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信眉)는 조선 초의 고승이다. 세종, 문종, 세조 등 세 왕의 존숭을 받았으며, 불경 언해와 간행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혜각존자(慧覺尊者) 또는 수암화상(秀庵和尙) 등으로도 불린다.
생애
- 신미(信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미(信眉)는 영동(영산) 김씨로 속명이 김수성(金守省)이며, 충청도 황간현 출신이다. 정확한 생졸년은 불명이나 동생 김수온(金守溫, 1410 ~ 1481)보다는 먼저 태어났고, 1480년경까지 생존해 있었다.
행장이나 비문이 남아있지 않아 그의 초기 행적은 불명이다. 그의 정확한 출가 연도도 알 수 없으나, 어렸을 때 출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러 행적으로 보아 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의 제자로 추정되지만,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에 나오는 제자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다.
세조가 스승으로 모시던 스님이고, 배불적이던 세종이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가 세상을 떠나면서 불교에 귀의하여 스승으로 받들었다. 이처럼 신미는 왕들의 스승으로, 그에 대한 기록도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신미는 속리산 법주사 부속 암자인 복천암(福泉庵)[1]에 주로 거주하였으며, 부도도 거기에 세워져 있고 보물 제1416호로 지정되었다.[2]
한글 창제에 관여했나?
신미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주장은 주로 불교계 주변에서 나왔다. 일찍 몇몇 사람들이 한글이 범어(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고, 신미가 범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다른 근거도 제시되고 있으나 모두 정황적인 추정일 뿐이고, 그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 의문투성이 한글기원…신미 스님이 열쇠 법보신문 2004년 10월 04일 월요일
신미의 출신 가문인 영산 김씨(永山 金氏) 족보에는 신미가 출가하기 전에 집현전 학사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得寵於世宗)’], 이것도 그가 한글 창제에 간여했다는 증거라고 제시된다. 하지만, 집현전 학사들의 이름은 대체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실제로 집현전 학사였을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또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인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신미(信眉)를 처음 안 것은 병인년(1446년)이다.[3][4] 따라서 신미는 한글 창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한글을 가장 빨리 익혔던 모양으로 세조 때 불경 언해 사업에 많이 관여하였고, 당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불서에 신미의 이름이 수도 없이 나온다.
조선 왕들과의 관계
세종
- <a href="http://yoksa.aks.ac.kr/jsp/aa/ImageView.jsp?aa10up=kh2_je_a_vsu_30224_000" target="_blank">복천보장 [福泉寶藏 n1] 世宗 31(1449)</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