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선(吳胤善, 1871.09.19~1950 ?)은 일제하 평양에서 활동한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이며, 평양 산정현(山亭峴) 교회 장로였다. 해방 후 평양에서 조만식을 도와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소련군의 탄압에도 끝내 월남하지 않고 조만식과 운명을 같이하였으며, 6.25 때 평양을 탈출하기 직전의 김일성 일당에게 조만식과 함께 총살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월남하여 남한에서 활동한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오영진에 의하면 그의 집 사랑방은 일제시대 민족지도자들이 매일같이 모여들어 여러 일을 논의하는 집합소같은 곳이었고, 고등경찰과 헌병대원들도 무시로 찾아왔다고 한다.

생애

  • 생년은 1878년이 아니라 아래 "믿음의 선진, 삼형제이야기 오윤선•오형선•오원선 장로"에 나오는 1871년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1]
오윤선은 해주 오씨 해성 부원군파 23대손으로 서력 1871년 9월 19일에 부친 오치린과 모친 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평안남도 평양시 신양동 2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주소는 평안남도 평양시 대치령정 9번지이고, 호적상 원적은 황해도 수안군 대오면 남정리이다.

평남 건국준비위원회평남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

아들 오영진의 술회

부친에 대한 이야기가 위의 책 여러 곳에 나온다. 아래는 복간본 pp.8~9 의 내용이다.
우리 집 사랑은 韓日合倂 以來, 民族指導者들의 集合所이었다. 島山 安昌浩先生은 大田監獄에서 出獄 以後 나의 書齊인 二層에서 留하였고, 古堂 曺晩植先生은 十數年來 每日같이 사랑방에서 朝鮮物産奬勵會, 關西體育會, 基督靑年會, 朝鮮日報, 崇實專門中學, 崇仁學校等, 民間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家親과 의논하였다. 南岡 李昇薰先生의 遺骸問題, 殉敎者 朱基澈牧師 事件等,모두가 집 사랑에서 發生하고 의논되었다.

이러한 일로 合倂以來 家親 오윤선(吳胤善)은 民族主義者의 巨頭로 烙印찍혀 日帝의 지리한 監視下에 있었다. 中ㆍ日事變을 前後하여 종내 철저히 沈默을 지킨 古堂 曺晩植先生과 家親의 存在는 그들로서는 島山先生 別世以後 唯一의 가시였다.
基督敎徒의 神社不參拜運動도 닥전골 나의 집 사랑에서 山亭峴敎會의 信者를 中心으로 峰火가 올라 드디어 全國的인 基督敎徒의 無抵抗鬪爭으로 發展하였다.
總督府와 인연이 깊던 P 氏는 警務局長室 秘密會議에서 朝鮮軍憲兵司令官이 평양의 曺와 吳를 하루바삐 처치해 버리라는 提議를 했다는 무시무시한 事實을 알려주었다.
더구나 朝鮮軍司令官 板垣大將이 첫 巡視次 來壤하여 古堂과 家親에게 會談을 要請하였을 때, 古堂은 江西郡 斑石으로, 家親은 大同郡 古平으로 各々 避身하여 無言中 面談을 拒否하였다.

이 일이 있은 後부터 우리집 사랑에는 새 손님이 부쩍 늘었으나 先客인 高等警察과 後客인 憲兵隊員이 아침부터 욱신거리며 밤 늦도록 저희끼리 지껄이다 가는 것이다.

참고 자료

[장로] 믿음의 선진, 삼형제이야기 오윤선•오형선•오원선 장로 (2) [한국장로신문 제1607호] 2018년 8월 25일
[장로] 믿음의 선진, 삼형제이야기 오윤선•오형선•오원선 장로 (3) [한국장로신문 제1608호] 2018년 9월 1일
[장로] 믿음의 선진, 삼형제이야기 오윤선•오형선•오원선 장로 (4) [한국장로신문 제1609호] 2018년 9월 8일
[장로] 믿음의 선진, 삼형제이야기 오윤선•오형선•오원선 장로 (5) [한국장로신문 제1610호] 2018년 9월 10일
[장로] 믿음의 선진, 삼형제이야기 오윤선•오형선•오원선 장로(31) - 오형선 장로(7) [한국장로신문 제1638호] 2019년 4월 20일
[장로] 믿음의 선진, 삼형제이야기 오윤선•오형선•오원선 장로(36) - 오형선 장로(12) [한국장로신문 제1643호] 2019년 5월 25일
[장로] 믿음의 선진, 삼형제이야기 오윤선•오형선•오원선 장로(37) - 오형선 장로(13) [한국장로신문 제1644호] 2019년 6월 1일
오윤선(吳胤善:1871~1950?), 오형선(吳亨善:1875~1944), 오원선(吳元善)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