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1] 金鍾泌 / Kim Jong-pil | |
![]() 1999년 무렵의 김종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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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26년 1월 7일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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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일 |
2018년 6월 23일 |
사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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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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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대한민국 육군 중앙정보부 |
의원 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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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공주교육대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8기 졸업 미국 육군 보병학교 졸업 육군 보병학교 졸업 |
부모 |
김상배(부), 이정훈(모) |
배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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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1남 1녀 |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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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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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운정(雲庭; 호), JP |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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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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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기간 |
1949년 5월~1963년 1월 |
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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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 |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 과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정보처 처장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 처장 중앙정보 부장 |
근무 |
육군본부 중앙정보부 |
참전 |
김종필(金鍾泌, 1926년 1월 7일 ~ 2018년 6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1·31대 국무총리를 재임하였다.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해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는 것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9선 의원을 지내면서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었다. 본관은 김해이며 충청남도 부여 출생이다.
박정희 때 2인자로 불렸다. 2인자 위치가 늘 그렇듯이 위태로웠고 박정희 때 부정축재 이유로 자택압수 수사를 여러번 받는 등 탄압을 받기도 했다.
박정희가 3선개헌을 하자 박정희를 원망했고 섭섭하게 많이 생각했다.
박정희가 2번만 하고 다음은 자기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의 회고록을 보면 박정희에 대한 원망 평가절하하는 시선이 그대로 들어난다.
10.26이후에는 당시 공화당 총재였는데 유신을 부정하고 김영삼 김대중처럼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본인의 집권욕에 사로잡혀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한다. 김종필 때문에 이때 여당인 공화당은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죽는다.
이후 5공 세력들에게 유신의 순장조로 부정축재 등의 혐의로 재산(서산농장, 제주도 감귤 밭 등) 을 뺏긴다.(이때 유신의 순장조는 이후락, 김종필, 박종철이었다. 박종철은 전두환과도 개인적인 사이가 매우 깊어서 전두환은 박종철까지 건드려야 하나 했지만 박종철까지 부정축재자로 보냈다.)
3당합당에 참여했다가, 김영삼에게 민정당 계열과 함께 팽당한다.
dj, jp연합으로 김대중정권에 부역하기도 했다.
거의 충청도 정당인 자민련이 총재로 충청도의 대부로 오랫동안 군림했다.
혁명의 중요한 설계자였고, 박정희 때 탄압도 많이 받았고, 본인의 집권욕도 있었지만, 박정희와 개인적인 그런 섭섭함을 떠나서,
10.26 때 유신을 부정하지 않고, 본인이 책임지겠다는 자세로 나갔다면 이후 현대사와 공화당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김종필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각주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위원장 |
초대 장면 |
시국정화본부 본부장 |
초대 이귀영 |
중앙정보부장 (1961~1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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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기획부장 (1981~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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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장 (1999~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