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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만국경 주민의 고뇌 지금은 해소 / 공산비 김일성의 죽음'''<br> | '''선만국경 주민의 고뇌 지금은 해소 / 공산비 김일성의 죽음'''<br> | ||
'''조선군 당국담'''<br> | '''조선군 당국담'''<br> | ||
[17일 조선군 당국담] 김일성비는 예를 들어 압록강 대안 장백, 무송현에 반거하여 콩민테른 사주 아래 소재 주민들에 대한 공산주의를 | [17일 조선군 당국담] 김일성비는 예를 들어 압록강 대안 장백, 무송현에 반거하여 콩민테른 사주 아래 소재 주민들에 대한 공산주의를 고취하고 반만항일적 기운의 양성에 힘쓰거나 살육횡탈의 한계를 다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때로는 일만군에 대해 불령을 책하므로 만주국의 치안을 현저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지난 13일 만군 토비대는 김일성의 소재를 확인하고, 이를 공격하여 격전 5시간 만에 마침내 그 수령을 올려 개가를 올리기도 했으며, 과연 오래도록 그들의 질곡하에 고심하여 주민들의 기쁨은 물론, 선만국경 치안에 큰 관심을 가진 조선군 당국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곳으로 만주 토비대의 고심과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br><br> | ||
'''父子二代の 不逞 / 普天堡 襲擊の 張本'''<br><br> | '''父子二代の 不逞 / 普天堡 襲擊の 張本'''<br><br> |
2022년 11월 16일 (수) 17:14 판
파일의 설명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는 경성일보(京城日報) 1937년 11월 18일자 조간 7면 기사.
- 鮮滿國境住民の 苦惱 今ゃ 解消 / 共産匪 金日成の 死 / 朝鮮軍當局談 / 父子二代の 不逞 / 普天堡 襲擊の 張本
모스크바 공산대학(モスコー共産大學)을 졸업했다고 함.
朝鮮軍當局談
[十七日朝鮮軍當局談] 金日成匪は豫て鴨綠江對岸長白、撫松縣に蟠居しコンミンテルンの使嗾の下に所在の住民に對し共産主義を皷吹し反滿抗日的機運の釀成に努め 或は殺戮掠奪の限りを盡して無睾の民を苦しめ、時としては日滿軍に對して不逞を策するので滿洲國の治安を著しく脅威しありしが、 情報によれば去る十三日 滿軍討匪隊は金日成の所在を確め、之を攻撃し激戰五時間の後遂にその首級をあげ凱歌を奏したり、果して然 らば久しく彼らの桎梏下に苦惱せし住民の喜びは元より、鮮滿國境の治安に大なる關心を有する 朝鮮軍當局の喜びに堪へざる所にして滿洲討匪隊の苦心と努力に對し敬意を表する次第である。
- 皷 : 鼓와 같은 글자. 皷吹는 鼓吹와 같음.
선만국경 주민의 고뇌 지금은 해소 / 공산비 김일성의 죽음
조선군 당국담
[17일 조선군 당국담] 김일성비는 예를 들어 압록강 대안 장백, 무송현에 반거하여 콩민테른 사주 아래 소재 주민들에 대한 공산주의를 고취하고 반만항일적 기운의 양성에 힘쓰거나 살육횡탈의 한계를 다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때로는 일만군에 대해 불령을 책하므로 만주국의 치안을 현저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지난 13일 만군 토비대는 김일성의 소재를 확인하고, 이를 공격하여 격전 5시간 만에 마침내 그 수령을 올려 개가를 올리기도 했으며, 과연 오래도록 그들의 질곡하에 고심하여 주민들의 기쁨은 물론, 선만국경 치안에 큰 관심을 가진 조선군 당국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곳으로 만주 토비대의 고심과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父子二代の 不逞 / 普天堡 襲擊の 張本
- 출처 : 鮮滿國境住民の苦惱今や解消, 共產匪金日成の死 경성일보(京城日報) 1937년 11월 18일자 조간 7면
- 참고 : 경성일보 김일성 피살 속보 기사
파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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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 2022년 11월 11일 (금) 05:35 | 2,411 × 1,864 (1.88 MB) | JohnDoe (토론 | 기여) | 선명한 이미지로 교체. |
2018년 8월 26일 (일) 07:25 | 2,268 × 2,330 (1.6 MB) | JohnDoe (토론 | 기여) |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는 19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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