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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527 의문투성이 한글기원…신미 스님이 열쇠] 법보신문 2004년 10월 04일 월요일
*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527 의문투성이 한글기원…신미 스님이 열쇠] 법보신문 2004년 10월 04일 월요일


신미의 출신 가문인 영산 김씨(永山 金氏) 족보에는 신미가 출가하기 전에 집현전 학사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득총어세종(得寵於世宗)’], 이것도 그가 한글 창제에 간여했다는 증거라고 제시되지만, 집현전 학사들의 이름은 대체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실제로 집현전 학사였을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또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인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신미(信眉)를 처음 안 것은 병인년(1446년)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5027_002 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 5월 27일 갑오 2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승도들을 모아 경을 대자암에 이전하다]</ref><ref>[http://sillok.history.go.kr/id/kea_10004006_002#footnote_view1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 4월 6일 기묘 2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영의정 하연 등과 신미의 관직 제수와 영응 대군의 거처 등을 의논하다]</ref> 따라서 신미는 한글 창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한글을 가장 빨리 익혔던 모양으로 세조 때 불경 언해 사업에 많이 관여하였고, 당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불서에 신미의 이름이 수도 없이 나온다.  
또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인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신미(信眉)를 처음 안 것은 병인년(1446년)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5027_002 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 5월 27일 갑오 2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승도들을 모아 경을 대자암에 이전하다]</ref><ref>[http://sillok.history.go.kr/id/kea_10004006_002#footnote_view1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 4월 6일 기묘 2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영의정 하연 등과 신미의 관직 제수와 영응 대군의 거처 등을 의논하다]</ref> 따라서 신미는 한글 창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한글을 가장 빨리 익혔던 모양으로 세조 때 불경 언해 사업에 많이 관여하였고, 당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불서에 신미의 이름이 수도 없이 나온다.


==각주==
==각주==

2019년 7월 27일 (토) 07:59 판

신미(信眉)는 조선 초의 고승이다. 세종, 문종, 세조 등 세 왕의 존숭을 받았으며, 불경 언해와 간행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생애

  • 신미(信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미(信眉)는 영동(영산) 김씨로 속명이 김수성(金守省)이며, 충청도 황간현 출신이다. 정확한 생졸년은 불명이나 동생 김수온(金守溫, 1410 ~ 1481)보다는 먼저 태어났고, 1480년경까지 생존해 있었다.

세조가 스승으로 모시던 스님이고, 배불적이던 세종이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가 세상을 떠나면서 불교에 귀의하여 스승으로 받들었다. 이처럼 신미는 왕들의 스승으로, 그에 대한 기록도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신미는 속리산 법주사 부속 암자인 복천암에 주로 거주하였으며, 부도도 거기에 세워져 있다.

한글 창제에 관여했나?

신미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주장은 주로 불교계 주변에서 나왔다. 일찍 몇몇 사람들이 한글이 범어(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고, 신미가 범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다른 근거도 제시되고 있으나 모두 정황적인 추정일 뿐이고, 그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신미의 출신 가문인 영산 김씨(永山 金氏) 족보에는 신미가 출가하기 전에 집현전 학사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득총어세종(得寵於世宗)’], 이것도 그가 한글 창제에 간여했다는 증거라고 제시되지만, 집현전 학사들의 이름은 대체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실제로 집현전 학사였을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또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인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신미(信眉)를 처음 안 것은 병인년(1446년)이다.[1][2] 따라서 신미는 한글 창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한글을 가장 빨리 익혔던 모양으로 세조 때 불경 언해 사업에 많이 관여하였고, 당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불서에 신미의 이름이 수도 없이 나온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