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任海)의 본명은 임길봉(任吉鳳)이며, 일본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해방 후 북조선 노동당 농민부장을 지냈다.

고준석의 친구 임해 (임길봉) 관련 자료

고준석의 친구 임해(任海)의 본명은 임길봉(任吉鳳)이며,[1] 그는 북조선 노동당 중앙당 농민부장을 지냈다.[2] 그는 일본에 있다가 해방 직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정치활동을 하다 월북했다.[3] 고준석이 1948년 4월 남북협상 취재차 평양에 갔을 때 그를 만나 북한 요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2]

p.14 : 1933년 6월 12일 오사카(大阪府)에서 전협분자(全協分子) 任吉鳳을 검거 송치함.[4]
p.25 : 任吉鳳(全協日本一般使用人組合關西支部大阪地區)
p.106 : 全協日本一般使用人組合關西支部大阪地區(1930년 2월 창립), 주요인물 任吉鳳, 조선인 15, 내지인 57; 기관지 : 一般使用人 關西版
  • 1946년 2월 21일 서울의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민전[民戰])[5] 산하 경제대책연구위원회(經濟對策 硏究委員會) 위원으로 임길봉(任吉鳳)과 고준석이 선임됨.[6][7]
한편 在日조선인으로 해방 직후 귀국한 任海(본명 任吉鳳)도 장안파와 거의 동일한 주장을 편 바 있다. 高峻石은 任海가 해방 직후 박헌영의 「8월테제」에 맞서는 「朝鮮의 獨立과 共産主義者의 緊急任務」라는 팜플렛을 썼다고 증언했다.註 010 「8월테제」에는 임해의 팜플렛을 「일본에서 나온 몇개 동지들」의 극좌적 경향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임해는 ‘독립으로 조선혁명의 현단계인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과업이 거의 완수되고 있기 때문에 이중과업의 수행, 즉 사회주의혁명의 과업을 내세우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註 010] 高峻石, 『朝鮮革命テゼ:歷史的文獻と解說』(柘植書房, 1979), p.302. 그러나 고준석은 다른 책에서 임해가 쓴 글이 「朝鮮革命의 프롤레타리아트獨裁的 性格에 對하여」였다고 기록했다(高峻石, 『朝鮮 1945~1950:革命史への證言』, 三一書房, 1972, p.69).
(4) 임길봉 = 1042 : 구좌면 행원리 출신 임길봉(任吉鳳)은 대판에서 좌익활동을 하다가 1933년 6월에 검거되어 송치되었다. (독립운동사 자료집)
(2) 고준석, 전인택 = 1049

각주

  1. 김선호, 『조선인민군 :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출판부, 2020년 03월 25일) p.178 각주 143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한 인물 중에 “임해" 라는 이름을 쓴 사람은 2명이다. 한명은 일본 출신 임해(任海)로, 본명은 임길봉이다. 그는 북조선로동당에서 농민부 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또 한명은 조선의용군 출신 임해(任海, 林海, 1900~1962)로, 본명은 주춘길(朱春吉)이며, 다른 사람이다.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서울: 선인 2005, 178쪽).
  2. 2.0 2.1 고준석(高峻石, 1910~1994) 저, 정범구 역, 《해방 1945-1950 - 공산주의 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년) pp.220~221.
  3. 朝鮮人民黨(1945~1946)의 변혁론과 사상적 지향(鄭秉峻) > Ⅰ. 해방 직후 혁명단계 논쟁과 조선인민당의 변혁노선 > 1. 해방 직후 혁명단계론의 쟁점 國史館論叢 第70輯 (국사편찬위원회, 1996-10-22)
  4. 근대사 연표 1933년 06월 12일 : 1933년 06월 12일 大阪府에서 전협 분자 任吉鳳을 검거 송치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斯界의 권위를 총망라, 民戰의 교육, 경제대책위원 자유신문 1946년 02월 26일 1 면 7단 / 斯界의 권위를 총망라, 民戰의 교육, 경제대책위원 자유신문[自由新聞] 1946년 02월 26일 - 국립중앙도서관
  7. 민전, 교육및 문화대책연구회위원과 경제대책위원회위원 선정 서울신문 1946년 02월 26일 : 高鉉錫은 자유신문 기사와 비교하면 高駿石(高峻石)의 착오로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