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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信眉)<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56 신미(信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ref>는 영동(영산) 김씨로 속명이 김수성(金守省)이며, 충청도 황간현 출신이다. 정확한 생졸년은 불명이나 동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568 김수온(金守溫, 1410 ~ 1481)]보다는 먼저 태어났고, 1480년경까지 생존해 있었다.  
신미(信眉)<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56 신미(信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ref>는 영동(영산) 김씨로 속명이 김수성(金守省)이며, 충청도 황간현 출신이다. 정확한 생졸년은 불명이나 동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568 김수온(金守溫, 1410 ~ 1481)]보다는 먼저 태어났고, 1480년경까지 생존해 있었다.  


세조가 스승으로 모시던 스님이고, 배불적이던 세종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0354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가 세상을 떠나면서 불교에 귀의하여 스승으로 받들었다. 이처럼 신미는 왕들의 스승으로, 천대받던 스님이 전혀 아니고, 그에 대한 기록도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세조가 스승으로 모시던 스님이고, 배불적이던 세종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0354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가 세상을 떠나면서 불교에 귀의하여 스승으로 받들었다. 이처럼 신미는 왕들의 스승으로, 그에 대한 기록도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인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신미(信眉)를 처음 안 것은 병인년(1446년)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5027_002 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 5월 27일 갑오 2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승도들을 모아 경을 대자암에 이전하다]</ref><ref>[http://sillok.history.go.kr/id/kea_10004006_002#footnote_view1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 4월 6일 기묘 2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영의정 하연 등과 신미의 관직 제수와 영응 대군의 거처 등을 의논하다]</ref> 따라서 신미는 한글 창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한글을 가장 빨리 익혔던 모양으로 세조 때 불경 언해 사업에 많이 관여하였고, 당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불서에 신미의 이름이 수도 없이 나온다.  
==한글 창제에 관여했나?==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인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신미(信眉)를 처음 안 것은 병인년(1446년)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5027_002 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 5월 27일 갑오 2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승도들을 모아 경을 대자암에 이전하다]</ref><ref>[http://sillok.history.go.kr/id/kea_10004006_002#footnote_view1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 4월 6일 기묘 2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영의정 하연 등과 신미의 관직 제수와 영응 대군의 거처 등을 의논하다]</ref> 따라서 신미는 한글 창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한글을 가장 빨리 익혔던 모양으로 세조 때 불경 언해 사업에 많이 관여하였고, 당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불서에 신미의 이름이 수도 없이 나온다.  


신미는 속리산 법주사 부속 암자인 복천암에 주로 거주하였으며, 부도도 거기에 세워져 있다.
신미는 속리산 법주사 부속 암자인 복천암에 주로 거주하였으며, 부도도 거기에 세워져 있다.

2019년 7월 27일 (토) 07:43 판

신미(信眉)는 조선 초의 고승이다. 세종, 문종, 세조 등 세 왕의 존숭을 받았으며, 불경 언해와 간행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생애

신미(信眉)[1]는 영동(영산) 김씨로 속명이 김수성(金守省)이며, 충청도 황간현 출신이다. 정확한 생졸년은 불명이나 동생 김수온(金守溫, 1410 ~ 1481)보다는 먼저 태어났고, 1480년경까지 생존해 있었다.

세조가 스승으로 모시던 스님이고, 배불적이던 세종이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가 세상을 떠나면서 불교에 귀의하여 스승으로 받들었다. 이처럼 신미는 왕들의 스승으로, 그에 대한 기록도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한글 창제에 관여했나?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인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신미(信眉)를 처음 안 것은 병인년(1446년)이다.[2][3] 따라서 신미는 한글 창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한글을 가장 빨리 익혔던 모양으로 세조 때 불경 언해 사업에 많이 관여하였고, 당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불서에 신미의 이름이 수도 없이 나온다.

신미는 속리산 법주사 부속 암자인 복천암에 주로 거주하였으며, 부도도 거기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