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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 또는 『'''그로차르 요강'''』은 [[스탈린 지령문]] 이전 1945년 9월 10일자로 된 소련군 사령부 정치부원 그로차르가 발표했다는  문서로 여러 연구자들이 많이 언급해 왔다.<ref>[[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1981년</ref><ref name="kim"/><ref>김선호, [https://books.google.co.kr/books?id=RvfcDwAAQBAJ&pg=PA96&lpg=PA96&dq=%EA%B7%B8%EB%A1%9C%EC%B0%A8%EB%A5%B4+%EC%9A%94%EA%B0%95&source=bl&ots=riwXi9m8fD&sig=ACfU3U33FROm3zEl7GfPwvXzEO2s71iBvw&hl=ko&sa=X&ved=2ahUKEwjSgruK3pHyAhXPdd4KHRJdDFUQ6AEwEnoECBUQAw#v=onepage&q=%EA%B7%B8%EB%A1%9C%EC%B0%A8%EB%A5%B4%20%EC%9A%94%EA%B0%95&f=false 《조선인민군 :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출판부 2020년 03월 25일, pp.96~97</ref> 그러나 이 문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하여 북한의 소련군정에 제출한 것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으로 소련군정 문서가 아닌 것이 밝혀졌고, 그로차르라는 인물도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인민정부수립요강(人民政府樹立要綱)'''』 또는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 또는 『'''그로차르 요강'''』은 [[스탈린 지령문]] 이전 1945년 9월 14일자로 된 소련군 사령부 정치부원 그로차르가 발표했다는  문서로 여러 연구자들이 많이 언급해 왔다.<ref>[[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1981년</ref><ref name="kim"/><ref>김선호, [https://books.google.co.kr/books?id=RvfcDwAAQBAJ&pg=PA96&lpg=PA96&dq=%EA%B7%B8%EB%A1%9C%EC%B0%A8%EB%A5%B4+%EC%9A%94%EA%B0%95&source=bl&ots=riwXi9m8fD&sig=ACfU3U33FROm3zEl7GfPwvXzEO2s71iBvw&hl=ko&sa=X&ved=2ahUKEwjSgruK3pHyAhXPdd4KHRJdDFUQ6AEwEnoECBUQAw#v=onepage&q=%EA%B7%B8%EB%A1%9C%EC%B0%A8%EB%A5%B4%20%EC%9A%94%EA%B0%95&f=false 《조선인민군 :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출판부 2020년 03월 25일, pp.96~97</ref> 그러나 이 문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하여 북한의 [[소련군정]]에 제출한 것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으로 소련군정 문서가 아닌 것이 밝혀졌고, 그로차르라는 인물도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의 내용==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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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은 허위문서로 밝혀져==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은 허위문서로 밝혀져==
이 문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하여 북한의 소련군정에 제출한 것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문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하여 북한의 소련군정에 제출한 것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으로 밝혀졌다.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1030500153 <nowiki>[글로벌 In&Out]</nowiki> ‘그로차르 요강’의 폐기와 북한사의 재해석] 서울신문 2018-10-30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1030500153 <nowiki>[글로벌 In&Out]</nowiki> ‘그로차르 요강’의 폐기와 북한사의 재해석] 서울신문 2018-10-30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1031033009 <nowiki>[글로벌 In&Out]</nowiki> 허위 문서 ‘그로차르 요강’ 폐기와 북한사의 재해석 : 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서울신문 2018-10-30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1031033009 <nowiki>[글로벌 In&Out]</nowiki> 허위 문서 ‘그로차르 요강’ 폐기와 북한사의 재해석 : 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서울신문 2018-10-30 [지면 : 2018-10-31 33면]
{{인용문|일부 북한 연구자들은 소련의 북한 진주직후 대북한 정책을 소개할 때 1945년 9월 14일 ‘소련군 사령부 정치부원 그로차르’가 발표했다는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요강”이라는 문서를 많이 언급한다. 이 문서에는 소련군은 북한에서 노동자 농민정권수립, 즉 소비에트화를 원조하고 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고, 소련 정부는 한국 문제에 대하여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과의 논의를 진행하기도 전에 이미 정책 노선을 결정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 사실은 유명한 북한역사연구자인 [[브루스 커밍스]]가 1981년에 쓴 《한국전쟁의 기원》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한국의 연구에도 많이 사용되어 왔으며 특히 최근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크고 두꺼운 《북한의 역사 1》이라는 책에도 그대로 인용되었다.<ref name="kim">김학준,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62377 《북한의 역사 1 - 강대국권력정치 아래서의 한반도분할과 소련의 북한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06-10</ref>
{{인용문|일부 북한 연구자들은 소련의 북한 진주직후 대북한 정책을 소개할 때 1945년 9월 14일 ‘소련군 사령부 정치부원 그로차르’가 발표했다는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요강”이라는 문서를 많이 언급한다. 이 문서에는 소련군은 북한에서 노동자 농민정권수립, 즉 소비에트화를 원조하고 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고, 소련 정부는 한국 문제에 대하여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과의 논의를 진행하기도 전에 이미 정책 노선을 결정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 사실은 유명한 북한역사연구자인 [[브루스 커밍스]]가 1981년에 쓴 《한국전쟁의 기원》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한국의 연구에도 많이 사용되어 왔으며 특히 최근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크고 두꺼운 《북한의 역사 1》이라는 책에도 그대로 인용되었다.<ref name="kim">김학준,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62377 《북한의 역사 1 - 강대국권력정치 아래서의 한반도분할과 소련의 북한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06-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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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차르 요강을 인용한 사례==
==그로차르 요강을 인용한 사례==
* 전현수, [https://search.i815.or.kr/publication/report/list.do?titleSort=0&authorSort=0&yearSort=0&volumeSort=0&pageIndex=2&publicationYear=all&volume=9&searchCondition=title&searchKeyword=&pageUnit=10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대북한정책」, 『한국독립운동사연구』9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5. 6.
::  p. 354 :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을 인용했으나 작성자를 그로차르 아닌 그로치코라 하였다.


* 김광운, [https://ifes.kyungnam.ac.kr/documents/static/북조선실록-수록사료목록.pdf 《북조선 실록 - 연표와 사료》 1권 (1945년08월15일~12월31일)] p.68 (서울 : 경남대·북한대학원대학 Korea Data Project, 2018)
* [https://www.dailynk.com/%ED%8F%89%EC%96%91%ED%8F%AC%EC%BB%A4%EC%8A%A4-%EA%B3%BC%EA%B1%B0-%EB%B6%81%ED%95%9C%EC%9D%B4-%EC%8B%9C%ED%96%89%ED%96%88%EB%8D%98-%ED%86%A0%EC%A7%80%EA%B0%9C%ED%98%81%EA%B3%BC-%EA%B7%B8-%EC%97%B0/ <nowiki>[정교진  평양포커스]</nowiki> 과거 북한이 시행했던 토지개혁과 그 연결고리(1)] DailyNK  2020. 3. 20.
::9월 14일  쏘련군사령부, 「인민정부 수립요강」 발표
::{{인용문|이때, 소련 점령군이 토지개혁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다. <u>이것은 1945년 9월 14일, 소련군사령부 정치위원 크로챨의 <소련 점령군의 대북한 통치정책(인민정부 수립요강> 성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u> 크게 5가지의 통치정책이었다. 그 첫 번째가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수립 제안이었다. 두 번째에서 토지문제를 다루었는데, 토지문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인구수에 비례해서 토지를 재분배하고 토착지주의 토지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경작하고 있는 토지 이외에는 전부 몰수해야 한다고 했다.}}
 
* 김광운, [https://ifes.kyungnam.ac.kr/documents/static/북조선실록-수록사료목록.pdf 《북조선 실록 - 연표와 사료》 1권 (1945년08월15일~12월31일)] (서울 : 경남대·북한대학원대학 Korea Data Project, 2018)
:: p.68 : (1945년) 9월 14일  쏘련군사령부, 「인민정부 수립요강」 발표.
 
* 전현수, [https://search.i815.or.kr/publication/report/list.do?titleSort=0&authorSort=0&yearSort=0&volumeSort=0&pageIndex=2&publicationYear=all&volume=9&searchCondition=title&searchKeyword=&pageUnit=10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대북한정책」, 『한국독립운동사연구』 9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5. 6.
:: p. 354 :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을 인용했으나 작성자를 그로차르 아닌 그로치코라 하였다.
::{{인용문|1945년 9월 14일 소련군사령부 정치부원 그로치코가 발표한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요강」은 소련군의 정책방향을 최초로 밝힌 것이지만, 이 「요강」도 어디까지나 일반론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로치코는 ‘비일본적 각층 인민을 포함한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되 그 권력의 형태는 ‘노동자농민정권’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정권이 ‘친일적 악분자’를 소탕하고 ‘불순분자’를 숙청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조선인 지주 토지는 자경지 이외는 몰수하고, 일본인 토지는 전부 몰수하여 농민에게 재분배’하고 , ‘일본인 소유 공장은 노동자와 기술자가 관리’하나, ‘민족적 중소기업은 (인민)위원회의 감시하에 자유경영을 허용하는’ 경제정책을 수행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sup>54)</sup> 그로치코는 반제 반봉건의 방향에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발전을 일정 정도 억제하는 방향에서 한국사회의 진로를 전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요강」에는 ‘자주독립국가’ 건설과 관련하여 소련군이 자신의 점령지역인 북한에서 실천에 옮겨야 할 정책이 아직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br><br><small>54) 『혁명신문』, 1945년 10월 4일; 김기석편, 『북조선의 현상과 장래』, 조선정경연구사, 1947, pp.81∼92.</small>}}
 
* 이완범(李完範), [http://db.history.go.kr/id/kn_025_0050_0030_0010 북한 점령 소련군의 성격  > Ⅲ. ‘북조선 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역사  > 1. 소련군의 진주와 그 목적 : 진주 직후 포고와 정치공작]  國史館論叢 第25輯, 1991년 09월 30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인용문|9월 14일에 소련군 사령부가 발표한 〈인민정부수립요강〉이라는 문서에서만 보아도 소련 군이 노동자 농민정권수립을 원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sup>註 043</sup> 노동자 농민정권이 바로 친소정권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경향은 다분히 있었던 것이다.<br><br><small>註) 043 : 〈혁명신문〉1945년 10월 4일; 金基石, 《북조선의 현상과 장래》, (조선정경연구사, 1947) pp. 81∼82; 연세대 대학원 북한현대사 연구회 편, 《북한현대사》 I (1989), pp. 306∼307.</small>}}
 
* 김성호(金聖昊), [http://db.history.go.kr/id/kn_025_0060_0020_0020 農地改革硏究 > Ⅱ. 南北分斷과 土地改革 > 2. 北側土地改革과 分斷固着] 國史館論叢 第25輯, 1991년 09월 30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인용문|이미 언급했듯 소련측도 ‘정치적 중립’을 표방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인 것이었을 뿐 그 이면에서는 전연 다른 노선을 추진했었다. 즉 스탈린의 중립지령 직전에 이미 소련군사령부 정치지도원 그로차프는 〈人民政府樹立要綱〉(1945.9.4)을 제시했다. 이 제 1항에서 ‘인민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설정한 다음 제 2항에서 “토지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므로 인구수에 비례하여 토지를 재분배한다”(民戰事務局, 1946, p.349<sup>註*)</sup>)고 규정했다. 이것은 즉각 북한 5도의 정치적 향배를 주도했던 〈朝鮮共產黨平安南道地區擴大委員會綱領〉(1945.10.6)으로 채택되었다. 이 이후 이 정치 스케줄에 따라 소련군은 반탁파(반토지개혁파)를<sup>註 004</sup> 제거하고, 김일성 주도하의 臨時北朝鮮人民委員會(1946.2.9)를 출범시키어 제 1차 미 소공위가 개최될 예정이던 3월 5일을 기해, 여기에는 참석하지 않고 북한 전역에 걸치어 토지개혁을 단행했다.<br><br><small>註) 004 : 1945년 9월 12 일자로 개최된 人民政治委員會의 정강협의에서 공산당이 人共樹立과 土地改革을 제의한데 대해 曺勉植을 위시한 우익진영(反託派)은 대대적으로 반발하면서 3·7制를 주장했다 (和田春樹, 1983, p. 259).<br>註*) 民戰事務局(編), 《朝鮮解放年報》 (文友印書館, 1946).</small><ref>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http://www.adanmungo.org/m/view.php?idx=903 조선해방연보(朝鮮解放年報)], (京城,  文友印書館, 1946년) : 현담문고 소장</ref><ref>[https://www.yetnal.co.kr/shop/item.php?it_id=1342517826 民戰事務局(編), 《朝鮮解放年報》] (文友印書館, 1946) : 옛날물건 판매.</ref>}}
 
* 정성임, [https://nk.ac.kr/post-book/%ed%98%84%eb%8c%80%eb%b6%81%ed%95%9c%ec%97%b0%ea%b5%ac-2%ea%b6%8c-2%ed%98%b8-1999/ 《소련의 대북한 전략적 인식의 변화와 점령 정책:1945~1948년 점령기간을 중심으로》], 『현대북한연구』 2권 2호 1999,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pp.303~336
:: p.306 : 이는 소련군 정치요원. 그로차르의 인민정부수립요강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그는 미래 조선 정부로 4개국 보장하의 '노동자·농민 정권'을 제시하였는데, 그 4개국은 점령당사국 외에 .영국, 중국 등 전시회담의 구성원이었다.
 
* [https://unibook.unikorea.go.kr/material/view?mGubun=1&uid=CAT-00000000000011132 연세대 대학원 북한현대사 연구회 편, 《북한현대사》 I (서울: 공동체, 1989.)], pp. 306∼307.
 
* 민주주의민족전선,  『해방조선 I  :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 투쟁사』 (서울 : 과학사상, 1988) pp.118~119.
 
*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KMO000045298 김기석, 《북조선의 현상과 장래》, 조선정경연구사, 1947], pp.81~82 〈인민정부 수립요강〉
:: 《한국 현대사 자료총서》 11권 p.632.
 
* 〈혁명신문〉 1945년 10월 4일 : (해방직후 남한에서 간행되던 좌익지)


==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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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4일 (금) 13:16 기준 최신판

인민정부수립요강(人民政府樹立要綱)』 또는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 또는 『그로차르 요강』은 스탈린 지령문 이전 1945년 9월 14일자로 된 소련군 사령부 정치부원 그로차르가 발표했다는 문서로 여러 연구자들이 많이 언급해 왔다.[1][2][3] 그러나 이 문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하여 북한의 소련군정에 제출한 것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으로 소련군정 문서가 아닌 것이 밝혀졌고, 그로차르라는 인물도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의 내용

문제의 문서는 김국후의 『평양의 소련군정』에 실려 있으며, 내용은 아래와 같다.[4]

아울러 각 지역 위수사령부에서는 사회주의 정신에 따라 일제시대의 지도자·유지·관리는 일절 상대하지 않고, 탄압받았던 반제 투쟁의 혁명분자와 착취 대상이었던 노동자·농민과 같은 일반 근로대중을 상대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특히 1945년 9월 10일 평양주둔 소련군정 사령부가 각 지역 위수사령부에 정치지도원 그로차르 중좌의 이름으로 지령한 '독립 조선의 인민정부 수립 요강' 6개 항에서 잘 드러난다.
  1. 비(非)일본적인 각층 인민을 중심으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결성해야 한다. 소비에트연방은 끝까지 노동자·농민정권 수립을 미국·영국·중국에 제안할 것이다.
  2. 토지문제는 가장 중요하므로 인구수에 비례해 토지를 재분배해야 하며, 토착 지주에 대해서는 자기가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몰수한다. 몰수한 일본인 소유 토지는 정부가 농민에게 재분배한다.
  3. 일본인 소유 공장은 일본적 요소를 없애고 공장 노동자와 기술자가 이를 관리하도록 한다. 기술 부문에서 일본인이 필요할 경우에는 과도적으로 사역하며 시급히 조선인 기술자를 양성한다.
  4. 친일분자는 철저히 소탕하고 각 분야의 불순분자를 엄정하게 숙청할 필요가 있다.
  5. 민영 기술기관은 허락하나 특별한 감시가 필요하다.
  6. 모든 문화시설, 위생설비, 교육기관은 국영으로 이관하며, 노동자 · 농민에게 개방하라.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은 허위문서로 밝혀져

이 문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하여 북한의 소련군정에 제출한 것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으로 밝혀졌다.

[글로벌 In&Out] 허위 문서 ‘그로차르 요강’ 폐기와 북한사의 재해석 : 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서울신문 2018-10-30 [지면 : 2018-10-31 33면]
일부 북한 연구자들은 소련의 북한 진주직후 대북한 정책을 소개할 때 1945년 9월 14일 ‘소련군 사령부 정치부원 그로차르’가 발표했다는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요강”이라는 문서를 많이 언급한다. 이 문서에는 소련군은 북한에서 노동자 농민정권수립, 즉 소비에트화를 원조하고 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고, 소련 정부는 한국 문제에 대하여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과의 논의를 진행하기도 전에 이미 정책 노선을 결정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 사실은 유명한 북한역사연구자인 브루스 커밍스가 1981년에 쓴 《한국전쟁의 기원》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한국의 연구에도 많이 사용되어 왔으며 특히 최근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크고 두꺼운 《북한의 역사 1》이라는 책에도 그대로 인용되었다.[2]

그러나 이 문서가 허위임을 드러내는 점이 2가지 사실이 있다. 일단, ‘그로차르’ (일부 연구에는 ‘그로치코’라고도 함)라는 소련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련측 사료이다. 1990년대 소련 문서보관소의 개방에 따라 북한 주둔 소련군의 활동을 밝히는 자료가 대량으로 발견되어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한 국내 단체에 의해 수집·공개되었으며, 그 중 ‘그로차르’가 발표한 ‘요강’의 출처를 밝히는 소련군 비밀 문서들도 발견되었는데, 새로 발견한 자료를 가지고 이 사건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이 문서는 이영(李英, 1889~1960)이 방북할 때 제출한 자료 중에 소련군에 의해 처음 발견되고 러시아어로 번역되면서 ‘그로차르 요강’으로 둔갑했다. 이영은 결국 트로츠키주의자이고 분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박헌영과의 노선투쟁에서 졌으나 오래동안 북한 건국사 연구에 악영향을 미쳐온 가짜 문서인 ‘그로차르 요강’을 작성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그로차르 요강을 인용한 사례

이때, 소련 점령군이 토지개혁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다. 이것은 1945년 9월 14일, 소련군사령부 정치위원 크로챨의 <소련 점령군의 대북한 통치정책(인민정부 수립요강> 성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크게 5가지의 통치정책이었다. 그 첫 번째가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수립 제안이었다. 두 번째에서 토지문제를 다루었는데, 토지문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인구수에 비례해서 토지를 재분배하고 토착지주의 토지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경작하고 있는 토지 이외에는 전부 몰수해야 한다고 했다.
p.68 : (1945년) 9월 14일 쏘련군사령부, 「인민정부 수립요강」 발표.
p. 354 :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을 인용했으나 작성자를 그로차르 아닌 그로치코라 하였다.
1945년 9월 14일 소련군사령부 정치부원 그로치코가 발표한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요강」은 소련군의 정책방향을 최초로 밝힌 것이지만, 이 「요강」도 어디까지나 일반론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로치코는 ‘비일본적 각층 인민을 포함한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되 그 권력의 형태는 ‘노동자농민정권’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정권이 ‘친일적 악분자’를 소탕하고 ‘불순분자’를 숙청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조선인 지주 토지는 자경지 이외는 몰수하고, 일본인 토지는 전부 몰수하여 농민에게 재분배’하고 , ‘일본인 소유 공장은 노동자와 기술자가 관리’하나, ‘민족적 중소기업은 (인민)위원회의 감시하에 자유경영을 허용하는’ 경제정책을 수행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54) 그로치코는 반제 반봉건의 방향에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발전을 일정 정도 억제하는 방향에서 한국사회의 진로를 전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요강」에는 ‘자주독립국가’ 건설과 관련하여 소련군이 자신의 점령지역인 북한에서 실천에 옮겨야 할 정책이 아직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54) 『혁명신문』, 1945년 10월 4일; 김기석편, 『북조선의 현상과 장래』, 조선정경연구사, 1947, pp.81∼92.
9월 14일에 소련군 사령부가 발표한 〈인민정부수립요강〉이라는 문서에서만 보아도 소련 군이 노동자 농민정권수립을 원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註 043 노동자 농민정권이 바로 친소정권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경향은 다분히 있었던 것이다.

註) 043 : 〈혁명신문〉1945년 10월 4일; 金基石, 《북조선의 현상과 장래》, (조선정경연구사, 1947) pp. 81∼82; 연세대 대학원 북한현대사 연구회 편, 《북한현대사》 I (1989), pp. 306∼307.
이미 언급했듯 소련측도 ‘정치적 중립’을 표방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인 것이었을 뿐 그 이면에서는 전연 다른 노선을 추진했었다. 즉 스탈린의 중립지령 직전에 이미 소련군사령부 정치지도원 그로차프는 〈人民政府樹立要綱〉(1945.9.4)을 제시했다. 이 제 1항에서 ‘인민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설정한 다음 제 2항에서 “토지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므로 인구수에 비례하여 토지를 재분배한다”(民戰事務局, 1946, p.349註*))고 규정했다. 이것은 즉각 북한 5도의 정치적 향배를 주도했던 〈朝鮮共產黨平安南道地區擴大委員會綱領〉(1945.10.6)으로 채택되었다. 이 이후 이 정치 스케줄에 따라 소련군은 반탁파(반토지개혁파)를註 004 제거하고, 김일성 주도하의 臨時北朝鮮人民委員會(1946.2.9)를 출범시키어 제 1차 미 소공위가 개최될 예정이던 3월 5일을 기해, 여기에는 참석하지 않고 북한 전역에 걸치어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註) 004 : 1945년 9월 12 일자로 개최된 人民政治委員會의 정강협의에서 공산당이 人共樹立과 土地改革을 제의한데 대해 曺勉植을 위시한 우익진영(反託派)은 대대적으로 반발하면서 3·7制를 주장했다 (和田春樹, 1983, p. 259).
註*) 民戰事務局(編), 《朝鮮解放年報》 (文友印書館, 1946).
[5][6]
p.306 : 이는 소련군 정치요원. 그로차르의 인민정부수립요강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그는 미래 조선 정부로 4개국 보장하의 '노동자·농민 정권'을 제시하였는데, 그 4개국은 점령당사국 외에 .영국, 중국 등 전시회담의 구성원이었다.
  • 민주주의민족전선, 『해방조선 I  :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 투쟁사』 (서울 : 과학사상, 1988) pp.118~119.
《한국 현대사 자료총서》 11권 p.632.
  • 〈혁명신문〉 1945년 10월 4일 : (해방직후 남한에서 간행되던 좌익지)

함께 보기

각주

  1.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1981년
  2. 2.0 2.1 김학준, 《북한의 역사 1 - 강대국권력정치 아래서의 한반도분할과 소련의 북한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06-10
  3. 김선호, 《조선인민군 :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출판부 2020년 03월 25일, pp.96~97
  4.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년), pp.136~137.
  5.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조선해방연보(朝鮮解放年報), (京城, 文友印書館, 1946년) : 현담문고 소장
  6. 民戰事務局(編), 《朝鮮解放年報》 (文友印書館, 1946) : 옛날물건 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