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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 『정로(正路)』 창간호 1945년 11월 1일자 1면 기사 《朝鮮共産黨 北部朝鮮分局 設置 : 劃期! 五道黨 責任者 熱誠者 大會》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 『정로(正路)』 창간호 1945년 11월 1일자 1면 기사 《朝鮮共産黨 北部朝鮮分局 設置 : 劃期! 五道黨 責任者 熱誠者 大會》
[[파일:1945-11-01 정로 김영환.png|600픽셀|섬네일|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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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五道黨 責任者 熱誠者 大會)가 열린 날은 10월 13일로 이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北部朝鮮分局) 창설이 결정되었으며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A%A9%EB%B2%94 김용범(金鎔範, 1902~1947)]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기사에서 대회일자를 9월 13일이라 한 것은 오류이다. 김영환(金永煥) 동무의 당조직문제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고 하여, [[김일성]]은 가명 김영환(金永煥)으로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ref>[[김일성이 사용한 이름#평양에 와서 가명 김영환(金永煥)으로 행세]]</ref>
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五道黨 責任者 熱誠者 大會)가 열린 날은 10월 13일로 이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北部朝鮮分局) 창설이 결정되었으며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A%A9%EB%B2%94 김용범(金鎔範, 1902~1947)]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기사에서 대회일자를 9월 13일이라 한 것은 오류이다. 김영환(金永煥) 동무의 당조직문제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고 하여, [[김일성]]은 가명 김영환(金永煥)으로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ref>[[김일성이 사용한 이름#평양에 와서 가명 김영환(金永煥)으로 행세]]</ref> 위 기사는 [[김일성]]이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 대중 연설을 한 10월 14일 이후인  11월 1일자 신문에 실렸음에도 그를 가명으로 싣고 있는 것은 아직 아무런 공식적인 직책을 가지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명칭은 1946년 5월 22일까지 사용되고, 이튿날 5월 23일부터 북조선 공산당으로 명칭이 바뀐다. 서울의 조선공산당과는 다른 북한만의 공산당으로 된 것이다.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명칭은 1946년 5월 22일까지 사용되고, 이튿날 5월 23일부터 북조선 공산당으로 명칭이 바뀐다. 서울의 조선공산당과는 다른 북한만의 공산당으로 된 것이다.

2025년 10월 9일 (목) 20:37 판

조선로동당(朝鮮勞動黨 표준어: 조선노동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일 집권정당이다. 한자로는 "로동당"이지만, 영문으로는 Workers' Party of Korea, 즉 "조선로동자당"이다.

조선로동당은 1945년 10월 10일을 당 창건 기념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날은 당 창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날이다. 1945년 10월 13일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창립되고 김일성 아닌 김용범(金鎔範, 1902~1947)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는데, 후일 날자를 10월 10일로 바꾸어. 당창건일로 정했다. 서울에 박헌영조선공산당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1국 1당의 원칙에 따라 북한지역에 따로 공산당을 또 만들지 못하고 평양에는 조선공산당의 분국형태로 만들어졌다. 분국은 형식적으로는 조선공산당 중앙의 지시를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주요결정은 서울의 당중앙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1945년 12월 17일 북조선 분국 제3차 확대회의에서 김용범을 사퇴시키고 비로소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1946년 5월 23일 북조선공산당으로 됐다가 다시 1946년 7월 29일 연안파들의 정당인 조선신민당과 통합하여 북조선 로동당(북로당)이 되고, 김두봉이 대표가 된다.

북조선로동당은 1948년 8월 정권 수립을 위해 남조선로동당과 연합중앙위를 구성한데 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범 후 1949년 6월 30일 두 당이 통합하여 비로소 조선로동당으로 되었다.[1] 그러나 이 통합은 비밀리에 이루어져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 당국이 합당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1950년 7월 1일이다. 남침전쟁을 계획하고 있던 당시 남한의 남로당원들에게는 남로당북로당에 흡수 통합되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필요했던 때문으로 보이며, 남침 전쟁 개시 후에 마지 못해 인정한 것같다.[2]


북한에는 조선사회민주당과 조선천도교청우당과 같은 당이 존재하지만 형식적인 야당이자 관제야당에 불과하다.

1. 조선노동당 약사

조선노동당 출범까지의 과정과 주요 일자가 나옴.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창설 대회 : 평양, 1945년 10월 13일 오후 1시~6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 『정로(正路)』 창간호 1945년 11월 1일자 1면 기사 《朝鮮共産黨 北部朝鮮分局 設置 : 劃期! 五道黨 責任者 熱誠者 大會》
1945-11-01 정로 김영환.png

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五道黨 責任者 熱誠者 大會)가 열린 날은 10월 13일로 이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北部朝鮮分局) 창설이 결정되었으며 김용범(金鎔範, 1902~1947)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기사에서 대회일자를 9월 13일이라 한 것은 오류이다. 김영환(金永煥) 동무의 당조직문제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고 하여, 김일성은 가명 김영환(金永煥)으로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3] 위 기사는 김일성이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 대중 연설을 한 10월 14일 이후인 11월 1일자 신문에 실렸음에도 그를 가명으로 싣고 있는 것은 아직 아무런 공식적인 직책을 가지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명칭은 1946년 5월 22일까지 사용되고, 이튿날 5월 23일부터 북조선 공산당으로 명칭이 바뀐다. 서울의 조선공산당과는 다른 북한만의 공산당으로 된 것이다.


북조선공산당.gif
『정로(正路)』 가 1946년 5월 22일까지 조선공산당 북부조선 분국 기관지로 표시되었다가 이튿날부터 북조선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바뀌었다.


2. 참고 자료

북한 노동당 창건 80주년 열병식 참석…'반미 연대' 부각
과거와 비교해 격 높아져…시진핑은 방북 안해


3.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