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 |
기본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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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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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 |
추축국 |
지휘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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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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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사망 1,600만 명 이상 민간인 사망 4,500만 명 이상 총 6,100만 명 이상 사망 그 외. |
군인 사망 800만 명 이상 민간인 사망 400만 명 이상 총 1,200만 명 이상 사망 그 외. |
第2次世界大戰
영어: Second World War, World War II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치러진 전쟁이다. 유럽에 전체주의가 휩쓴 시기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2]와 재산 피해[3]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다.
1차세계대전은 승전국으로 도약한 일본등 전세계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전장터는 거진 유럽대륙에 국한 되었지만, 2차세계대전 태평양 필리핀 등에서도 전쟁이 벌어졌고, 경우에 따라서 중일전쟁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기에 유럽대륙을 넘어 아시아 아프리카 등 까지 전장이 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정말 세계구급 전쟁이었다.
현재의 세계질서의 많은 부분이 이 전쟁의 결과이다. 미국이 영국을 넘어 기축통화국 세계최강국이 되었고,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이 패망하였다. 대한민국 또한 2차세계대전의 결과로 독립하였고 분단된 나라이다.
유엔 또한 이 전쟁에 결과로 생겨났다. 유엔 자체가 연합국이 모체이고, 초기 상임이사국도 2차세계대전의 주요 승전국들이다.(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
추축국이 왜 패배했는가?
이탈리아 왕국이 독단적으로 그리스 침공을 벌였다가 패퇴하자 발칸 반도에 대한 연합군의 상륙을 우려한 독일이 발칸 반도를 제압하는 1개월 동안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지연이 2달 가량 지연된 것이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었다.
2015년부터 나무위키의 좌편향된 선동에 의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지게 된 원인은 특정 국가의 시스템이 독일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착각을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 자들은 독일이 유럽 대륙의 절반만을 가지고 유라시아 대륙 전체와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상대로 싸웠기 때문임을 망각하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다. 어차피 아무 권위도 없는 좌편향 나무위키가 뭐라 하든 말든 해외 선진국들과 강대국들에서는 독일의 시스템이 인류 역사상 가장 극한으로 국력을 뽑아 쓸 수 있는 시스템이었음이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자명한 상황이다.
이탈리아 왕국과 일본 제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보다 체급이 많이 낮았다. 제1차세계대전만 해도 프랑스와 영국은 거대한 식민제국이었고 여기에 러시아 제국과 미국이 독일을 공격했는데 독일의 동맹은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었으니 사실상 국토, 인구 등을 종합한 체급 차이를 비율로 환산하자면 4대2 정도였다. 2차세계대전은 독일 혼자 수십개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수십개 유럽 국가들을 정복하고 영국 하나만 남겨둔 상황이었으며, 미국의 개입 없이 독일과 소련이 전쟁을 벌인다면 소련은 말 그대로 멸망할 상황이었다.
소련은 소련의 국력으로 버텨낸 것이 아니라 날씨와 운, 그리고 미국의 지원으로 버텨냈다. 2차세계대전 개전 당시부터 독일에게 순식간에 정복당한 폴란드, 프랑스만 해도 독일 인구의 2배에 달했다.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이 독일을 상대로 반격해서 개전 이전의 소련 국경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말 그대로 성공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에 소련은 미국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인구는 6,000만이었고 미국의 인구는 1억 3,600만에 달했으며 소련의 인구는 1억 5,000만이었으며 여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인구까지 포함하면 4억 정도 되었는데 독일은 인구 6,000만으로 4억 인구에 6년간 맞서 유럽 대륙을 정복했다.
독일의 총력전 선포는 1943년부터였던 반면 영국과 소련은 1941년부터 총력전을 선포했음에도 미국의 도움 없이 혼자서 독일을 제압할 능력은 말 그대로 전혀 없었다. 전세를 역전시킨 것은 오직 미국의 렌드리스를 통한 막대한 물자 지원 때문이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가 패망했고, 소련의 공식적인 계승국이자 통계상 세계 군사력 순위 2위라며 오만하던 러시아는 미국의 렌드리스 지원 없이 2022년에 통계상 세계 군사력 순위 22위였던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전쟁 개시 2년 뒤인 2024년에는 우크라이나 육군의 러시아 본토 진격까지 허용해주고 말았다.
물량 좋아하던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게 패망하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하나도 못 밀어서 본토 역공 당하고 패망하고 있다. 물량이 질보다 강하다 어쩌구 하던 앵무새같은 헛소리들은 더이상 가치가 없음이 직접 눈앞에까지 현재진행형으로 입증되고 있다. 북중러와는 달리 미국은 독일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이미 군대의 경량화와 소수정예화를 동시에 진행한 지 오래이다.
히틀러는 1941년에 소련을 침공하면서 소련 따위를 정복하는데 독일 국민들의 복지 예산을 줄이고 총력전을 선포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1941년에 총력전 선포를 하지 않는다고 직접 지시한 바 있다. 따라서 독일의 총력전 선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후인 1943년 초로 미루어졌다. 역사를 판단하려면 기본기에 충실해야 하며 다양한 관점을 알아야 한다. 애시당초 미국이 왜 2차세계대전 이후 점점 양보다 질에 집중하게 되었을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역사적 사실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크라이나에서 현실로 논파당하는 중인 저질 선전가들의 백면서생같은 이론들만 시대가 바뀌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따라해서 나열하는 저능아 같은 앵무새들과는 대화할 가치가 매우 낮을 것이다.
독소전쟁 초반에 곡창지대였던 우크라이나를 잃었던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필요한 식량을 자급할 능력이 없었고 이를 구해낸 것은 오직 미국의 렌드리스 긴급 식량 지원이었다. 미국은 소련군에게 무전기 300만개와 두돈반 트럭 50만대와 군용기 기술과 1만여 대에 달하는 군용기들을 지원해 주어 구시대적이었던 소련군을 제병협동과 기동전이 가능한 신식 군대로 탈바꿈시켜주었다. 미국의 렌드리스 물자 지원 이전의 소련군은 제병협동과 기동전 자체가 불가능하여 소련군이 독일군보다 숫적으로 훨씬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과 맞서면 일방적인 교환비로 분쇄당하기 일쑤였다.
미국이 독일과 1대1로 붙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독일은 항상 수십개국의 작은 적대국들과 3개 이상의 열강국들을 상대로 사실상 혼자서 대부분의 승리를 기록했다. 독일과 1대1로 붙었던 나라들 중에 독일에게 정복되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결국 미국은 그저 지리상의 이점을 이용해서 어부지리를 했을 뿐 특별히 고평가 할 것도 없고 독일을 1대1로 이겨본 적도 없다. 이는 미국의 렌드리스 지원 덕분에 멸망의 운명을 넘기고 대부분의 희생을 대신해준 소련도 마찬가지이고 미국의 유럽 핵심 전진기지이자 첩보기지 역할을 해준 영국도 마찬가지이다.
사망자의 수
독소전쟁의 소련군 사망자는 1,300만이며 소련 파르티잔/민간인 사망자는 1,700만~2,700만으로 총 3,000만~4,000만에 달하는 반면 독일의 동부전선 사망자는 군인 300만, 민간인 200만으로 총 500만도 되지 않았다.
추축국이 2차세계대전을 승전할 방법은?
전쟁에서 생산 효율의 최적화도 유의미한 요소이지만 본토의 인구가 매우 작은 독일이라는 나라가 전략의 실패를 만회하게 해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1941년 당시 독일은 세계 최강국이었지만 세계 최대국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련에 대한 완벽한 정찰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1941년에 소련을 끝낸다는 계산에 올인하여 동계 장비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총력전을 선포하지도 않고 독소전쟁을 개시한 독일에게는 미국의 렌드리스 물자 지원이 소련에 유입되기 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도박을 벌여 빠르게 승리로 마무리짓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 모든 것을 베팅한 독일은 가을에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격했으나 1주일 만에 진흙탕 시즌(라스푸티차)가 찾아오며 진격이 정지되었고 겨울이 다가오며 땅이 얼어붙기 시작하여 재차 진격을 시작하였으나 재공세 시작 1주일만에 영하 40도에 달하는 북극 한파가 시작되어버리는 완전히 배제했었던 변수를 맞아 방한 참호를 팔 수도, 진격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모든 판돈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독소전쟁을 깔끔하게 승리로 마무리지을 절호의 기회까지 놓쳐버리고 말았다.
당시 키예프 점령이 늦어져서 모스크바 공격 직전이었던 중부집단군의 구데리안 기갑집단을 남하하게 하였기 때문에 라스푸티차를 대비해야 했다. 중부집단군이 라스푸티차 시즌에 억지로 진격하는 대신 방한 참호들을 미리 건설하고 겨울 내내 방어하는 결단을 내리도록 했다면, 자연재해를 원인으로 50만여 명의 손실을 입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후 이 병력을 계속 활용하여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등의 주요한 전략 목표들을 향한 재차 공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며, 수백만 명의 소련군 병력을 더 섬멸함으로서 소련의 전선을 붕괴시키고 소련 인구를 완전히 말살시켜 버리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차선책인 총력전 전략은 1941년에 레닌그라드나 세바스토폴을 주변 지역까지 완전히 포위하고 세바스토폴과 레닌그라드 순서대로 함락시켜야 더 빠른 총력전 선포나 생산 효율의 최적화로 승전을 노려볼 수 있었을 것이지만, 모스크바를 일거에 함락시킬 수 있었던 전격전 전략보다는 비효율적이었다. 총력전 전략에서 독일이 완전한 승리를 거두려면 대서양 전투가 가장 중요했는데, 대서양 전투에서 미국의 렌드리스 보급선들을 모두 끊어버리기에는 독일의 잠수함 수량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단숨에 모스크바를 포위섬멸해버리는 전격전 전략이 최선책이었다.
독일이 원래 계획대로 1941년 4월 말이나 5월 초에 소련으로 진격했다면, 이미 키예프의 소련 남부전선군을 섬멸하고 모스크바를 포위섬멸할 시간과 병력 모두 충분했다. 소련이 좀 더 경계하고 있다고 해도 소련은 이미 대숙청으로 유능한 소련군 장교들을 스스로 모두 제거해버렸고 현역 예비대는 싹 다 국경에 일렬로 세워놔서 경계를 더 하건 말건 독일 앞에 똑같은 먹잇감에 불과했기 때문에 모스크바 점령과 스탈린 제거는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것. 바르바로사 작전과 독소전쟁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야전원수나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의 회고록대로 여러모로 독일의 2차세계대전 승전이 임박했던 아쉬움이 남는 작전이자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