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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李燦, 1910년 1월 15일 ~ 1974년 1월 14일)은 일제 시기와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한 시인이다. 몇 편의 희곡도 썼다. 개명전의 이름은 이무종(李務鍾)이고, 일제시기 아오바 가오리(靑葉薰)라는 창씨명도 썼다. 1946년 북한에서 국가처럼 불리는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D%BC%EC%84%B1_%EC%9E%A5%EA%B5%B0%EC%9D%98_%EB%85%B8%EB%9E%98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했다. 그는 해방 전에는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 작가로, 해방 후에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어용 문인으로 굴절된 삶을 살았다. | '''이찬'''(李燦, 1910년 1월 15일 ~ 1974년 1월 14일)은 일제 시기와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한 시인이다. 몇 편의 희곡도 썼다. 개명전의 이름은 이무종(李務鍾)이고, 일제시기 아오바 가오리(靑葉薰)라는 창씨명도 썼다. 1946년 북한에서 국가처럼 가장 중요하게 불리는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D%BC%EC%84%B1_%EC%9E%A5%EA%B5%B0%EC%9D%98_%EB%85%B8%EB%9E%98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했다. 그는 해방 전에는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 작가로, 해방 후에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어용 문인으로 굴절된 삶을 살았다. | ||
[[파일:이찬 송출진학도 1944-01-19-매일신보.jpg|600픽셀|섬네일|오른쪽|이찬|이찬(李燦, 1910 ~ 1974)이 1944-01-19 매일신보에 실은 친일시 〈송출진학도(送∙出陣學徒)〉]] | [[파일:이찬 송출진학도 1944-01-19-매일신보.jpg|600픽셀|섬네일|오른쪽|이찬|이찬(李燦, 1910 ~ 1974)이 1944-01-19 매일신보에 실은 친일시 〈송출진학도(送∙出陣學徒)〉]]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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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162 이찬〈4〉(李燦)]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162 이찬〈4〉(李燦)]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0%AC_(%EC%8B%9C%EC%9D%B8) 이찬 (시인)] 위키백과 |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0%AC_(%EC%8B%9C%EC%9D%B8) 이찬 (시인)] 위키백과 | ||
* [http://db.history.go.kr/id/ia_4326_3360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이찬(李燦)]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1933년 1월 10일 동대문서 촬영 사진 | |||
* [http://db.history.go.kr/id/ia_4327_3360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이찬(李燦)]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1933년 1월 15일 서대문형무소 촬영 사진; 1934년 9월 5일 만기 석방 | |||
==친일 시문== | ==친일 시문== | ||
이찬이 지은 친일 시문으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알려져 있다.<ref>[http://db.history.go.kr/id/pj_004_0010_0060_0010 親日派群像 > 豫想登場人物 親日派 群像(上) > 二. 自進協力者와 威脅에 依한 被動協力者⑤ > 3. 言論界, 文人界, 演藝界 關係 人物② > 李燦(시인)]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f> | 이찬이 지은 친일 시문으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알려져 있다.<ref>[http://db.history.go.kr/id/pj_004_0010_0060_0010 親日派群像 > 豫想登場人物 親日派 群像(上) > 二. 自進協力者와 威脅에 依한 被動協力者⑤ > 3. 言論界, 文人界, 演藝界 關係 人物② > 李燦(시인)]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f> | ||
[[파일:매일신보 李燦 餞詞.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매일신보 1945년 2월 14일과 15일자에 나뉘어 실린 이찬|이찬(李燦, 1910 ~ 1974)의 「전사(餞詞) - 징용(徵用)된 벗에게」]] | [[파일:매일신보 李燦 餞詞.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매일신보 1945년 2월 14일과 15일자에 나뉘어 실린 이찬|이찬(李燦, 1910 ~ 1974)의 「전사(餞詞) - 징용(徵用)된 벗에게」]] | ||
* [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 | * [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5203911 이찬(李燦), 「송출진학도(送∙出陣學徒)」] 매일신보[每日申報] 1944년 01월 19일 2면 10단 | ||
* 이찬(李燦), 「영예의 전범을」(원문 일어), 『동양지광(東洋之光)』 昭和19(1944)년 3월호 | * 이찬(李燦), 「영예의 전범을」(원문 일어),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48796622&viewType=AH2 『동양지광(東洋之光)』 昭和19(1944)년 3월호] | ||
* [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 | * [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5230790 이찬(李燦), 「전사(餞詞) <nowiki>[상]</nowiki> - 징용(徵用)된 벗에게」] 매일신보 1945년 02월 14일 2면 10단 | ||
* [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 | * [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5230836 이찬(李燦), 「전사(餞詞) <nowiki>[하]</nowiki> - 징용(徵用)된 벗에게」] 매일신보 1945년 02월 15일 2면 10단 | ||
{{인용문|「전사(餞詞) - 징용(徵用)된 벗에게」 요지(要旨)<br> | {{인용문|「전사(餞詞) - 징용(徵用)된 벗에게」 요지(要旨)<br> | ||
우리가 현재 활동하고 봉공한다는 사실은 정히 떳떳한 일임에 틀림업네. 문자 그대로 전고(前古) 미증유(未曾有)의 인류 새 세기, 방가(邦家)의 새 역사가 실로 신비적인 속도로 창조되면서 있는 위대한...... 우리가 이를 체험하고 우리 또한 나아가 적던 크던 그 일역(一役)을 맡아 할 수 있다는 것은...... 국민되었던 보람이 이에 더할 자가 있지 않을 것이 아닌가.<br> | 우리가 현재 활동하고 봉공한다는 사실은 정히 떳떳한 일임에 틀림업네. 문자 그대로 전고(前古) 미증유(未曾有)의 인류 새 세기, 방가(邦家)의 새 역사가 실로 신비적인 속도로 창조되면서 있는 위대한...... 우리가 이를 체험하고 우리 또한 나아가 적던 크던 그 일역(一役)을 맡아 할 수 있다는 것은...... 국민되었던 보람이 이에 더할 자가 있지 않을 것이 아닌가.<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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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 ==해방 후== | ||
[[파일:김일성 장군의 노래.jpg|270픽셀|섬네일|오른쪽|1946년 이찬(李燦) 작사, 김원균(金元均) 작곡의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D%BC%EC%84%B1_%EC%9E%A5%EA%B5%B0%EC%9D%98_%EB%85%B8%EB%9E%98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노래》]<ref>[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CNTS-00056891396 『우리의 太陽 : 김일성장군 찬양특집(金日成 將軍 讚揚特輯)』], ([平壤] : 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 국립중앙도서관 : p.16</ref>. 북한에서 | [[파일:김일성 장군의 노래.jpg|270픽셀|섬네일|오른쪽|1946년 이찬(李燦) 작사, 김원균(金元均) 작곡의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D%BC%EC%84%B1_%EC%9E%A5%EA%B5%B0%EC%9D%98_%EB%85%B8%EB%9E%98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노래》]<ref>[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CNTS-00056891396 『우리의 太陽 : 김일성장군 찬양특집(金日成 將軍 讚揚特輯)』], ([平壤] : 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 국립중앙도서관 : p.16</ref>. 북한에서 가장 중요하게 불리는 노래이다. 애국가는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 ||
*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kwd=#viewKey=CNTS-00053791462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 국립중앙도서관 | *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kwd=#viewKey=CNTS-00053791462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 국립중앙도서관 | ||
:p.75 : 이찬(李燦), 《藝術領域의 審査問題와 그뒤에오는 것》 | :p.75 : 이찬(李燦), 《藝術領域의 審査問題와 그뒤에오는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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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kwd=#viewKey=CNTS-00056891670 巨流 (8.15해방 1주년 기념시집)] 8.15 해방 1주년 기념 중앙준비위원회, 1946.08.15 | *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kwd=#viewKey=CNTS-00056891670 巨流 (8.15해방 1주년 기념시집)] 8.15 해방 1주년 기념 중앙준비위원회, 1946.08.15 | ||
: 李燦篇 = p.13 / 대지의 찬가 = p.15 / 승리의 기록 = p.19 / 비력(悲歷)의 종언 = p.21 | : 李燦篇 = p.13 / 대지의 찬가 = p.15 / 승리의 기록 = p.19 / 비력(悲歷)의 종언 = p.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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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8일 (목) 14:49 기준 최신판
이찬(李燦, 1910년 1월 15일 ~ 1974년 1월 14일)은 일제 시기와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한 시인이다. 몇 편의 희곡도 썼다. 개명전의 이름은 이무종(李務鍾)이고, 일제시기 아오바 가오리(靑葉薰)라는 창씨명도 썼다. 1946년 북한에서 국가처럼 가장 중요하게 불리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했다. 그는 해방 전에는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 작가로, 해방 후에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어용 문인으로 굴절된 삶을 살았다.
생애
- 이찬〈4〉(李燦)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찬 (시인) 위키백과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이찬(李燦)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1933년 1월 10일 동대문서 촬영 사진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이찬(李燦)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1933년 1월 15일 서대문형무소 촬영 사진; 1934년 9월 5일 만기 석방
친일 시문
이찬이 지은 친일 시문으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알려져 있다.[1]
- 이찬(李燦), 「송출진학도(送∙出陣學徒)」 매일신보[每日申報] 1944년 01월 19일 2면 10단
- 이찬(李燦), 「영예의 전범을」(원문 일어), 『동양지광(東洋之光)』 昭和19(1944)년 3월호
- 이찬(李燦), 「전사(餞詞) [상] - 징용(徵用)된 벗에게」 매일신보 1945년 02월 14일 2면 10단
- 이찬(李燦), 「전사(餞詞) [하] - 징용(徵用)된 벗에게」 매일신보 1945년 02월 15일 2면 10단
우리가 현재 활동하고 봉공한다는 사실은 정히 떳떳한 일임에 틀림업네. 문자 그대로 전고(前古) 미증유(未曾有)의 인류 새 세기, 방가(邦家)의 새 역사가 실로 신비적인 속도로 창조되면서 있는 위대한...... 우리가 이를 체험하고 우리 또한 나아가 적던 크던 그 일역(一役)을 맡아 할 수 있다는 것은...... 국민되었던 보람이 이에 더할 자가 있지 않을 것이 아닌가.
친일 희곡
이찬(李燦)이 일제시기에 쓴 희곡으로 아래 4편이 알려져 있다.[3]
- <세월>(『조광』, 1943.5~6)
- <보내는 사람들>(『신시대』, 1944.8)
- <이기는 마을>(『춘추』, 1944.10)
- <사랑의 전선을 넘어서[愛線を越 へて]> 『조광』 5․6월 합병호 (1945년 6월 발간) : 창씨명 아오바 가오리[靑葉薰]로 발표
해방 후
-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 국립중앙도서관
- p.75 : 이찬(李燦), 《藝術領域의 審査問題와 그뒤에오는 것》
- p.114 : 이찬(李燦), 《승리의 기록(勝利의 記錄)》
- 巨流 (8.15해방 1주년 기념시집) 8.15 해방 1주년 기념 중앙준비위원회, 1946.08.15
- 李燦篇 = p.13 / 대지의 찬가 = p.15 / 승리의 기록 = p.19 / 비력(悲歷)의 종언 = p.21
- 『우리의 太陽 : 김일성장군 찬양특집(金日成 將軍 讚揚特輯)』, ([平壤] : 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 국립중앙도서관
- p.16 : 이찬(李燦) 작사,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노래》
- pp.20~21 : 이찬(李燦), 《찬 김일성 장군(讚金日成將軍)》
- 이찬 시집(李燦 詩集) 『승리의 기록(勝利의 記錄)』 1947년 9월5일 평양 문화전선사(文化戰線社) - 국립중앙도서관
장군이 오시는 것은 아아무도 몰렀으나
장군이 오신 것은 누구나 알었다.
장군은 가릴 수 없는 우리의 빛!
장군은 감출 수 없은 우리들의 태양!
....
누구나 장군은 젊다한다
그렇다 장군은 젊다 (우리의 장군이 늙어서야 되랴!)
만고풍상 혈전혈투의 과거가 그렇고
오매에도 못잊든 개선조국의 오늘을 더욱 -
.....
장군은 바쁘다 바뻐야 한다
(긔억하자!) 장군은 우리만의 장군이 아니요
장군은 남조선도 빛일 남조선도 빛어야할
아아 삼천리 완강토의 위대한 태양!
참고 자료
- 네 개의 이름을 가진 시인 이찬 : 김응교 교수 '이찬과 한국 근대문학' 출간 연합뉴스 2007/03/14
각주
- ↑ 親日派群像 > 豫想登場人物 親日派 群像(上) > 二. 自進協力者와 威脅에 依한 被動協力者⑤ > 3. 言論界, 文人界, 演藝界 關係 人物② > 李燦(시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귀축(鬼畜) 미영(米英) : 미국과 영국을 귀축(鬼畜)이라 칭한 것임.
- ↑ 윤진현, 일제 말 조선인을 위한 차선의 모색과 그 한계 - 해방 전 이찬의 시와 희곡 민족문학사연구 2016, vol., no.60, pp. 359-404 (46 pages)
- ↑ 『우리의 太陽 : 김일성장군 찬양특집(金日成 將軍 讚揚特輯)』, ([平壤] : 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 국립중앙도서관 : p.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