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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신문기사의 내용은 사실이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기사의 정보 출처는 이주신(李柱臣)으로 보이며, 사실이 아닐 경우 [[여운형]] 측으로부터 항의와 법적조치까지 당했을 것이나, 그런 흔적은 없다.
따라서 신문기사의 내용은 사실이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기사의 정보 출처는 이주신(李柱臣)으로 보이며, 사실이 아닐 경우 [[여운형]] 측으로부터 항의와 법적조치까지 당했을 것이나, 그런 흔적은 없다.
* [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7&totalCount=7&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6%9D%8E%E6%9F%B1%E8%87%A3&brokerPagingInfo=SnUpYrZZuHIxMzHLMdPQRSi0k0mUUpCDsHuCGHyKLMNd0f0h&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6%9D%8E%E6%9F%B1%E8%87%A3&searchKeywordConjunction=AND 직원록의 이주신(李柱臣) : 1935~1939년간 (창씨개명 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http://db.history.go.kr/id/su_013_1945_04_01_0020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3권  >  1945년 4월 1일  >  京城地方法院思想係에 근무하던 李家柱臣이 韓國人으로서 처음 監督書記로 승진되다.]
* [http://db.history.go.kr/id/su_013_1945_04_01_0020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3권  >  1945년 4월 1일  >  京城地方法院思想係에 근무하던 李家柱臣이 韓國人으로서 처음 監督書記로 승진되다.]

2021년 7월 18일 (일) 09:14 판

파일의 설명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직원록에서 검색되는 여운형 관련 검사 스기모토 칸이치(杉本寬一)와 서기 이가주신(李家柱臣).

이들은 대동신문(大東新聞) 1946년 2월 17일자와 18일자에 실린 여운형의 친일행위 관련 기사 《反省한 呂運亨의 告白》《反省한 呂運亨의 告白 (續)》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이가주신(李家柱臣)은 창씨개명한 이름이고, 그 이전 1930년대 후반에는 이주신(李柱臣)으로 직원록에서 검색된다. 해방 후에는 검사로 활동했다.

따라서 신문기사의 내용은 사실이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기사의 정보 출처는 이주신(李柱臣)으로 보이며, 사실이 아닐 경우 여운형 측으로부터 항의와 법적조치까지 당했을 것이나, 그런 흔적은 없다.

京城地方法院 李家氏 半島最初監督書記로 매일신보 [每日申報] 1945년 04월 03일 2면

이주신(李柱臣)은 1910년 9월 15일생이며, 서울 지검 부장검사로 재직 중이던 1950년 7월 7~9일경 서울 종로4가 노상에서 납북되었다.

파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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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2021년 7월 13일 (화) 15:171,138 × 1,231 (309 KB)JohnDoe (토론 | 기여)여운형 관련 검사 杉本寬一과 서기 李家柱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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