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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이북 정당 사회단체 명의의 1946년 1월 2일자 성명서를 보도한 1월 14일자 민성일보(民聲日報) 1면 기사.

煽動的 謀略家 排除하고

三相會議를 支持한다
北部 全革命團體 態度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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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聲明書] 朝鮮에 關한 三相會議 決定에 對하야

우리는 조선(朝鮮)에 관(關)한 소미영(蘇美英) 삼국외상(三國外相) 모스크바 會議決定에 全的으로 同意支持함을 儼然히 聲明한다. 우리는 조선(朝鮮)에 관(關)한 모스크바 會議의 決定이 朝鮮의 獨立으로서 迅速히 復興됨과 民主主義原則에서 朝鮮의 自由로운 發展 따라서 過去三十六年間 日本帝國主義 統治의 殺人的 封鎖로 惹起된 惡毒한 結果를 急速히 淸算하는에 必要한 諸提携條件과 可能性을 保障한다고 認定하는 바이다. 이 모스크바 회의의 決定에 記載된 朝鮮의 民主主義的 臨時政府의 創設은 朝鮮의 完全하고 自由로운 國家的 獨立을 達城함에 잇서 가장 重要한 出發點인 것이다. 民主主義的인 臨時政府의 創設은 現在의 南北朝鮮의 分離狀態를 撤廢할 것이며 全朝鮮地域을 統一할 것이며 따라서 産業 運輸 農業 通信事業 等을 急速히 復興發展시키며 人民生活의 幸福과 向上 또 朝鮮人民의 數千年間의 빛나는 民族文化의 復興과 發展을 爲한 諸必要條件을 創造하는 것이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김일성(金日成)
조선독립동맹 대표 김두봉(金枓奉)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북부조선총국 위원장 문창형
평남 농민위원회 위원장 이관옆
여성총동맹 위원장 박정애(朴正愛)
민주청년동맹 위원장 방수영(方壽永)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발표된 직후인 1945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벽두까지 서울에서는 좌우익이 모두 신탁통치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1946년 1월 3일을 기점으로 좌익들은 돌연 찬탁으로 돌아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좌우 대립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좌익들이 일제히 갑자기 태도를 돌변한 데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다는 주장이 많으나 명백한 근거를 제시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1월 2일에 북한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등 정당과 사회단체가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었는데, 구체적인 성명서의 내용은 위와 같다. 아마도 이남 좌익들은 이 성명서를 소련의 의사로 파악하여 1월 3일을 기점으로 태도를 돌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시없이 정당, 사회단체들이 임의로 이런 성명서를 발표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때이다.

북한에서는 이 성명서 발표직후인 1월 5일 소련군이 신탁통치 반대를 굽히지 않는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감금하고, 우파들의 정치활동을 전면금지시켰으며, 2월초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키고 3월에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사실상 분단체제를 만들었다.

p.7의 민성일보(民聲日報) 1946년 1월 14일자 1면

1월 2일에 발표한 위 성명서의 간략한 요지는 것은 1949년 북한 내무성 보안 간부학교가 간행한 『해방 후 조선』이라는 책에도 나온다. 북한서 간행한 『해방후 3년간의 국내외 중요일지(解放後 三年間의 國內外 重要日誌) - 1945.8-1948.9』등에도 성명서 발표 사실이 나오지만, 전문을 수록한 북한 문헌은 알려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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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2021년 9월 5일 (일) 12:204,116 × 5,625 (1.32 MB)JohnDoe (토론 | 기여)북한의_찬탁성명을 보도한 1946-01-14일자 민성일보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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