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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평가는 되게 박해 졌다. 말년에는 총애하던 권신 화선(황제에 동성 연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에게 통치 대부분을 일임했고, 화선은 엄청난 부정축재를 했다. 건륭제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옹정제 때 관리의 대한 부정을 빡세개 잡는 기강이나 국가재정면에서 건륭제 때는 다시 느슨해졌고, 관리들은 부정이 많았고 대외원정이나 강남에 황제가 놀러 다니면서 국가재정면에서 문란해졌다.  
최근에 평가는 되게 박해 졌다.겉으로 보이는 성과 등은 화려해 보이나, 청나라가 속으로 부터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게 이때라는 평가도 있다. 
 
말년에는 총애하던 권신 화선(당대에 황제(건륭제)의 동성 연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에게 통치 대부분을 일임했고, 화선은 엄청난 부정축재를 했다. 건륭제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옹정제 때 관리의 대한 부정을 빡세개 잡는 기강이나 국가재정면에서 건륭제 때는 다시 느슨해졌고, 관리들은 부정이 많았고 대외원정이나 강남에 황제가 놀러 다니면서 국가재정면에서 문란해졌다.  


건륭제 때 영국이 통상을 요구하고 일부 영토를 할양하기를 요구(이때도 이미 영국은 차와 도자기 등으로 대청 무역적자가 심각했다. 이후에도 한번 통상을 요구했지만 거부 당했고 청나라의 문을 열려면 무력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아편전쟁이 터진다.)
건륭제 때 영국이 통상을 요구하고 일부 영토를 할양하기를 요구(이때도 이미 영국은 차와 도자기 등으로 대청 무역적자가 심각했다. 이후에도 한번 통상을 요구했지만 거부 당했고 청나라의 문을 열려면 무력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아편전쟁이 터진다.)

2024년 6월 27일 (목) 17:19 판

乾隆帝

  • (1711년 9월 25일 ~ 1799년 2월 7일)
  • (강희(康熙) 50년 음력 8월 13일 ~ 가경(嘉慶) 4년 음력 1월 3일)


개요

건륭제는 청 제국의 제6대 황제이다. 청 제국의 명나라 전복 이후 네번째의 황제이기도 하다.

강건성세의 세 황제(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중 하나이다. 할아버지 강희제도 그렇지만 건륭제도 대외원정을 많이 했고,

청나라의 영토를 최대 판도로 늘린 황제다.(명나라 때부터의 전통적인 중국 한족의 판도를 생각한다면 건륭제 때 서쪽 등으로 엄청나게 영토를 늘렸다. 지금 중공의 영토 상당수가 청나라 때 늘린 영토다. 물론 청나라가 지금 중공보다 컸다(청나라 때는 연해주, 외몽골, 투르크메니스탄 일부, 대만까지도 청나라의 영토였으니)

신장 위구르를 편입시킨 것도 건륭제다. 원래 여기는 준가르의 영역인데 준가르가 계속 청나라에 대항하자(강희제 때 부터 준가르는 청나라의 최대 골칫거리 외부세력이었다) 아예 제노사이드 조직적인 준가르 인종청소를 자행한다. 준가르는 건륭제 때 그에 의해 거의 멸족 당하고 그 이후 이 영역은 위구르 인들이 주류가 된다. 신장이라는 말이 새로 편입한 영토라는 말인데 건륭제 때 준가르를 완전히 복속 제노사이드 하면서 편입하면서 만든 말이다.


최근에 평가는 되게 박해 졌다.겉으로 보이는 성과 등은 화려해 보이나, 청나라가 속으로 부터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게 이때라는 평가도 있다.

말년에는 총애하던 권신 화선(당대에 황제(건륭제)의 동성 연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에게 통치 대부분을 일임했고, 화선은 엄청난 부정축재를 했다. 건륭제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옹정제 때 관리의 대한 부정을 빡세개 잡는 기강이나 국가재정면에서 건륭제 때는 다시 느슨해졌고, 관리들은 부정이 많았고 대외원정이나 강남에 황제가 놀러 다니면서 국가재정면에서 문란해졌다.

건륭제 때 영국이 통상을 요구하고 일부 영토를 할양하기를 요구(이때도 이미 영국은 차와 도자기 등으로 대청 무역적자가 심각했다. 이후에도 한번 통상을 요구했지만 거부 당했고 청나라의 문을 열려면 무력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아편전쟁이 터진다.)

했지만, 이를 거부했고 더 문을 걸어 잠갔다.

좀 특이한 건 보통 황제는 정실부인인 황후를 총애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건륭제는 황후를 매우 사랑했고 죽어서도 황후를 매우 그리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