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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6월 25일 [[김홍집]]이 영의정에 임명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6025_003</ref> 또한 개혁 추진 기구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였는데 군국기무처 구성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1894년 6월 25일 [[김홍집]]이 영의정에 임명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6025_003</ref> 또한 개혁 추진 기구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였는데 군국기무처 구성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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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정치·사회·경제·문화 등등 모든 부문에 관하여 토의하여 개혁안을 결정했다.
위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정치·사회·경제·문화 등등 모든 부문에 관하여 토의하여 개혁안을 결정했다.



2020년 7월 2일 (목) 18:01 판

甲午改革

개요

조선이 시행한 근대화 개혁. 시기에 따라 1,2,3차로 나눌 수 있다.

제1차 갑오개혁

배경

1894년 6월 25일 김홍집이 영의정에 임명되었다.[1] 또한 개혁 추진 기구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였는데 군국기무처 구성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군국기무처 구성원 명단[2]
관직 성명
군국기무처회의총재(軍國機務處會議總裁) 영의정 김홍집
내무 독판(內務督辦) 박정양
협판(協辦) 민영달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윤식
내무 협판(內務協辦) 김종한
장위사(壯衛使) 조희연
대호군(大護軍) 이윤용
외무 협판(外務協辦) 김가진
우포장(右捕將) 안경수
내무 참의(內務參議) 정경원·박준양·이원긍·김학우·권형진
외무 참의(外務參議) 유길준·김하영
외무 협판(外務協辦) 김가진
공조 참의(工曹參議) 이응익
부호군(副護軍) 서상집

위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정치·사회·경제·문화 등등 모든 부문에 관하여 토의하여 개혁안을 결정했다.

내용

1. 이제부터는 국내외의 공문서 및 사문서에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쓴다.

2. 청국(淸國)과의 조약을 개정(改正)하고 각국에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를 다시 파견한다.

3. 문벌(門閥), 양반(兩班)과 상인(常人)들의 등급을 없애고 귀천(貴賤)에 관계없이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한다.

4. 문관과 무관의 높고 낮은 구별을 폐지하고 단지 품계(品階)만 따르며 서로 만나는 절차를 따로 정한다.

5. 죄인 본인 외에 친족에게 연좌(緣坐) 형률을 일체 시행하지 않는다.

6. 처와 첩(妾)에게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만 양자(養子)를 세우도록 그전 규정을 거듭 밝힌다.

7. 남녀간의 조혼(早婚)을 속히 엄금하며 남자는 20살, 여자는 16살 이상이라야 비로소 혼인을 허락한다.

8. 과부(寡婦)가 재가(再嫁)하는 것은 귀천을 막론하고 자신의 의사대로 하게 한다.

9. 공노비(公奴婢)와 사노비(私奴婢)에 관한 법을 일체 폐지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

10. 비록 평민이라도 나라에 이롭고 백성에게 편리한 의견을 제기할 것이 있으면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 글을 올려 회의에 붙인다.

11. 각 관청의 조례(皁隷)들은 참작하여 더 두거나 줄인다.

12. 조정 관리의 의복 제도는 임금을 뵐 때의 차림은 사모(紗帽)와 장복(章服)[3], 품대(品帶)와 화자(靴子)로 하고 한가히 지낼 때의 사복(私服)은 칠립(漆笠), 탑호(搭護), 실띠로 하며 사인(士人)과 서인의 의복 제도는 칠립, 두루마기, 실띠로 하고 군사의 의복 제도는 근래의 규례를 따르되 장수와 군사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4]

군국기무처는 위와 같은 개혁안을 1894년 6월 28일 의결하였으며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위의 조항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우선 1항에서는 청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2항에서는 임오군란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 박탈당했던 외교권을 되찾은 것으로 500년 동안 지속했던 사대주의를 타파한 것이다. 9항은 악랄한 노비제도를 폐지한 것으로서 백성들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고, 3항 또한 불합리한 신분제도에 의해 양반 미만 신분에게 그동안 제한되었던 공무담임권을 인정한 것이다. 5조부터 8조까지는 불합리한 민형사상의 대우를 근대적으로 개선한 것이다.

반응

당시 쓰여진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백성들은 모두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고 기뻐하면서 다시 태어난 것처럼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5] 고 한다.

제2차 갑오개혁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