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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행정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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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내부 설치 및 행정기관과의 분리'''
*'''궁내부 설치 및 행정기관과의 분리'''
과거 [[조선왕조]]의 왕들은 자신이 국정의 총책임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궁궐 소속의 사람들을 위한 특혜정책 등을 펴는 일이 잦았다. 갑오개혁에서는 이런 폐단을 시정하고 왕의 자의적 지배를 방지하고자 궁궐의 일만 처리하는 궁내부를 설치하고 이들이 정부 관직을 겸직하거나 정부 사무에 간섭하는 일을 금지<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6028_004</ref>했다.  
과거 [[조선왕조]]의 왕들은 자신이 국정의 총책임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궁궐 소속의 사람들을 위한 특혜정책 등을 펴는 일이 잦았다. 갑오개혁에서는 이런 폐단을 시정하고 왕의 자의적 지배를 방지하고자 궁궐의 일만 처리하는 궁내부를 설치하고 이들이 정부 관직을 겸직하거나 정부 사무에 간섭하는 일을 금지<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6028_004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6월 28일 계유 4번째기사]</ref>했다.  


*'''과거제도 폐지'''
*'''과거제도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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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의 금납화'''
*'''조세의 금납화'''
이때까지도 조선은 쌀, 콩, 무명 베 등으로 세금을 걷고 있었다. 이런 조세 수취수단은 운송비가 많이 들 뿐만 아니라 화폐제도의 발전을 저해한다. 군국기무처에서는 곡식, 천 등으로 걷던 세금을 돈으로 걷을 것을 결정했다. <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7010_003</ref> 이러한 수취체제의 개선과 함께 당백전, 당오전 등으로 심각하던 화폐가치 절하와 그로 인해 백성들이 화폐사용을 꺼리던 폐해에 대한 개선조치가 동행되었다. 엽전을 당오전으로 위조하는 행위를 금지했으며, 자의적으로 너무 많은 동전을 찍어 화폐제도에 문제를 발생시키던 평양 주조소를 폐쇄했다. <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7008_003</ref>
이때까지도 조선은 쌀, 콩, 무명 베 등으로 세금을 걷고 있었다. 이런 조세 수취수단은 운송비가 많이 들 뿐만 아니라 화폐제도의 발전을 저해한다. 군국기무처에서는 곡식, 천 등으로 걷던 세금을 돈으로 걷을 것을 결정했다. <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7010_003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7월 10일 갑신 3번째기사]</ref> 이러한 수취체제의 개선과 함께 당백전, 당오전 등으로 심각하던 화폐가치 절하와 그로 인해 백성들이 화폐사용을 꺼리던 폐해에 대한 개선조치가 동행되었다. 엽전을 당오전으로 위조하는 행위를 금지했으며, 자의적으로 너무 많은 동전을 찍어 화폐제도에 문제를 발생시키던 평양 주조소를 폐쇄했다. <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7008_003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7월 8일 임오 3번째기사]</ref>


*'''은본위제 도입'''
*'''은본위제 도입'''
7월 11일에는 <신식 화폐 발행 장정>을 시행하여 은본위제를 도입<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7011_001</ref>하였다. 은본위제는 원칙없는 자의적 화폐발행으로 문제가 심각했던 [[조선]]의 경제상황 개선에 도움이 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7월 11일에는 <신식 화폐 발행 장정>을 시행하여 은본위제를 도입<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7011_001 ]</ref>하였다. 은본위제는 원칙없는 자의적 화폐발행으로 문제가 심각했던 [[조선]]의 경제상황 개선에 도움이 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도량형 통일'''
*'''도량형 통일'''

2020년 7월 4일 (토) 17:17 판

甲午改革

개요

조선이 시행한 근대화 개혁. 시기에 따라 1,2,3차로 나눌 수 있다.

제1차 갑오개혁

배경

1894년 6월 25일 김홍집이 영의정에 임명되었다.[1] 또한 개혁 추진 기구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였는데 군국기무처 구성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군국기무처 구성원 명단[2]
관직 성명
군국기무처회의총재(軍國機務處會議總裁) 영의정 김홍집
내무 독판(內務督辦) 박정양
협판(協辦) 민영달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윤식
내무 협판(內務協辦) 김종한
장위사(壯衛使) 조희연
대호군(大護軍) 이윤용
외무 협판(外務協辦) 김가진
우포장(右捕將) 안경수
내무 참의(內務參議) 정경원·박준양·이원긍·김학우·권형진
외무 참의(外務參議) 유길준·김하영
외무 협판(外務協辦) 김가진
공조 참의(工曹參議) 이응익
부호군(副護軍) 서상집

위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정치·사회·경제·문화 등등 모든 부문에 관하여 토의하여 개혁안을 결정했다.

내용

1. 이제부터는 국내외의 공문서 및 사문서에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쓴다.

2. 청국(淸國)과의 조약을 개정(改正)하고 각국에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를 다시 파견한다.

3. 문벌(門閥), 양반(兩班)과 상인(常人)들의 등급을 없애고 귀천(貴賤)에 관계없이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한다.

4. 문관과 무관의 높고 낮은 구별을 폐지하고 단지 품계(品階)만 따르며 서로 만나는 절차를 따로 정한다.

5. 죄인 본인 외에 친족에게 연좌(緣坐) 형률을 일체 시행하지 않는다.

6. 처와 첩(妾)에게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만 양자(養子)를 세우도록 그전 규정을 거듭 밝힌다.

7. 남녀간의 조혼(早婚)을 속히 엄금하며 남자는 20살, 여자는 16살 이상이라야 비로소 혼인을 허락한다.

8. 과부(寡婦)가 재가(再嫁)하는 것은 귀천을 막론하고 자신의 의사대로 하게 한다.

9. 공노비(公奴婢)와 사노비(私奴婢)에 관한 법을 일체 폐지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

10. 비록 평민이라도 나라에 이롭고 백성에게 편리한 의견을 제기할 것이 있으면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 글을 올려 회의에 붙인다.

11. 각 관청의 조례(皁隷)들은 참작하여 더 두거나 줄인다.

12. 조정 관리의 의복 제도는 임금을 뵐 때의 차림은 사모(紗帽)와 장복(章服)[3], 품대(品帶)와 화자(靴子)로 하고 한가히 지낼 때의 사복(私服)은 칠립(漆笠), 탑호(搭護), 실띠로 하며 사인(士人)과 서인의 의복 제도는 칠립, 두루마기, 실띠로 하고 군사의 의복 제도는 근래의 규례를 따르되 장수와 군사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4]

군국기무처는 위와 같은 개혁안을 1894년 6월 28일 의결하였으며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이외에도 군국기무처는 계속하여 각종 부문의 개혁을 시행하였는데, 1차 갑오개혁 시기 시행된 개혁 내용을 분야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대외관계 재정비

  • 중국에 예속되어 외교권 등에 제약을 받던 관계를 청산하여 세계 각국과 동등한 외교 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던 것을 폐지하고 '개국기년(開國紀年)'이라는 조선의 자주적인 연호를 도입하였다.

정치·행정 개혁

  • 궁내부 설치 및 행정기관과의 분리

과거 조선왕조의 왕들은 자신이 국정의 총책임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궁궐 소속의 사람들을 위한 특혜정책 등을 펴는 일이 잦았다. 갑오개혁에서는 이런 폐단을 시정하고 왕의 자의적 지배를 방지하고자 궁궐의 일만 처리하는 궁내부를 설치하고 이들이 정부 관직을 겸직하거나 정부 사무에 간섭하는 일을 금지[5]했다.

  • 과거제도 폐지

관리의 직무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서삼경 등 유교 경전으로 관리를 선발하던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인재채용 제도를 도입하였다.

  • 조세의 금납화

이때까지도 조선은 쌀, 콩, 무명 베 등으로 세금을 걷고 있었다. 이런 조세 수취수단은 운송비가 많이 들 뿐만 아니라 화폐제도의 발전을 저해한다. 군국기무처에서는 곡식, 천 등으로 걷던 세금을 돈으로 걷을 것을 결정했다. [6] 이러한 수취체제의 개선과 함께 당백전, 당오전 등으로 심각하던 화폐가치 절하와 그로 인해 백성들이 화폐사용을 꺼리던 폐해에 대한 개선조치가 동행되었다. 엽전을 당오전으로 위조하는 행위를 금지했으며, 자의적으로 너무 많은 동전을 찍어 화폐제도에 문제를 발생시키던 평양 주조소를 폐쇄했다. [7]

  • 은본위제 도입

7월 11일에는 <신식 화폐 발행 장정>을 시행하여 은본위제를 도입[8]하였다. 은본위제는 원칙없는 자의적 화폐발행으로 문제가 심각했던 조선의 경제상황 개선에 도움이 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 도량형 통일

각 지방마다 다르던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사회개혁

  • 노비제 폐지

거의 모든 국가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미국마저도 수십여년 전에 노예제도를 폐지한 판국에 1890년대까지 존속하고 있던 노예제도의 일환인 노비제도를 이때에 이르러서야 폐지하였다.

  • 연좌제 폐지

당시 조선에서는 집안에 한 사람만 역적으로 몰려도 집안이 몰살당했다. 이런 잔인한 형벌을 폐지하고 근대적 법체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 과부의 개가 허용

고리타분한 유교적 질서를 폐지하고 근대적 혼인관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반응

당시 쓰여진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백성들은 모두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고 기뻐하면서 다시 태어난 것처럼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9] 고 한다.

제2차 갑오개혁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