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5호 전차 판터는 2차 세계대전당시 MAN사에서 개발한 중형전차이다.
상세
독일군은 4호 전차와 6호 전차 티거만으론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전차를 입찰하기 시작했다. 이에 마이바흐사의 T-34를 닮은 VK.30.01과 MAN 사의 VK.30.02가 이 입찰에 응했고, 국방군은 VK.30.02를 제식명 5호 전차 판터로 채택한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당시 T-34의 경사장갑에 호되게 당한 단포신 4호 전차의 교훈을 참고해 판터에는 전면에 경사장갑을 적용하였고, 판터는 중형전차 주제에 전면 약점이 샷트랩을 유발하는 포방패 하단에만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전면에서 기갑전을 벌일 경우, 소련의 T-34/76와 미국의 75 mm 주포를 탑재한 셔먼 전차를 상대로는 거의 무적이었고 1944년부터 양상된 소련의 T-34/85를 상대로도 둥근 포방패의 수직부위만 조심하면 되었기 때문에 매우 우세했다.
판터는 중형전차임에도 불구하고 소련 최강의 중전차라는 IS-2를 상대로도 전차전에서 우위를 점했다. 판터의 치명적이고 정밀한 주포는 IS-2의 정면에 있는 약점들을 관통해버리기에 제격이었다. IS-2의 과도하게 큰 주포는 장전 속도가 20~30초로 너무 느려 전차전에서는 오히려 약점이었다. 당시 전차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원시적인 거리 측정 방식의 한계로 중장거리에서 초탄에 적 전차를 명중시킬 확률은 극히 낮았으며, 대부분 차탄 싸움으로 흘러갔기 때문이었기 때문이었다. 판터의 주포는 관통력, 유효사거리, 명중률이 모두 높기 때문에 판터가 먼저 사격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전 말기로 갈수록 독일이 방어전을 위해 미리 판터를 매복시켜 놓거나 좋은 자리에 배치해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에 더더욱. 심지어 중장거리에서 IS-2가 판터와 1대1로 조우하고 서로 거의 동시에 사격을 가한다고 가정해도 IS-2가 최대한 빨리 차탄을 장전한다고 한들 최소 20초가 소요되는데, 그 기나긴 공백동안 판터는 치명적인 관통력의 주포로 아주 여유롭게 IS-2에게 최소 3발의 매우 정밀한 사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IS-2의 주포의 평균 장전 시간은 25초였으니 IS-2는 판터와의 전차전에서 기나긴 IS-2의 재장전 시간 동안 판터에게 4~5발 까지도 난타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이하게도 판터 생산형별 기호는 대부분의 독일 전차와 달리 알파벳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가장 초기형인 판터 D형(Ausf. D) 뒤에는 A형, G형 순서로 변종이 따랐다.
장점
중(重)전차 수준의 전면장갑
판터는 전방위 방호력보단 전면장갑만을 신경써서 만들었는데, 판터의 전면장갑의 방호력이 동시대의 중전차에 준하는 수준이었을 정도이다. 반면 측면장갑은 평범한데, 측면 장갑까지 신경을 쓰면 중전차인 6호 전차 티거와 다를 바 없이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판터의 이러한 설계는 M46 패튼, 센츄리온 전차등의 현대 주력 전차(MBT) 개념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판터의 이러한 설계는 중형전차가 중전차급의 주포 성능과 전면방호력을 갖추고 경전차보다 뛰어난 전술기동력을 갖출 수 있는, 어찌 보면 최초의 주력 전차(MBT)의 설계라고 할 수 있다.
경전차보다 뛰어난 전술기동력
판터는 중전차인 6호 전차 티거 I과 티거 II에도 장착되는 700마력이 넘어가는 고출력 마이바흐제 자연흡기 엔진을 장착했고 최고 속도는 당시 중형전차들의 평균적인 최고 속도였던 40 km/h를 가볍게 넘기는 46~55 km/h였을 뿐만 아니라 경전차나 중형전차들에 비해 무한궤도의 접지압까지 훨씬 넓고 마찰력과 무게 배분까지 가장 우수하여 우회 기동에 매우 유리했다. 후에 이 설계는 현대 시대의 주력전차에도 적용된다.
주포의 막강한 관통력과 압도적인 명중률
판터는 강력한 7,5 cm KwK 42 L/70 주포를 탑재하여 소련의 T-34와 미국의 M4 셔먼 등 연합군의 주력 중형전차들의 장갑을 전면에서 일격에 관통해버렸다. 판터가 전면에서 쉽게 격파시키지 못한 대전기 중형전차는 미군이 극소수로 운용한 점보 셔먼을 제외하면 없었으며, 연합군의 처칠 전차, KV-1등의 중전차들도 약점 사격으로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판터의 주포 명중률은 1,100 m 거리에서 소련군을 사살한 기록을 올린 독일 국방군 최고의 저격수인 마테우스 헤체나우어가 사용한 저격용 Kar98k 그 이상의 수준으로, 판터는 철갑탄으로도 1 km 밖에 숨은 소련군의 저격수를 명중시킬 수 있었다. 전장에 판터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최대한의 장거리에서 거리 조절을 하며 은밀히 활동하고자 하는 적 저격수들까지 위축시킬 수 있었던 것.
높은 가성비와 성공적인 생산성
이전 중형전차 모델인 4호 전차가 중량이 25톤에 가격은 10만 라이히스마르크였던 것에 비해 판터는 주포와 조준경, 포탄 등의 무장이 완비되었을 때의 중량이 45톤에 달했으나 가격은 약 17만 라이히스마르크 수준으로, 무게가 약 80% 증가한 반면 생산비용은 약 70%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또한 판터는 4호 전차보다 늦게 양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을 따라잡을 정도로 생산성이 좋았다. 덕분에 독일의 군수산업이 연합군의 폭격과 특수강 고갈 등의 악재에 노출된 1944년에도 판터는 1개월에 300여 대 정도씩 생산될 수 있었다.
세계 최초로 야간투시장치 장착
판터는 대부분의 현대 전차들이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야간투시장치를 전 세계 최초로 장착한 전차였다. 이 야간투시장치의 이름은 FG-1250으로, 개발은 칼 자이스의 잉그 가르트너 박사에 의해 진행되었다. 원리는 IR 투광기를 이용해 눈에는 보이지 않는 파장의 적외선 빛을 투사하고 반사되는 빛을 센서 배열에 전기반응 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아날로그 시각화 장치를 개발하여 영상으로 변환해 전차장에게 제공한 것이다. 오늘날 방범 카메라의 야간 감시 기능이 이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다. 시제품이 완성되고 실용성 테스트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야간에도 유리하게 전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된 히틀러는 모든 판터 전차에 이 장치를 추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 적외선 소자는 양산하기 비싸고 독일 본토까지 공격에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양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소수의 판터 중대들이 이러한 야간투시장치를 장착했으나 전과는 유명하지 않다. 몇몇 전투에서 FG-1250으로 야간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후에는 소련과 야간투시장비 개발에 참고하기도 했다. 미국도 관련 연구를 동시기에 진행했고 저격수용 스코프로 실전 투입까지 성공했으니 최초로 전차에 사용된 야간투시장비라는 점에는 의의가 있다.
단점
평범한 측면 장갑과 포탑 하단의 샷트랩
판터의 측면장갑은 주력전차처럼 평범했다. 하지만 판터의 목적은 전면 방호력이지, 전방위 방호력이 아니기에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포탑 전면의 둥근 형상 때문에 포탑 전면 하단에 피탄될 경우 탄이 도탄되어 차체 상부장갑을 뚫는 샷트랩 현상은 조종수와 무전수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고, 후에 포탑을 교체하거나 포방패 형상을 고쳐 해결했다.
무게중심이 좋지 않은 긴 포신
판터 초기형인 D형의 포탑 선회력은 거의 대전차포인 M10, M36 잭슨과 비슷할 정도로 느렸다. 그래서 측면에서 기습하는 전차, 대전차포, 대전차 수류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후 판터 A형부터 엔진 출력에 따라서 1회전을 15~93초로 선택할 수 있는 유압식 회전 장치를 장착함으로써 회전속도는 개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판터는 작은 포탑에 70구경장의 긴 포를 장착해 무게 밸런스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차체 경사각도가 20도 정도면 포탑회전출력이 부족해 포탑을 돌리기가 힘들었으며 그보다 더한 심한 경사에서는 포탑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멋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있었다.
낮은 정비성과 신뢰성
판터는 티거 시리즈와 동일한 엔진을 사용하는데 상대적으로 좁은 차체를 가진 판터에게 이러한 중전차의 엔진은 정비를 까다롭게 만들었고 티거 시리즈에는 없던 엔진 과열 관련 문제를 생기게 했다. 판터의 극초기 생산분은 연료배관과 배기관이 겹쳐져 있는 설계결함으로 인해 화재까지 다수 발생했으나 설계를 수정하고 개선하며 점차 해결되었다. 변속기를 개량하고 엔진은 출력을 일부 제한하는 것으로 조치했다.
판터의 가장 큰 문제는 엔진이 아니라 저가형 종감속기어(최종구동장치)의 잦은 파손이었다. 판터의 무게는 44.8톤으로서 티거 1의 56톤에 비해서는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으나 가격과 생산 시간을 낮추기 위해 채택한 저가형 종감속장치가 파손되는 경향이 잦았다. 이는 원래 판터에는 잘 파손되지 않는 헬리컬형 기어를 채택할 계획이었으나 판터의 생산에 걸리는 시간과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기 위하여 스퍼형 기어를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은 이러한 전략기동력의 불안정성으로 인한 다소 짧은 기동 가능 거리를 가진 가진 판터를 최대 효율로 운용하기 위해 멀지 않은 거리라도 판터를 열차에 실어서 이동시키는 것을 권장했다. 그러나 전술상으로는 항상 열차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판터의 전략기동력에는 단점이 있었고 이것은 운용에 있어 난점으로 평가되었다.
평가
판터는 타국의 중형전차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했고 전후에 주력전차의 개념을 만드는 등 2차대전기 최고의 중형전차라고 할 수 있다. 가끔 독까들이 판터의 포방패 샷트랩을 약점이라고 욕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스펙상으로 봐도 판터는 포방패의 수직 부위만이 그나마 약점이지만 동시대의 다른 중형전차들은 전면에서 차체와 포방패를 포함한 거의 모든 부위가 판터의 강력하고 정밀한 주포에 관통당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판터를 마치 부족한 전차처럼 말하는 것은 바보같은 소리이다.
운용자
판터 에이스들 중 1위는 에른스트 바르크만이 있는데, 전차 격파 수는 80대를 기록했다. 참고로 독일 전차 에이스들 중 최상위권은 최소 168대 이상의 전차를 격파한 쿠르트 크니스펠, 161대의 전차를 격파한 마르틴 슈로이프, 최소 150대 이상의 전차를 격파한 유명한 오토 카리우스, 139~144대의 전차를 격파한 요하네스 뵐터, 138대를 격파했으며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미하엘 비트만 등 전부 6호 전차 티거 승무원들이 차지했는데 이들과는 다르게 바르크만의 전차 격파수가 티거 에이스들과 비교하면 적어 보일 수 있지만 판터는 어디까지나 중형전차 용도로 만들어졌고 중형전차로서 운용되었기에 판터의 측면 장갑 두께는 중전차인 티거의 측면 장갑 두께에 비해 훨씬 얇고 빈약했고, 따라서 측면 장갑이 불안한 판터로 전차 에이스가 되는 것은 티거로 에이스가 되는 것보다 난이도가 더 높을 수 밖에 없었기에 바르크만의 순수 실력만 놓고 본다면 티거 슈퍼 에이스들 못지 않게 대단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고, 중형전차 분야의 에이스로서 정점을 찍었기에 높이 평가된다. 동시에 실전에서 판터의 성능 역시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 제3제국의 대표적인 기갑 지휘관 중 한 명인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쿠르스크 전투 때 최초로 지휘를 맡아 운용했다. 당시 헤르만 호트는 제4기갑군 사령관으로서 쿠르스크를 향한 독일의 대공세 작전인 성채 작전에서 핵심 공세 방향이었던 남부 방향의 기갑군을 책임졌는데, 호트는 제48기갑군단과 제2SS기갑군단을 쿠르스크 남쪽에서 병렬 진격시켜 작전 목표에 도달할 생각이었다. 호트는 제48기갑군단의 공세를 성공시킬 목적으로 제10기갑여단 소속의 최신예 중형전차인 5호 전차 판터 194대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에 배속시켜 전차 수가 350대에 이르는 거대한 기갑사단을 만들었다. 한편 파울 하우서의 제2SS기갑군단에는 제8항공군단의 지원 출격을 거대하게 할당해 균형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작전이 시작되자 테스트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급하게 투입된 판터 184대 중 160대에 설계 결함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였고, 이것이 호트의 극단적인 배치와 공격 계획에 더해 좁은 기동로에 지나치게 많은 전차를 투입한 제48기갑군단에게 있어서 최악의 시너지 효과를 초래했는데, 이는 결국 판터의 배치를 기다리느라 지연된 기간 동안 강화된 소련군의 방어에 의해 작전 목표 달성에 크게 실패하는 결과를 낳으며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돌출부 남쪽 공세를 삐걱이게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호트는 전술적 예비대를 두지 않는 리스크가 큰 도박수를 두었는데 공세의 핵심을 맡았던 제48기갑군단의 실패로 부정적인 연쇄 효과가 발생하며 자충수가 되어버리고 말았고 결과적으로 쿠르스크 남부에서의 진격이 실패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제2SS기갑군단은 대진격에 성공했지만, 결국 제4기갑군은 히틀러의 결정에 의해 쿠르스크 전투에서 물러나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