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백(成始伯, 1905 ~ 1950.06.27)은 해방 직후 남파되었던 거물 간첩으로, 1948년 남북협상 당시 김구, 김규식이 방북하도록 공작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50년 2월 체포되어, 북한이 남침을 개시한 직후 6월 27일 처형되었다.
생애
- 성시백(成始伯)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성시백 (1905년) - 위키백과
- 성시백간첩사건(成始伯間諜事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시백의 해방전후 행적에 대한 증언
고준석 설
그는 곧 서울로 상경해 아지트를 설치하고 중국과의 연락선 설치를 위해 평양으로 가 김두봉, 김일성을 만났다. 이때 김두봉, 김일성으로부터 ‘남한의 정세가 대단히 긴박합니다. 우리 일에도 협력해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고 5일간에 걸친 김일성, 김두봉과 성시백의 3자 회담이 진행되어, 성시백선과 북한측의 연락을 북로당 중앙조직부장인 허가이(소련파)와 부부장인 김호(연안파)가 맡게 되었다. 조직상으로는 이렇게 됐지만 실제로는 김일성 직속의 선이었다.
후에 김일성은 자신이 성시백을 남한에 파견한 것을 박헌영에게 알렸다. 성시백은 1947년 3월에 남하하면서 서울시 서소문동에 아지트를 두고 활동을 개시했다.
- 고준석 저, 유영구 역,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도서출판 글), pp. 231-232.
박병엽 설
그 뒤 20년대 말에 중국 상해로 가서 고학을 하며 학교를 다니다가 30년대 초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에서 그가 맡아 수행한 임무는 미해방 지구, 즉 국민당 통치지구에서의 지하공작이었다. 그가 주로 활동하던 곳은 서안이었는데 활동 당시에 국공합작 문제로 주은래가 그곳에 와있을 때였고, 그런 인연으 로 성시백은 주은래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다. 그 뒤 성시백은 중경, 무한 등지를 옮겨 다니며 국공합작에 필요한 지하공작을 전개한다.
그가 중국에 건너간 뒤 처음에 상해에서 활동하고 나중에는 중경에서도 활동한 인연으로 임시정부 관계자들, 광복군 계통과 폭넓은 교유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이런 경력이 나중에 그를 대남공작의 최적임자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 유영구, 『남북을 오고간 사람들』(도서출판 글, 1993), pp. 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