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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수도 신경(新京, 長春)에서 간행되던 신경일일신문(新京日日新聞) 1937년 11월 18일자의 김일성 사살 기사 :

東邊道 蟠居の共産匪 金の首級擧ぐ 滿軍討伐隊の殊勳

臨江地區駐屯滿洲國軍 呂永發上尉の指揮する四十名は去る 十三日午前十時半頃撫松大營 第二區小西南岔北方九六七高地において金日成匪百餘名と遭遇 激戦五時間の後金匪首以下五名を斃し殘敵を東南に潰走せしめ匪首金の首を土産に 十五日原隊に引揚げた、この戰鬪において小銃二、彈藥百五十八その他糧秣多数を鹵獲したが、わが方に損害なし 滿軍の果敢なる討匪行に戰死をとげた 金日成匪首は、年齢廿八歳の弱冠で東邊道程斌につぐ一流の共産匪として東邊道北部に蟠居し討伐隊を惱ましてゐた、金は本籍朝鮮平安北道平壤府、昭和四年吉林省城 毓文中學卒業後 共産運動に走り、吉林省伊通縣を中心として 共産黨を組織、 吉林ならびに東邊道一帶にわたり打倒帝國主義の宣傳につとめてゐたが 數年前共産匪と合流、

北部東邊道の臨江、撫松、長白縣下に蟠居してゐた、昨秋の東邊道大討伐により地盤を覆滅され、雲嶺峰附近に逃亡 挽回に腐心してゐたが、今夏樹木の繁茂期に際し共産匪の殘黨を糾合して臨江、撫松、長白の三縣下に再び匪首として君臨し暴威をふるう中打續く 日滿軍討伐隊の徹底的潰滅に遭ひ最近撫松東南方地帯に壓迫されてゐたところを今回の討伐により遂に最期をとげたものである

이 기사는 6사장 김일성의 전사를 보도한 기사인데, 여기에 나오는 신원정보는 특이하게도 북한 김일성의 것이다. 같은 날 조선내의 신문 경성일보매일신보에 보도된 김일성 전사 기사에 나오는 "30대 중반의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는 신원기록과는 전혀 다르다.

위 신경일일신문의 기사를 근거로 6사장 김일성은 전사하지 않았고,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하는 것은 무리이다. 기사 자체는 김일성의 죽음을 사실로 간주한 보도이고, 그의 신원에 관한 내용은 부수적인 것이며, 만주의 다른 신문 기사에도 나오지 않은 내용이다. 지엽적인 것으로 몸통을 부정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러면 왜 이 기사에 엉뚱하게 북한 김일성의 신원이 나오게 됐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기사에서 "김일성은 조선의 평양 출신이고, 쇼와4년(1929년) 길림의 육문(毓文)중학을 졸업했으며, 길림성 이통현(吉林省伊通縣)을 중심으로 공산당을 조직했고, 길림북부 동변도(東邊道) 일대에서 타도제국주의를 선전했다"고 하여 북한 김일성의 신원과 부합하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정보는 당시의 북한 김일성과 아주 가까이 지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수준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시 북한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이종락 정도일 것이다. 이종락은 1931년 1월 말 체포되어 6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형기 만료 조금 전인 1936년 7월 초 가석방되어 풀려났다. 이후 만주로 간 그는 변절하여 협화회에 가입하고 활동하였다. 출소한 이종락이 만주 어디에 거주했는지는 불명확하나 그의 이전 활동지가 신경 일대였으므로 그 지역에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이종락으로 부터 이런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종락은 항일연군에 2명의 김일성이 있었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므로 김일성이 전사했다고 하자 자신이 알던 북한 김일성(김성주)인 줄 알고 위와 같이 잘못된 동명이인의 신원정보를 알려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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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2023년 5월 10일 (수) 06:111,087 × 649 (216 KB)JohnDoe (토론 | 기여)1937년 11월 18일자 신경일일신문(新京日日新聞)의 김일성 사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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