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만춘(梁萬春, 楊萬春)은 고구려 말 안시성(安市城) 전투에서 당태종이 직접 이끄는 50만 병력의 당나라 군대를 막아낸 고구려 안시성주(安市城主)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안시성주가 활을 쏘아 당태종의 눈을 맞혔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조선 중기 이후 또는 고려말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근거 없는 주장들이다.

양만춘이란 이름의 유래

안시성 전투를 기록한 삼국사기에는 당태종의 군대를 물리친 안시성주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 사서에도 양만춘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1]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당태종의 일을 다룬 명(明) 나라 때 웅대목(熊大木, 1506~1578)이 지은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 제83절 ~ 제87절에 처음 등장한다.[2][3]

李世勣兵進安市城 薛仁貴智取黃龍坡:卻說守安市城者,卻是高麗國左、右親衛軍官鎮守,各分絕奴、灌奴等部。絕奴部主帥梁萬春、鄒定國、李佐升,灌奴部主帥歐飛、暨武、張猴孫,共六員猛將,虎踞於安市城中。
― 《唐書志傳通俗演義》 第83節

이 소설 속의 이름이 명나라 사신들에 의해 조선에 전해져 몇몇 사람들이 사실인 것처럼 적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다.

안시성주의 이름 양만춘이 처음 등장하는 국내 기록은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월정만필(月汀漫筆)이다.[4][5][6]

〈46〉 안시성주(安市城主)는 당 태종(唐太宗)의 정예병과 맞서 결국 외로운 성을 지켰으니 그 공이 위대하다. 하지만 성명이 전하지 않으니 우리나라에 서적이 드물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 때는 역사서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우리나라에 온 중국의 장관(將官) 중에 오종도(吳宗道)라는 이가 내게 말하기를,
“안시성주의 성명은 양만춘(梁萬春)이다. 당 태종의 《동정기(東征記)》에서 보았다.”

하였다. 얼마 전에 감사 이시발(李時發)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예전에 《당서연의(唐書衍義)》를 보았는데 안시성주는 과연 양만춘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있었으니, 안시성을 지킨 장수는 두 사람이다.”
하였다.
― 《월정집(月汀集)》 별집 제4권 / 만록(漫錄) : 한국고전번역원
안시성주는 홀로 외딴 성을 지켜 천하에 명성을 떨쳤는데, 고구려의 역사서에서는 도리어 이름이 일실되었다. 문헌에서 징험할 수 없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의 소설에서는 양만춘(梁萬春)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의 성명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천고에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중국 사람에게 들으니, 안시성은 해주(海州)와 개주(蓋州)의 경계에 있는데, 의주성처럼 돌을 쌓아 만든 고구려의 성과 똑같다고 하니, 그 말이 믿을 만하다.
― 《월정집(月汀集)》 제5권 / 서(序) : 연경으로 가는 조 첨추 존성 를 전송하는 서문〔奉送趙僉樞 存性 如京序〕


안시성주(安市城主)는 조그마한 외로운 성으로 천자의 군대를 막아냈으니, 세상에 드문 책략가일 뿐만 아니라, 성에 올라가 절하고 하직하는데 말이 조용하여 예의의 바름을 얻었으니, 진실로 도(道)를 아는 군자이다. 아깝게도 역사에서 그의 이름을 잃었는데, 명나라 때에 이르러 《당서연의(唐書衍義)》에 그의 이름을 드러내어 양만춘(梁萬春)이라고 하였다. 어떤 책에서 찾아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시성의 공적이 책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진실로 그의 이름이 잃어지지 않고 전하였더라면 《통감강목(通鑑綱目)》과 《동국사기(東國史記)》에 응당 모두 유실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수백 년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연의(衍義)》에 나오겠는가. 거의 믿을 수 없다.

안시성주가 화살로 당태종의 눈을 맞혔나?

안시성주가 활을 쏘아 당태종의 눈을 맞혔다는 주장도 고려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글에 처음 나오는 말로 역사적 사실로 볼 근거는 없다.[7][8][9] 목은 이색은 당시로부터 700여년이나 지난 후의 사람이므로 이런 말이 구전으로 전해올 수 있는 시대의 인물도 아니다.

양만춘 이름이 사실로 조작되는 과정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