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군인으로 한국전 참전 유공자이다. 준장[1][2]으로 예편하고[3] 대한재향군인회 회장,[4][5][6] 내외문제연구소(內外問題硏究所) 소장 등을 지냈다.

그는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이나 해방 직후 서울에서 여운형의 비서를 하며 김일성에게 여운형의 밀서를 전달하러 평양도 들락거리다 혼란한 서울 생활에 염증을 느껴 가족들이 있는 북한으로 가게 된다.[7] 이후 북조선 공산당에 가입하고, 인민군에 들어가 소좌(소령)까지 되었다.[8]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폭압적인 정치 행태에 실망하고, 자신에게도 위해가 다가오자 도로 월남하여 국군에 참여했다. 북한에 있을 때는 김일성과 측근의 최고위급 인사들과도 더러 만났으며 당시 북한 정권 중심부의 내막을 들여다볼 기회가 상당히 있었으므로 후일 이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그의 말년 소식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자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한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9]

개요

해방 직후 북한 정권 내막에 대한 증언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7)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6) 동아일보 1972.01.27. 4면
조규하(曺圭河), 이경문(李庚文), 강성재(姜聲才),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pp.154~156 ; (고려원, 1987)
해방 후 김일성박금철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 대한 목격담.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람같았다고 하여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역인 6사장 김일성과 다른 인물이라는 증거가 됨.
여운형이 1946년 4월 19일 ~ 25일간에 평양을 방문할 때 북한으로 간 이기건이 안내했으며 당시 일에 대한 증언.

참고 자료

보천보사건 때 국내조직을 동원해 6사를 도운 탓으로 검거돼, 무기징역을 살다가 해방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박금철은 그해 가을 평양에 「김일성」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제6사장 김일성인 줄 알고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가서 「김일성」 을 자칭하는 김성주를 만났으나 김성주는 박금철을 몰라봤다. 거꾸로 박금철은 김성주로부터 일본 놈과 협력한 배반자란 낙인만 받았다. 그때 그 자리엔 여운형의 심부름으로 김성주를 만나러갔던 현 내외문제연구소장 이기건씨가 동석했었다.

각주

  1. 廿四名(입사명)의 陸軍大領(육군대령) 臨時准將(임시준장)으로 昇進(승진) 1954.01.15 조선일보 2면
  2. 政府人事(정부인사) : ▲陸軍准將(육군준장) 李奇健(이기건) 補師團長(보사단장) 1955.07.03 조선일보 1면
  3. 컨닝 高級將校(고급장교) 다섯名(명) 豫備役(예비역)에 1958.09.06 동아일보 3면
  4. 1960년 4.19 직후 생겨난 새로운 재향군인회로, 대한상무회에서 대한민국재향군인회로 개칭한 단체와는 다른 조직이며, 1961년 5.16 직후 해산되었다. : 대한민국재향군인회 / 향군60년사 / 조직정비기 (1960~1969)
  5. 在鄕軍人會 結成(재향군인회 결성) 會長(회장)에 李奇建氏(이기건씨) 1960.07.15 경향신문 3면
  6. 大韓民國在鄕軍人會(대한민국재향군인회)로發足(발족) 尙武會(상무회)를 改稱(개칭) 1960.07.17 동아일보 3면
  7. 내가 아는 北傀政權 裏面史 제1회 : 序言, 서울과 北韓을 往來하며 時事 7권 5호 (1968.5), 內外問題硏究所, p.100
  8. (3556)-제79화 육사졸업생들 (9) 중앙일보 1982.11.05 : 그밖에도 북괴군 소령으로 있다가 월남, 귀순한 이기건준장(7특·중위)이 있다.
  9. 인민군서 월남-예비역 준장 이기건씨의 6.25 체험기 LA 중앙일보 1998.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