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일성과 관련된 해방전 또는 해방 직후의 1차 자료들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논란 많은 인물 김일성의 행적에 대한 실체 파악을 위해서는 한국, 일본, 중국, 소련 등에 산재해 있는 조작, 가공되기 이전의 각종 1차 자료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발굴하여 종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주 시절 청소년기
당시 기록
- 현존하는 김일성 관련 최초 기록이나, 열람이 금지되어 내용을 알 수 없다.
- 「조선공산청년회 조직의 건(朝鮮共産靑年會 組織ノ件)」 1929년 5월 14일자 길림 총영사의 보고문
- "육문학교(毓文學校) 생도(生徒) 김성계(金聖桂)"가 바로 북한 김일성이며, 김성주(金聖柱)를 잘못 적은 것임.
-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1930-06-25 일자로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 1930년 3월 14일 국민부(國民府)는 산하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등 3개 단체를 통합시켜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김성주(金成柱)가 선출됨.
- 신빈현내 반거 선비 국민부 소년단 조직에 관한 건(新賓縣內 蟠居 鮮匪國民府 少年團 組織ニ関スル件) - 만주 일본영사관 통화분관 주임이 외무대신에게 올린 1930년 8월 1일자 보고서
- 1930년 6월 27일에 창립된 국민부 소년단(國民府 少年團) 제3분대장 김성주(金成周)는 북한 김일성으로 보임.
- 세화군(世火軍)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 김성주(金成柱)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의 기사.
- 이종락(李鍾洛) 등이 1931년 1월 28일 구속되자 조선혁명군 사령부(朝鮮革命軍 司令部)는 와해된다. 3월말경 고할신도 체포되고, 잔존 세력이 세화군(世火軍)을 조직했다는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의 기사. 1931년 3월 세화군(世火軍)의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으로 김성주(金成柱)가 나온다.
-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의 부하 김일성(金一成)이 체포되었다는 1931년 3월 및 5월 동아일보 기사
오가자(五家子)에서의 살인 - 길흑농민동맹사건
정모(鄭某)씨를 살해한 이 사건은 김일성이 1930년말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에 가서 머물던 시기에 일어났다. 당시 김일성은 최형우가 근무하던 삼성학교(三成學校)를 세운 이만진(李萬鎭)의 집에서 아들 이선일(李善一, 1912~?)과 한 방에 기거했다고 한다. 이선일이 1970년대 초 이명영(李命英, 1928~2000)에게 증언한 바에 의하면 사건의 주범은 김일성이다.[1][2][3]
이선일이 공범이라고 증언한 변달환(邊達煥)·한용서(韓用瑞)·천학진(千學振) 등 3명이 1932년 8월 8일 장춘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이 당시 여러 신문에 보도된 것이 근래 밝혀졌다[4][5][6][7][8][9][10]. 이에 의하면 사건은 음력 1930년 12월 25일 (양력 1931년 2월 12일)에 일어났으며, 피살자는 정원일(鄭元一)이고, 교살 당했다고 하였다. 이 기사들의 내용은 이선일의 증언과 거의 일치하나 다만 신문 기사에는 김일성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달아난 공범으로 홍종환(洪鍾煥)이 있다고 하였다.
길흑농민동맹사건(吉黑農民同盟事件)을 보도한 1933-02-01 동아일보 3면 기사.[9]
후일 증언 또는 기록
- 김학규(金學奎, 1900~1967), 《백파 자서전(白波 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11) 부록(附錄) 자료 I(資料 I),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년) p.7 (p.589) : 자서전 서두에 필자가 50년전 1900년에 출생했다고 하여 1950년 경 집필한 것임.
- p.7 (p.589)에 김일성의 육뮨중학 시기및 1932년 여름까지의 일에 대한 증언이 나옴.
만주 항일 빨치산 시기
초기 빨치산 시절
김일성 또는 유사한 이름이 나오는 기록은 많으나 누구인지 신원 확인이 어렵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
1936년 ~ 1937년 기록에 자주나오는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나,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
1939년 ~ 1940년 기록에 나오는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 1940년 4월 만선일보에 5회 연재
소련군 시절
북한 김일성이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한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소련과 중국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고, 증언도 있다.
- 김일성, 안길, 서철이 왕신림에게 올린 보고서 : 1941년 1월 1일
- 소련서 작성한 이력서
- 항련 제1로군 약사
- 적기훈장 수여 관련 문서
- 주보중의 동북항일유격일기
- 88여단
해방 직후
친인척 관련 기록
부친 김형직
숙부 김형권
외조부 강돈욱
외숙 강진석
김일성 관련 우남위키 표제어
처와 자손 및 가족
관련 인물
- ↑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0) | 김성주의 살인벽 | 총을 쓰지 않고 타살·교살을 밥먹듯 중앙일보 1974.04.17
-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신문화사, 1974) p.135
-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권력(權力)의 역사(歷史)》 제2판 (종로서적 1989) pp.303~305
- ↑ 長春領事館에 逮捕된 ○○단重要人物 신의주검사국에 인도 매일신보(每日申報) 1932년 08월 11일 7면 4단
- ↑ 朝農同盟事件 卄一日에 公判 新義州地方法院에서 매일신보(每日申報) 1932년 12월 14일 7면 3단
- ↑ 治維違反及殺人事件最高七年을 求刑 공범二명은 五년과 三년을 구형 判決言渡는 來六日 매일신보(每日申報) 1933.02.02
- ↑ ○○團員 三名(단원 삼명) 長春領警(장춘령경)에 被逮(피체) 1932.08.15. 동아일보 2면
- ↑ 農民同盟事件(농민동맹사건) 廿一日 公判(입일일 공판) 1932.12.14. 동아일보 2면
- ↑ 9.0 9.1 邊達煥等 最高 七年 求刑(변달환등 최고 칠년 구형) 1933.02.01. 동아일보 3면
- ↑ 密偵殺害(밀정살해)한 農盟員 判决(농맹원 판결) 1933.02.08. 동아일보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