 네 개의 절로 되어 있고, 「附錄」은 김일성의 담화문을 수록하였다.[4]
- 한설야(韓雪野), 《將軍의 아버님과 어머님》, 『조선여성』 1947년 7월호 (평양:조선여성사,1947.07.30) pp.70~74.
- 주로 김일성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서술되며, 김일성의 유년기에서부터 부모의 사망과 해방 후 이장(移葬)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1]
- 모친 강반석의 묘는 1947년 6월 3일에, 부친 김형직의 묘는 한달 뒤인 7월 4일에 만경대 뒷산으로 이장함.
- 한설야(韓雪野), 《개선》 : 1948년 3월 1일 작.
- 한설야 단편집(韓雪野 短篇集) : 탄갱촌(炭坑村), [平壤] :조쏘문화협회중앙본부(朝蘇文化協會中央本部, 1948) pp.5~46.
- 김일성 숙모의 시각에서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처음으로 평양의 대중 앞에 나선 집회의 모습과 이후 김일성의 만경대 고향집 방문에 대해 묘사.
한설야 숙청의 배경
해방 직후 김일성을 미화 찬양하는 글을 수도 없이 써서 그가 권력기반을 강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설야는 나중에 김일성 면전에서 작가들이 글 쓰는 일에 너무 간섭하면 글을 잘 쓸 수 없다고 했다가 숙청 당했다고 한다.
-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김일성 면전에서 대든 북한 소설가 RFA 2024.09.21
도명학: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작가들 중에도 신세대 작가들은 대개 모를 것입니다. 그만큼 오래전 일이고 더욱이 숙청된 한설야 작가의 명예가 복권돼 애국열사릉에 묻혔을 정도기에 한설야 숙청에 관한 이야기는 감히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되었기에 더구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설야 숙청 이유에 대해 남한에서는 문인들 간 갈등에서 비롯된 정치적 숙청으로 보던데, 제가 북한에서 알고 있던 이유는 다릅니다. 1960년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들에서 창작에서 개성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면서 문학예술에 대한 공산당의 간섭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북한만은 문학예술에 대한 당의 영도를 오히려 더 강화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한설야가 심지가 굳은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수상님, 작가들이 글 쓰는 일에 너무 간섭하면 글을 잘 쓸 수 없습니다.”하고 대꾸한 괘씸죄로 숙청된 것입니다.
MC: 한설야 작가는 용감한 건가요, 아니면 무모한 걸까요? 오늘 날에는 왜 한설야 작가 같은 사람이 없는 걸까요?
도명학: 저는 한설야 작가가 대쪽 같은 성품의 소유자여서 화를 당했다고 봅니다. 한설야를 비롯한 카프 출신 작가들의 대쪽 같은 성품에 대해선 김일성도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일제가 아무리 탄압하고 회유해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고, 차라리 펜을 꺾으면 꺾었지 일제에 협조하는 글은 절대 쓸 수 없다며 산중에 들어가 옥수수 농사를 하며 지냈을 정도로 저항 의식이 높았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런 것으로 봐선 한설야 작가가 문학창작의 자유를 억제하는 당적 지도 강화에 굴하지 않고 자기 성품대로 발언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에 있을 때 연세 많은 노작가 한분이 저에게 얘기하기를 한설야가 앞에서 말한 그 발언 외에 더 심한 발언도 했다고 합니다. 한설야 작가가 글을 계속 쓰지 않는 것을 보고 다른 작가들이 왜 글을 안 쓰냐고 물었더니 “난 배부른 자들을 위한 글은 안 써” 했답니다.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선택한 사회주의 북한이 이상하게 변질된 독재 체제가 되어 가는 현실을 그런 식으로 불만을 터뜨렸던 거죠.
참고 자료
- 임유경, 나의 젊은 조국 -1940년대 한설야의 ‘부권의식’과 ‘청년/지도자 서사’- 『현대문학의 연구』 44호 (한국문학연구학회, 2011) pp.211 - 252
- 최강미, 웃음 웃는 지도자 - 해방 직후 북한소설의 ‘김일성’ 형상, 『상허학보』 59집, pp.355~399, Dec 2020
- 김진영, 스탈린의 ‘태양’ 아래: 김일성 형상의 원형을 찾아서 러시아연구 2022, vol.32, no.2, pp. 75-104 (30 pages)
각주
- ↑ 1.0 1.1 최강미, 웃음 웃는 지도자 - 해방 직후 북한소설의 ‘김일성’ 형상, 『상허학보』 59집, pp.355~399, Dec 2020
- ↑ 한설야(韓雪野), 英雄 金日成將軍 (부산 : 新生社, 1947) 국사편찬위 도서관
- ↑ 한설야(韓雪野), 金日成將軍 : 서울: 新生社, 1947 국립중앙도서관
- ↑ 임유경, 나의 젊은 조국 -1940년대 한설야의 ‘부권의식’과 ‘청년/지도자 서사’- 『현대문학의 연구』 44호 (한국문학연구학회, 2011) pp.211 - 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