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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간 동안 그 자신은 변증법적 사적 유물론의 견해를 발전시키고, 자연과학에 이 견해를 적용시킴으로써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유고(遺稿)인 [[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은 그 찬란한 기록이다.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확정하고, 인식론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또 사적 유물론의 기계적 이해를 비판하면서, 경제적 조건의 결정적 역할과 함께, 상부구조, 그 속의 이데올로기의 의의, 나아가 역사에 있어 개인이 지니는 의의도 해명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반뒤링론]](AntiDühring, 1878),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es, 1884), [[포이에르바하론]](1886)에서 찾아볼 수 있다.<br><br>
이 기간 동안 그 자신은 변증법적 사적 유물론의 견해를 발전시키고, 자연과학에 이 견해를 적용시킴으로써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유고(遺稿)인 [[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은 그 찬란한 기록이다.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확정하고, 인식론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또 사적 유물론의 기계적 이해를 비판하면서, 경제적 조건의 결정적 역할과 함께, 상부구조, 그 속의 이데올로기의 의의, 나아가 역사에 있어 개인이 지니는 의의도 해명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반뒤링론]](AntiDühring, 1878),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es, 1884), [[포이에르바하론]](1886)에서 찾아볼 수 있다.<br><br>
그는 1870년에 런던으로 이주하여 마르크스와 함께 일을 하였으며, 그의 사후(1883)에는 [[자본론]] 제2~6권의 간행에 몰두하면서, 마르크스 사망 후의 유럽 국가들에 있어 노동운동의 지도적인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895년 8월 5일 식도암으로 세상을 마쳤으며 그의 유해는 그의 유지(遺志)에 따라 해저에 가라앉혀졌다.
그는 1870년에 런던으로 이주하여 마르크스와 함께 일을 하였으며, 그의 사후(1883)에는 [[자본론]] 제2~6권의 간행에 몰두하면서, 마르크스 사망 후의 유럽 국가들에 있어 노동운동의 지도적인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895년 8월 5일 식도암으로 세상을 마쳤으며 그의 유해는 그의 유지(遺志)에 따라 해저에 가라앉혀졌다.
[[분류:공산주의]][[분류:사회주의]][[분류:전체주의]]

2019년 7월 26일 (금) 14:31 기준 최신판

독일어: Friedrich Engels
1820년 11월 28일 - 1895년 8월 5일

개요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경제학자로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와 함께,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 변증법적 및 사적 유물론의 창시자이며, 국제 노동자 계급운동의 지도자였다.

생애

독일 라인 주(洲)의 바르멘 시에서 1820년 11월 28일, 방적공장 경영자의 가정에서 출생하였고, 아들이 경영자가 되기를 바라는 부친의 뜻으로 김나지움을 중퇴한 후 브레멘 시의 공장에서 견습으로 근무하다가, 1841년 가을부터는 포병지원병으로 베를린에서 복무하였다. 이 기간에 베를린 대학교에서 청강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당시 사회의 개혁에 관심을 갖고 그 운동에 참가하였는데, 베를린 체류 중에 청년헤겔학파의 일원이 되었고, 또 베를린 대학 교수였던 셸링의 반동적, 신비적 철학에 대하여 「셸링과 계시」(Schelling und Offenbarung, 1842) 등 여러 논문을 통해 반박하였다. 동시에 헤겔의 보수적 결론, 그 관념론적 변증법의 모순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1842년에 아버지에 의해 그가 경영하던 영국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근무하게 되어, 당시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달하였던 영국의 노동자 계급과 접하게 되면서, 그 지독한 경제적 생활상태, 정치적 무권리의 원인 탐구에 뜻을 둠과 동시에 그 당시 전개되고 있던 차티스트 운동의 견해와 운동의 결정을 보고, 그 성과를 『정치 경제학 비판 요강』(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1844) 및 『영국에 있어서의 노동자 계급의 상태』(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 1845)를 집필하였다. 이들 저서로 프롤레타리아의 위대한 미래와 그들이 담당하는 역사적 사명을 명확히 한 최초의 인물이 되면서 확고한 사회주의자로 정립되었다.

영국에서 귀국 도중에 파리에서 마르크스와 만난 후 이들의 확고한 우정과 협력이 계속되었다(1844). 이들은 우선, 1844~1846년에 걸쳐, 공동 저작 신성가족(Die heilige Familie)과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를 써서, 헤겔, 포이에르바하, 청년헤겔학파 등을 추종하는 자들의 철학적 견해를 비판하고, 동시에 변증법적 사적 유물론의 토대를 쌓았다. 또 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당으로 이어진 '공산주의 동맹'을 조직하는 등 실천적 활동을 수행하고, 그 동맹의 강령으로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을 발표하였으며, 엥겔스는 그것의 초안인 공산주의의 원리(Prinzipien des Kom-munismus)를 쓰기도 하였다.<b4>
1848~1849년의 독일 혁명에 적극 참가하였으나, 혁명의 실패로 다시 맨체스터의 공장으로 돌아갔다(1850~1870). 이 혁명 투쟁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독일 농민 전쟁』(Der deutsche Bauernkrieg, 1850), 『독일에 있어서의 혁명과 반혁명』(Revolution und Kontrarevolution, 1851~1852)을 쓰고,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에 있어 동맹자로서 농민이 지니는 의의를 명확히 하였다. 당시 이미 런던에 와 있던 마르크스와 함께 제1인터내셔널을 결성, 이 조직 내의 쁘띠 부르주아적, 기회주의적, 무정부주의적 견해와 투쟁하고, 또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완성을 도우며, 연구 생활상의 원조에 힘을 기울였다.

이 기간 동안 그 자신은 변증법적 사적 유물론의 견해를 발전시키고, 자연과학에 이 견해를 적용시킴으로써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유고(遺稿)인 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은 그 찬란한 기록이다.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확정하고, 인식론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또 사적 유물론의 기계적 이해를 비판하면서, 경제적 조건의 결정적 역할과 함께, 상부구조, 그 속의 이데올로기의 의의, 나아가 역사에 있어 개인이 지니는 의의도 해명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반뒤링론(AntiDühring, 1878),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es, 1884), 포이에르바하론(1886)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870년에 런던으로 이주하여 마르크스와 함께 일을 하였으며, 그의 사후(1883)에는 자본론 제2~6권의 간행에 몰두하면서, 마르크스 사망 후의 유럽 국가들에 있어 노동운동의 지도적인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895년 8월 5일 식도암으로 세상을 마쳤으며 그의 유해는 그의 유지(遺志)에 따라 해저에 가라앉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