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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에 666년 12월 고구려에서 지위가 높은 신하인 연정토(淵淨土)가 항복해왔다고 했는데,<ref>[https://db.history.go.kr/common/compareViewer.do?levelId=sg_006r_0020_0620&type=ancient 삼국사기 > 신라본기 제6 > 문무왕(文武王) > 연정토가 항복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f>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에 666년 12월 고구려에서 지위가 높은 신하인 연정토(淵淨土)가 항복해왔다고 했는데,<ref>[https://db.history.go.kr/common/compareViewer.do?levelId=sg_006r_0020_0620&type=ancient 삼국사기 > 신라본기 제6 > 문무왕(文武王) > 연정토가 항복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f>


《신당서(新唐書)》에 개소문(蓋蘇文)의 동생으로 정토(淨土)가 나온다.<ref>[https://ctext.org/wiki.pl?if=gb&res=182378 《신당서(新唐書)》 列傳第一百四十五 東夷 (20)]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蓋蘇文弟凈土"로 검색</ref><ref>동사강목에는 출전을 《통고(通攷)》라 했는데 이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6A_0030_000_0200 범례(凡例)의 채거서목(採據書目)]에 나오는 송(宋) 마단림(馬端臨)의 [https://ctext.org/wiki.pl?if=gb&res=576035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연개소문이나 그 동생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으므로 착각한 듯하다.</ref> 천정토(泉淨土)와 연정토(淵淨土)는 동일인으로 볼만한데다 성의 글자를 유사한 뜻의 다른 글자로 바꾸어 적을만한 타당한 근거도 있으므로 개소문의 원래 성씨는 천(泉) 아닌 연(淵)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피휘 때문에 연(淵)자를 천(泉)자로 쓴 사례로는 도연명(陶淵明)을 천명(泉明)으로 쓴 것 등을 들 수 있다.<ref name="ahn"/><ref>[https://zh.wikisource.org/wiki/Author:%E9%99%B6%E6%B7%B5%E6%98%8E 作者:陶淵明]-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ref>
《신당서(新唐書)》에 개소문(蓋蘇文)의 동생으로 정토(淨土)가 나온다.<ref>[https://ctext.org/wiki.pl?if=gb&chapter=272608 《신당서(新唐書)》 列傳第一百四十五 東夷 (20)]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蓋蘇文弟凈土"로 검색</ref><ref>동사강목에는 출전을 《통고(通攷)》라 했는데 이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6A_0030_000_0200 범례(凡例)의 채거서목(採據書目)]에 나오는 송(宋) 마단림(馬端臨)의 [https://ctext.org/wiki.pl?if=gb&res=576035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연개소문이나 그 동생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으므로 착각한 듯하다.</ref> 천정토(泉淨土)와 연정토(淵淨土)는 동일인으로 볼만한데다 성의 글자를 유사한 뜻의 다른 글자로 바꾸어 적을만한 타당한 근거도 있으므로 개소문의 원래 성씨는 천(泉) 아닌 연(淵)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피휘 때문에 연(淵)자를 천(泉)자로 쓴 사례로는 도연명(陶淵明)을 천명(泉明)으로 쓴 것 등을 들 수 있다.<ref name="ahn"/><ref>[https://zh.wikisource.org/wiki/Author:%E9%99%B6%E6%B7%B5%E6%98%8E 作者:陶淵明]-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ref>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형제간의 성씨를 다르게 쓴 것으로 보아 그는 연정토(淵淨土)가  개소문(蓋蘇文)의 동생이라는 인식이 없었던 듯하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형제간의 성씨를 다르게 쓴 것으로 보아 그는 연정토(淵淨土)가  개소문(蓋蘇文)의 동생이라는 인식이 없었던 듯하다.

2025년 11월 6일 (목) 18:42 판

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


쿠데타로 왕(영양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역적이라는

전통적 평가와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민족적 영웅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있다.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했다고 하면서도 또 장수로서 용맹했다는 평가도 뒤따른다.


그의 사후 그의 권력을 이은 그의 아들들이 서로 골육상쟁 내분을 일으켜 고구려가 망했기에,

연개소문은 고구려가 망하는 데 책임이 크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당태조 이연의 연 자 피휘때문인지 오랫동안 천개소문이라고 불리고 기록되어 있었다.

현대에서는 연개소문의 성씨가 천이 아니라 연이 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모두 부정적인 서술이 많다.

삼국사기에서 열전에서 역신 편으로 분류 했고

(쿠데타로 왕을 죽였으니 빼박이다. 아니면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새로운 왕조를 열고 그 왕조가 오래 갔으면 또 모르지만,

연개소문은 실권만 장악하고 자기가 왕이 되지 않고 새로운 왕조를 열지도 많았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그 아들 때에 고구려가 망했다.

사실 새로운 왕조들 연 창업자 시호가 태조라는 사람들 대부분이 쿠데타로 왕을 시해하고 본인이 왕이 된 경우가 많다.

삼국사기의 기술로는 영양왕의 시체를 토막내서 도랑에 버렸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진짜 잔인하게 죽였는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다. )


, 연개소문이 평소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했다고 기술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으로는 연개소문은 아버지의 막리지 벼슬을 세습해야 하는데,

평소 연개소문의 포악한 성격을 아는 신하들이 모두 반대해서 연개소문이 읍소를 하자

연민을 느낀 신하들이 허락을 했다고 쓰고 있다. )


불교 승려인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서는 연개소문이 중국에서 도교를 도입해서 고구려가 망했다고 까고 있고,

(도교와 불교는 중국에서 부터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수양제의 신하가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연개소문으로 환생했다는 이야기를 적어 놓기도 했다.[1]


삼국사기에서는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다녔고, 말을 타고 내릴 때 꼭 사람을 엎드려놓게 해서 그걸 밟고 올라가거나 내려갔다고 한다.

(후술할 드라마 삼국기에도 이렇게 말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https://youtu.be/R-C8SLwAIA0?si=CYIqGYP4Yk2Nrjqb)


고구려 말기 삼국통일기를 다루는 매체에서는 거의 무조건 나온다.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한 조경환이 분했는데,

도중에 조경환이 빠징코 사업에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외국에 나가는 바람에 촬영도중 연기자가 증발해 버리는 바람에

연개소문은 죽고 카게무샤가 뒤를 이었다는 식으로 후반 분량을 거의 공기 수준으로 떼웠다.


연개소문 드라마에서는 이 드라마 자체가 실제 역사보다는 환타지에 가까운 드라마 답게 ,

초인급 능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비도를 날리면 쓰리쿠션이 되지를 않나, 설인귀의 화살을 비도로 막지를 않나

실제 역사는 고구려 멸망전 아들들이 내분을 일으키게 전에 죽지만,

고구려 멸망 하기 직전까지 살아 있는 것으로 나온다.


중국에 전근대 경극에도 나오는데, 삼국사기에서 묘사한 5개가 아닌 7개의 비도를 쓰는 용맹한 장수로,

당태종을 패배시키지만 당태종을 추격하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게는 패하는 것으로 나온다.

1. 성을 연(淵)씨로 보는 근거

삼국사기나 중국의 사서에는 그의 이름이 개소문(蓋蘇文)이나 개금(蓋金) 또는 개금(盖金)이라고도 하고, 성이 천(泉)씨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성이 원래 연(淵)씨이나 당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휘(避諱)하기 위해 천(泉)으로 바꾸어 적었다는 주장은 조선 후기 역사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처음 내놓았다.[1]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에 666년 12월 고구려에서 지위가 높은 신하인 연정토(淵淨土)가 항복해왔다고 했는데,[2]

《신당서(新唐書)》에 개소문(蓋蘇文)의 동생으로 정토(淨土)가 나온다.[3][4] 천정토(泉淨土)와 연정토(淵淨土)는 동일인으로 볼만한데다 성의 글자를 유사한 뜻의 다른 글자로 바꾸어 적을만한 타당한 근거도 있으므로 개소문의 원래 성씨는 천(泉) 아닌 연(淵)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피휘 때문에 연(淵)자를 천(泉)자로 쓴 사례로는 도연명(陶淵明)을 천명(泉明)으로 쓴 것 등을 들 수 있다.[1][5]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형제간의 성씨를 다르게 쓴 것으로 보아 그는 연정토(淵淨土)가 개소문(蓋蘇文)의 동생이라는 인식이 없었던 듯하다.

2. 각주

  1. 1.0 1.1 1.2 안정복(安鼎福), 《동사강목(東史綱目)》 부록 상권 상 / 고이(考異) : 천개소문(泉蓋蘇文)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藏王) 원년(642) 한국고전번역원
  2. 삼국사기 > 신라본기 제6 > 문무왕(文武王) > 연정토가 항복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 《신당서(新唐書)》 列傳第一百四十五 東夷 (20)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蓋蘇文弟凈土"로 검색
  4. 동사강목에는 출전을 《통고(通攷)》라 했는데 이는 범례(凡例)의 채거서목(採據書目)에 나오는 송(宋)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연개소문이나 그 동생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으므로 착각한 듯하다.
  5. 作者:陶淵明-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