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소련 연해주의 라즈돌노예 마을에서 태어났다. 생가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어 한국인 연해주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1942년 2월 16일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는 북한의 주장은 완전한 날조이다. 김정일의 출생은 백두산과 아무 관계도 없으며 '백두혈통'이란 말도 아무 근거없이 지어낸 것이다.

지도에서 찾기

김일성 부부는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 국경을 불법 월경, 소련으로 도주하였다.[1][2] 월경 직후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얼마간 감옥에 있다가 1941년 1월 초부터 우수리스크 인근 라즈돌노예 마을(당시 지명 하마탄)의 남야영(南野營, B 야영)에 머물렀다.[3][4] 장남 김정일도 1941년 2월 16일 여기서 태어났다.[5][6] 1942년 7월 중순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 70 km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의 뱌츠코예 마을에 있던 북야영(北野營, A 야영)에 88여단이 창설되면서 김일성 가족은 남야영을 떠나 뱌츠코예로 이주하여 해방될 때까지 88여단에 머물렀다.[7] 한국 학계에서는 김정일이 뱌츠코예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이 많으나[8] 이것도 사실이 아니며, 뱌츠코예는 출생지가 아니라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라즈돌노예의 김정일 생가는 현지인들이 잘 알고 있고,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학계나 언론에서도 북한의 눈치를 보는지 외면하고 있다.

라즈돌노예 기차역에서 큰 길(Ulitsa Lazo)을 따라 동쪽으로 800 m 정도 가서 북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서면 바로 나옴.
러시아 연해주(Primorskiy kray) 라즈돌노예(Razdol'noye) 라조 가(Ulitsa Lazo : Lazo St.) 88번지
골목 초입에서 바라본 구글 스트리트 뷰
골목길 왼편에 보이는 건물 중 안쪽이 88번지임.

생가 사진

1941년 2월 16일 김정일이 태어난 아래 사진의 건물은 김일성이 태어나던 해인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9] 아래 사진을 클릭한 후 나오는 이미지를 클릭 후 다시 클릭하면 가장 크게 확대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관광객들이 올린 김정일 생가 사진

[모란봉 클럽 197회] 김정일 백두산 생가는 모두 거짓? '생가 초소 근무' 강정철의 증언 TVCHOSUN, 2019. 7. 21. : dailymotion
조작된 김정일의 탄생..? 多 우상화의 허점 tv.kakao 에서 보기

구글 맵 건물 이미지

구글 맵에도 김정일 생가 건물 사진이 많이 올라 있고, 일부에는 김정일이 태어난 집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김정일 출생지와 생가에 대한 고증

일본군의 토벌에 쫓기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전투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불과 수명의 인원과 아내 김정숙(金正淑, 1917~1949)을 데리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 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한다.[1][2] 월경 직후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제2로군 총사령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난다. 소련으로 도피한 동북항일연군 인원들은 우수리스크 인근 라즈돌노예 (당시 지명 하마탄)의 남야영(南野營, Южный лагерь, B 야영)과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의 북야영(北野營, Северный лагерь, A 야영)에 수용된다.[5][12]

남야영(南野营)은 블라디보스톡(海参崴)과 우수리스크(雙城子) 사이에 있는 작은 기차역(小火车站) 부근의 현지인들이 하마탕(蛤蟆塘)이라 부르는 곳에 위치했다. (南野营位于海参崴与双城子之间的一个小火车站附近,当地人称蛤蟆塘。/ 南野營位于海參崴與雙城子之間的一个小火車站附近,當地人稱蛤蟆塘。)[12]

김일성 부부는 1941년 1월부터 남야영에 수용되어 머물다 1942년 7월 뱌츠코예의 북야영에 88여단이 창설되면서 그곳으로 이주한다. 따라서 1941년 2월 16일 태어난 김정일의 출생지는 남야영이 있던 하마탄(라즈돌노예)이다.

《주보중전(周保中傳)》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13]

항일연군(抗日聯軍) 대원들은 임시로 설치된 남북야영(南北野營)에 갈라져 주둔하고 있었다. 북야영(北野營, A야영)은 하바로프스크 북방(北方) 75㎞ 떨어진 흑룡강변(黑龍江邊, 아무르강변) 비야츠크(中國名 費雅斯克)란 마을에 설치했으며 한인(韓人)으로서는 강신태(姜信太, 강건)·이경호(李京鎬) 등이 여기에 배치되어 임시당부(臨時黨部)의 서기(書記)와 선전위원(宣傳委員)을 맡고 있었다.[註 022] 한편 남야영(南野營, B야영)은 울라지오스토크(블라디보스토크)와 울라스노프(보로실로프, 지금의 우스리스크, 中國名 雙城子) 사이의 작은 기차역 부근 하마탄(蛤螞塘)이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일성(金日成)·안길(安吉)·박덕산(朴德山, 김일[金一])·김윤호(金潤浩)·최현(崔賢) 등 한인(韓人)들도 군(軍) 및 당부(黨部)의 요직을 내정(內定)받고 있었다.[註 023]

[註 022] 劉文新·李毓卿, 《周保中傳》(哈爾濱:黑龍江人民出版社, 1986) p.266
[註 023] 위와 같음.

중국어 위키백과에도 남야영은 하마탄(라즈돌노예)에 있었다고 나오는데, 이는 소련군 88여단 출신 중국인들의 증언을 근거로 한 것이며, 중국인들의 상식을 반영하고 있다.

东北抗日联军- 维基百科
1940年底,退入蘇聯境內的抗聯部隊(主要是冬季被日滿軍隊循雪地腳印追繳無法立足的抗聯第2路軍部隊),駐紮在伯力市東北75公里的維亞茨科耶村以南的黑龍江邊的森林野營地。稱之為北野營,約300人。在海參崴與雙城子之間的一個小火車站(華人稱蛤蟆塘)設有南野營,近200人。
1942年夏,周保中等抗聯領導人下決心要為野營人員制定長期的訓練計劃,將南野營(位於濱海邊疆區雙城子的蛤蟆塘)的抗聯人員(主要是抗聯第1路軍)全部集中到北野營來,組建一個教導團,並聘請蘇聯人充任教官,而行政管理工作與中共黨的組織系統則由抗聯人員自己負責。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더불어 8권》에는 남야영은 보로실로프(현 우수리스크) 근처에 만들어진 임시기지로 동편에 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톡 간의 철길이 지나고 조그만 기차역이 있다고 했다.[14] 이로보아 남야영은 라즈돌노예역 서편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남야영의 위치에 대한 보다 자세한 고증은 아래를 참고하라.

김일성은 1941년 1월부터 남야영에 머물다 1942년 7월 중순 북야영에 동북항일연군 인원 대다수를 수용한 88여단이 창설되면서 뱌츠코예로 이주하여[15] 해방될 때까지 88여단에 있었다.[7]

김정일이 백두산이 아니라 남야영이 있던 라즈돌노예에서 태에났다는 증거는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8권 (계승본, 영문판)에 나오는 사진이다. 김일성 자필로 1941년 3월 1일 B 야영(남야영)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써 놓았다. 김일성 부부가 3월 1일에 남야영(B야영)에 있었다면 2월 16에 백두산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

1941년 남야영의 김일성-김정숙 부부. 오른쪽 맨 앞의 비스듬히 누운 사람이 김일성이고, 앞줄 여자 4명은 오른쪽에서부터 첫번째가 이영숙(李英淑, 第七军战士)[17], 두번째가 김정숙(金貞淑, 1917 ~ 1949), 세번째가 황순희(黃順姬, 1919 ~ ), 네번째가 김철호(崔賢의 처)이다. 셋째줄 맨 오른쪽에 앉아있는 모자쓰고 콧수염 기른 사람이 시세영(柴世榮)이다.

김정일이 북한 주장대로 1941년이 아닌 1942년 2월 16일생이라 해도 1942년 1월에 김일성이 여전히 남야영에 있었다는 증거 기록이 있다. 주보중(周保中)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에는 그가 뱌츠코예 마을의 북야영(A 야영)에서 1942년 1월 12일부터 1월 19일까지 남야영을 방문하고 돌아온 일을 기록하면서 거기서 김일성도 만났다고 하였다.[18] 1월에 남야영(라즈돌노예)에 있다가 2월에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애기 낳으러 눈덮인 백두산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식 밖일 뿐만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자라도 불가능하다. 설사 김정일이 1942년 생이라도 백두산이나, 뱌츠코예 아닌 라즈돌노예에서 태어난 것은 변함없다.

이처럼 김정일이 남야영(라즈놀노예)에서 태어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태어난 집이 라즈돌노예 88번지라고 특정해준 사람은 김정숙의 출산 당시 아기를 받은 조산원 엘냐이다. 김영삼 정권 시절 안기부 직원이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조산원 엘냐를 찾아가서 증언을 듣고 현지 확인을 하고 왔다고 한다.[19][20] 그러나 통일부나 안기부에서는 북한의 눈치를 보아서인지 이에 대한 어떠한 공식적인 설명도 내놓은 바가 없다. 다만 라즈돌노예 현지 사람들은 김정일의 생가를 잘 알고 있고, 많은 한인 연해주 관광객들도 그곳을 찾는다고 한다. 인터넷에 관광 다녀온 사람들이 올린 사진도 다수 있다.

아나톨리 李, 《진짜 김정일이 태어난 곳》

아나톨리 李는 연해주 고려인으로 안기부 직원이 김정일이 출생할 때 아기를 받은 조산원 엘냐의 증언을 듣고 김정일 생가를 현지 확인할 당시 안내한 사람이다.[20]

한국의 정보당국은 1993년 아나톨리 李(러시아명)의 도움을 받아 김정숙(김정일의 어머니)의 출산을 도운 조산원 엘냐를 찾아냈다. 아나톨리 이는 국내 대학을 나온 뒤 러시아 하바롭스크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그는 필자(황호택)와의 통화에서 “정보요원 두 명과 함께 당시 68세였던 엘냐를 만나 증언을 녹취했다”고 말했다. 엘냐는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래 글은 아나톨리 리가 김정일의 생가와 관련해 작성한 글을 국제농업개발원 원장 이병화(李秉華)가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홈페이지의 "통일발언대"에 전재한 것이다.

-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통일발언대 2009년 12월 29일
진짜 김정일이 태어난 곳 : 아나톨리 李 (2009. 12.28.) : 같은 글이나 생가 건물 사진 있음.
  《진짜 김정일이 태어난 곳》

글쓴이 : 아나톨리 李 (2009. 12.28.); 옮긴이 : (재)국제농업개발원 원장 이병화(李秉華)

1993년 2월 26일, 필자는 하바로브스크 고려인 ‘孫알렉산드르 미카일로비치’(이하 ‘孫아바이’) 집에서 전날에 있었던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방송을 보고 기겁하듯 놀랬다. “... 혈맹보다 민족을 우선하고 가진 자에게 고통을 주겠다...”라는 연설을 듣고 흥분하여 보드카를 병체로 마시고 눈밭으로 뛰어나간 지 만 하루 만에 뒷뜰의 좁은 사우나 방에서 깨어났다. 한국말과 일본말이 유창한 ‘에브게니야’(孫아바이 부인)에게 내가 실수한 것이 없느냐는 질문에 “이제 한국은 망했다. 혈맹인 미국보다 김일성과 손잡고, 현대 정주영 회장한테 골탕 좀 먹었다고 있는 사람 재산 다 뺏겠다고 하니 대통령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연설문을 써준 놈은 보나마나 빨갱이다.”라면서 길길이 뛰고 생난리를 부리면서 보드카를 3병이나 더 마시고는 눈 속에 엎어지길래 큰 아이 샤샤가 업어다 사우나 방에 눕혔다고 했다.

참으로 야속했다. 믿었던 YS께서 그렇게 황당한 연설을 할 줄 꿈에도 몰랐다. 우연일까? 그날 오후 중앙정보부 6국장 출신인 許모 국장의 국제전화를 받았다. 許모 국장은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방송’과 관련해서 전직동료들이 같이 모여 의논한 결과 “김일성과 김정일의 실체를 빨리 밝히지 않으면 세월을 놓칠 것 같아 모레쯤 사람을 보낼 테니 협조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후 필자에게 찾아온 사람은 현직 요원이었고, 그가 가지고 온 문건은 연해주 나데진스키郡 라즈돌리네邑 라즈돌리네 마을길 88번지(2층 빨간벽돌집) 주소와 라즈돌리네邑 뽀브브카 마을에 거주하는 ‘엘냐’(당시 68세)라는 여자조산원을 찾는 것이었다.

※ 라즈돌리네 88번지

라즈돌리네 지역은 우수리스크로 가는 길목이라 필자가 평소 다니던 길이고, 또한 북한으로 내려가는 철길과 도로의 초입이었고, 1937년 9월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할 때 가장 많은 고려인들이 실려 나갔던 역사적인 곳이라서 주민들 중에는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마침 그곳의 가장 큰 ‘소프호즈’ 농장장인 ‘안드레이 게나지’의 동생이 읍장으로 재직하고 있어 한국식의 호적등제부를 보고 금방 ‘엘냐’라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이하의 내용은 ‘엘냐’의 증언을 요원이 녹취한 것이다.

『그날(1941년 2월 16일) 새벽쯤 얼굴색이 노란 젊은 동양사람 두 명이 아기를 받아달라고 황급히 찾아왔고, 그들과 함께 약4km 눈길 속을 걸었다ㆍ업혔다 하며 겨우 산모가 있는 곳까지 왔다. 당시 나는 간호양성학교를 막 졸업한 17살의 처녀이고, 조산원 면허취득 후 3번째 받는 아기가 동양사람 아기라서 기억이 또렸했다. 그때 나는 조산원 경험이 부족하여 아기의 탯줄을 길게 잘랐는데, 3년후 하바로브스크에서 아기를 만났을 때 배꼽이 남자의 그것처럼 튀어나와 아기엄마와 같이 웃었다.』라고 진술했다.

또 계속하여 그녀는 말하기를 『라즈돌리네 88번지 2층 벽돌집 동쪽 문 2층 첫째 방에서 아기를 받았는데, 산모(김정숙)와 일행들은 중국 동북에서 건너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으며, 조산원인 나를 옆에서 보조한 사람은 김애순(여자 통신병)이었는데, 산모에게 언니라고 불렸다. 아기 아버지(김일성)는 추운 날씨에 먼 길을 와주었다고 털목도리를 선물로 주었는데, 아기엄마가 짠 것이라고 하였고, 아기 아빠는 내가 반할 정도로 잘생긴 미남이었다』라고 했다.

그 이후 엘냐는 큰 길 옆에 있는 빨간 벽돌집 앞으로 몇 차례 지나 다니면서 잠깐씩 들려 아기를 보살펴주었고, 조산원에서 가져온 아기 우유와 산모용 영양제도 주었다고 했다. 그 해 6월 그곳을 지나니 항일독립군 대장인 아기아빠와 일행들이 사라져버려 그 집에 입주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어느 날 밤에 몽땅 기차를 타고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1년 반 후 하바로브스크 동북쪽 아무르강 하구인 강변도시 ‘비야츠코예’가 주소로 된 김정숙의 편지가 왔는데, “아기는 잘 자라고 있으며 그들은 그때 빨치산스키로 옮겨 몇 달 생활하다가 이곳 ‘비야츠코예’로 왔다면서 혹시 하바로브스크에 오는 걸음이 있으면 꼭 찾아달라”고 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그 후 ‘엘냐’는 수석 조산원 연수차 하바로브스크 의과대학에 머물면서 김정숙과 아기를 만나러 73km 떨어진 ‘비야츠코예’로 가서 3년 만에 만나니 아기엄마는 얼마 전에 둘째 아들을 낳았다면서 다음에는 딸을 낳겠다고 웃으며 말했다고 했고, 그때 마당에서는 유라(정일)와 또 다른 동생(42년생으로 김애순의 아들)이 같이 놀고 있더라고 했다.

우리측 요원이 김애순에 대하여 기억나는 대로 설명해 달라는 주문에 그녀는 “유라가 김정숙의 뱃속에서 나올 때 바로 옆에서 도와주었던 여자가 바로 그 사람이고, 그녀가 낳은 아기의 아버지가 김일성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라고 했다.

엘냐의 진술은 이상으로 끝났는데, 집 앞에서 헤어지는 필자에게 귓속말로 그녀는 ‘비야츠코예’ 주둔 독립군 부대 이름이 유라(김정일)가 태어난 집 번지와 같다면서 당신이 연구해볼 과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 「비야츠코예」 88여단

필자가 하바로브스크에 갈 때마다 들려 안부를 전하곤 하는 고려인 ‘孫아바이’ 노인은 극동러시아 내에서 고려인들중 가장 마당발이다. 그의 외아들은 필자가 1991년 비야츠코예를 찾아갈 때 위험지역이라면서 자진하여 안내를 했는데 당시 극동관구 소속 KGB 소좌였고, 큰 사위는 북한임업대표부와 공동으로 투자하여 제재소를 운영하는 사업주였고, 둘째 사위는 국경수비대 고급 무장경찰이다. 또 둘째 사위의 아버지인 사돈 ‘金에릭’은 임업대표부와 공동으로 하바로브스크 시내에 「평양식당」을 운영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밀양孫氏 후예인 ‘孫아바이’는 여간 비중 높은 정보도 쉽게 찾아주었다.

다음은 ‘孫아바이’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이다.

(1) 김애순(김일성의 사실상 두번째 부인)이 나은 김정일의 이복동생은 훗날 김일성의 혁명동지인 崔모라는 사람 밑으로 양자로 들어갔는데, 어릴 때 김정일이 던진 돌에 맞은 후유증으로 약간 머저리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1960년대 이후의 정보는 없다고 했고,

(2) 1942년 여름 항일유격대장 周保中 부대밑으로 연해주 남야영지의 라즈돌리네팀과 빨치산스키팀, 아무르강 타라바로프섬(2007년 중국에 반환된 지역) 유격대 등 팀 4~5개 조직들이 집결했다. 스탈린 정권은 주보중에게 북야영지인 ‘비야츠코예’에서 더 크게 활동할 수 있도록 기지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때 새로운 부대 이름을 8월에 뭉쳤다고, 주보중 부대원의 숫자가 제인 많은 80명이라서, 등등으로 8자(중국에서는 복과 돈이 들어온다는 숫자이고 발음도 같음)를 붙이기로 했는데, 당시 재롱떠는 아기는 김정일이 유일했고, 88번지에서 태어난 것을 축복하는 뜻에서 88이라고 주보중이 정했음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이 부대가 바로 88여단이다.


필자는 김애순과 김정일과의 관계되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 기회가 되는대로 공개할 것이다.

한국에는 김정일이 태어난 곳을 사실대로 명기한 곳은 鳥頭山 전망대 통일각뿐이고, 친북, 좌ㆍ빨 뿐만 아니라 북한학을 전공하는 학자들도 이것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제발 공부 좀 하라고 충고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통일발언대 : 진짜 김정일이 태어난 곳 작성자 이병화, 2009.12.29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주간이 김정일의 생가를 답사하고 쓴 칼럼

아래는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주간이 2015년 7월 라즈돌노예의 김정일 생가를 답사하고 와서 쓴 칼럼이다.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주간이 김정일의 실제 출생지를 답사하고 쓴 2015-08-05 일자 30면의 칼럼.[20]

88여단 명칭과 라즈돌노예 88번지의 관계는?

위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주간의 글에서 김정일이 태어난 곳이 88여단이 있던 곳인 것처럼 말한 것은 틀렸다. 김정일은 88여단이 1942년 7월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에 창설되기 이전 김일성 부부가 라즈돌노예의 남야영에 머물던 때인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 또 황호택 논설주간은 88여단의 명칭이 김정일이 태어난 라즈돌노예 88번지 주소에서 따온 것처럼 말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2015년부터는 김정일의 생가가 ‘오케안스카야’가 아니라 ‘라즈돌노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당시 동아일보의 황호택 기자는 라즈돌노예를 방문했고, 현지인들이 ‘김정일이 태어난 집’까지 보여주었다고 기사에 썼다. 기사에는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중국인 저우바오중은 여느 중국인들처럼 ‘8자’를 좋아했고, 부대 안에서 유일한 신생아인 김정일이 라즈돌리네(‘라즈돌노예’의 오기) 마을길 88번지에서 태어난 것을 축복하는 뜻에서 88여단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동아일보 2015년 8월 5일 자 30면)라고 서술돼 있다.
위 기사처럼 김정일의 고향이 라즈돌노예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우선 몇 가지 가설과 맞지 않는 사실이 존재한다. 우선, 88여단의 번호는 여단장이 지어준 것이 아니다. 88여단장 저우바오중에게는 여단명을 붙일 권한 자체가 없었다. 88여단의 번호를 지어준 사람은 소련 국방인민위원 보좌이자 붉은육군 무력 형성·성원 배치 총국장이었던 예핌 샤덴코 1급 군사위원이었다. 즉 88여단이란 이름은 소련군 중앙사령부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당시 소련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있었던 제88독립보병여단이 해산되자, 샤덴코가 비워진 번호를 새로운 부대에 붙인 것이다.

째르치즈스키는 88여단 명칭이 라즈돌노예 88번지에서 따온 것이 아니므로 김정일의 출생지가 라즈돌노예라는 것은 믿을만하지 않으며, 실제 출생지는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오케안스카야인 것으로 본다.

아나톨리 리의 글에 보면 조산원 엘냐는 88여단의 명칭과 라즈돌노예 88번지 주소의 숫자가 같은 점에 대해 연구해보라고만 말했을 뿐, 88번지 주소에서 88여단 명칭을 따온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이기는 하다. 다른 인물 손 아바이는 88여단 명칭이 88번지 주소에서 따 온 것으로 말했다.

조산원 엘냐나 손 아바이는 88여단의 명칭 유래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운 사람들이므로 이에 대해 잘못 알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김정일의 출생지가 라즈돌노예 88번지라는 엘냐의 증언이 틀렸다는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말한 88여단 명칭 유래가 맞는지 틀린지 보다는 김정일이 태어난 라즈돌노예 88번지 주소와 88여단의 숫자가 같고 이를 조산원 엘냐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산원 엘냐가 이 두 숫자가 같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면 이는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김정일의 생가 번지수 88이 정확하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지명의 변천사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 Razdol'noye)는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나데즈딘스키 군에 속하는 마을인데, 김정일이 태어날 당시의 이름은 하마탄(Хаматан, Hamatan, 蛤蟆塘)이었다.[23][5][12][24] 라즈돌노예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수리스크로 가는 도로와 북한 쪽에서 올라오는 도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교통의 요지이다.

우수리스크도 1957년부터 쓰이는 지명이며, 김정일 출생 당시는 보로실로프( Вороши́лов, Voroshilov, 1935~1957년)로 불렸는데, 국방상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의 이름에서 따 왔다. 남야영을 B 야영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은 Вороши́лов의 B 를 딴 것이다. (러시아어 B 는 영어의 V에 해당함.) 뱌츠코예(Вя́тское, Vyatskoye)의 북야영을 A 야영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을 지나는 아무르(Амур, Amur)강의 첫 글자에서 딴 것이다.

아래는 일본군이 그린 1937년 우수리 지방 지도이다. 하마탄, 오케안스카야 등이 나온다.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4390700、密大日記 第12冊 昭和12年(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南部鳥蘇里地方要図提出の件
p.10 : 하마탄(蛤蟆塘)이 나오는데, 오늘날의 라즈돌노예이다.
p.11 : 블라디보스톡 조금 위쪽에 오케안스카야(オケヤンスカヤ)도 나온다.

김정일 생가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이 살던 집

스탈린이 1937년 연해주의 한인들 지도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20만을 기차에 태워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킬 때 출발역이 라즈돌노예 역이다[25].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사람들은 1/3 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첫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김정일이 태어난 집은 강제이주 당한 한인들이 남긴 빈집으로, 1940년말부터 소련으로 도주해온 동북항일연군 간부들 숙소로 이용되었다. 김일성 부부도 이런 집에 들어가 살며 김정일을 낳은 것이다. 김일성 일족은 연해주 한인들이 당한 비극의 수혜자라 할 수 있다.

김일성 주거지는, 1937년 연해주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후 빈집이 된 것을 1938년부터 소련군 장교 숙소로 이용했다고 한다. 인근 지역 택시 기사들은 ‘김일성 집’이라고 하면 주소를 보지도 않고 ‘아, 거기라면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두말 없이 데려다 준단다. 택시기사 뿐 아니라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한다.
혈통 세탁을 해야 하는 북한 권력 입장에서는 이곳의 흔적을 지우고 싶겠지만 다른 나라라 쉽지가 않고, 그냥 두고 있는 상태에서는 점점 소문이 퍼질 수 밖에 없으니 눈에 가시처럼 여길 수 있겠거니 싶다.

김정일 출생지에 관한 다른 주장들

김정일의 진짜 출생지는 위에서 본 대로 라즈돌노예가 정확하지만, 지금까지 여러 가지 설이 있어왔다. 한국학계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백두산 밀영설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88여단이 있던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다수이다.[8] 소련(러시아)에서도 하바로프스크 출생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26]

러시아의 진보적 주간지 지구의 메아리 는 92년 8월호 기사에서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출생했다는 북한의 주장을 다음과같이 꼬집고 있다. "권력승계를 위해 신화가 필요했던 김정일은 실제 하바로프스크의 한 마을에서 출생했으나 이듬해 백두산에서 다시 한번 출생해야만 했다 . "

김정일이 하바로프스크 또는 그 인근 뱌츠코예 마을 출생이라는 설은 해방전 김일성이 소속되었던 88여단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88여단은 김정일 출생 후인 1942년 7월 창설되었으며, 그 이전에 김일성은 라즈돌노예의 남야영에 있었으므로 이 설은 사실이 아니다.

이 외에도 다소 엉뚱하지만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가 김정일 출생지라는 주장도 있다.[27]

셋째는 사마르칸트설이다. 이것은 1975년 오기완이 월간 『북한』에 실린 자신의 “김정일 이야기”란 글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연락부소속의 초대소에서 일했던 할머니로부터 들은 정보를 토대로 제기한 주장이다.[28] 대중적으로는 중국이 1980년에 『역대국제인물사전』에서 김정일의 출생지를 사마르칸트로 기록하고, 1994년에 『각국개황』에서 같은 사실을 실으면서 알려졌다.14) 현재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고 인용빈도도 낮다.

14) 김동규,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 강성윤 외, 『북한정치의 이해』 (서울: 을유문화사, 2001), pp. 177~178 참조. 사마르칸트설을 주장하는 견해로 김태서 “친애하는 지도자,” 『신동아』, 1991년 7월호; 동서문제연구소, 『북한인명사전』 (서울: 중앙일보, 1990); 『내외통신』, 1994년 7월 11일; 『경향신문』, 1994년 7월 3일 등이 있다.

사마르칸트 설은 Mark Gayn (1909–1981)[29]이 1979년경 작성한 문건에도 등장하고 있다.[30]

The following is a brief biographical sketch of Kim Chung Il:

-Born the first son of Kim Il Sung on February 16, 1940, in Samarkant, Russia. His Russian name was Shura.

-Migrated to North Korea with parents in October 1945, along with the Soviet occupation forces.

............

Mark Gayn은 1972년 북한의 초청을 받아 방북한 적이 있으므로[31] 그때 들은 말일 가능성이 크다.[32] (Gayn은 김정일이 1940년 2월 16일생이라 했다.) 이처럼 사마르칸트 설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발표되기 이전부터 나온 것이다. 동아일보 1980년 10월 14일자도 이 설을 보도하고 있다.

出生(출생)부터 政治立身(정치입신)까지…베일속의 全貌(전모)
1941년 2월 16일 사마르칸드 출생, 소련명 슈라. 남동생은 죽어

국토통일원의 1980년 8월 보고서에도 김정일이 사마르칸트 출생이고 처음 이름은 슈라라고 했다.[33]

1983년 북한연구소가 간행한 『북한총감(北韓總鑑)』의 주요인명록(主要人名錄)에도 김정일(金正日)이 1941년 2월 소련 사마르칸트에서 출생했고, 소련명은 "슈라"라고 하였다.[34]

1990년대에는 다수의 한국 신문 기사들도 사마르칸트 출생설을 보도하고 있다.[35][36][37][38]

하지만 김일성은 사마르칸트와는 어떤 연고도 없고, 김정일이 거기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없다. 스탈린이 1937년 연해주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일과 관련해서 생겨난 잘못된 주장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김정일의 출생지에 관한 설로는 가장 먼저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1970년대에는 김정일은 그다지 주목받던 인물도 아닌데다 그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고, 김일성이 해방 전 소련군 88여단에 있었다는 것도 잘 몰랐다.

빨치산 여대원들의 후일 증언

김정숙의 동료 빨치산 여대원 김선(金善, 1920~?)은 재일 한국인 논픽션 작가 김찬정(金賛汀)에게 한 증언에서 김정일은 1942년 2월 16일 하마탄의 남야영 인근의 병원에서 태어났다고 했다.[5]

김여사(김선)는 40년 10월 일본군에 쫓겨 부대원 30여명과 함께 琿春縣(혼춘현)에서 소련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41년 4월 그곳으로 대피해 온 金日成(김일성) 부부 및 제5군 柴世榮(시세영) 지휘 부대와 함께「남야영」이라고 불리는「하마탄」의 병영에 수용됐다. 金善(김선) 여사는「남야영」에는 여성대원이 9명 있었으며 그들 중 1명을 빼고는 출격을 나가지 않았다고 밝혔다. 金晶淑(김정숙)도 출격 나간 적은 없다고 金(김)여사는 말했다. 金(김)여사에 따르면 모두 기혼자였던 그들 9명의 여성 가운데 金晶淑(김정숙)과 金(김)여사 자신등 4명이 임신을 했다. 이들은 병영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였던 마을의 소련인 병원(金여사는 그 마을과 병원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 하고 있었다)에서 잇따라 아이를 낳았다. 金(김)여사는 41년12월에 출산했다. 그리고 金晶淑(김정숙)도 42년 2월 16일 正日(정일)을 낳았다. 金日成(김일성)이「남야영」에서 5백㎞ 떨어진「북야영」으로 전출된 것은 42년 6월 19일이었다고 周保中(주보중)의 회고록인「日記(일기)」에 기록돼 있다. 그때 金晶淑(김정숙)과 正日(정일)도 함께「북야영」으로 갔고 거기서 李在德(이재덕) 여사를 만난 것이다.

김정일은 김선의 증언대로 남야영이 있던 하마탄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1942년 아닌 1941년 2월 16일생이다.

그러나 김선은 다른 증언에서는 김정숙이 당시 여자 아이를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고 했다.[39] 뿐만아니라 1997년 3월 정창현과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은 김정일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직접 보거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였다.[40] 따라서 김선의 증언은 김정일의 출생지를 아는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10년간 흑룡강성 성장을 지낸 진뢰(陳雷·천레이)의 부인 이민(李敏, 1924~2018)[41]은 빨치산 시절 이름이 이명순(李明順)인데, 김정일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북한을 의식해서인지 백두산 출생설을 지지하는 등 사실과 다른 증언을 했다.[42][43]

어린 김정일의 유모(乳母)였다는 이재덕(李在德, 1918~?)은 김정일이 뱌츠코예의 88여단 야영지에서 태어났다고 했다.[44][45][46]

이 밖에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 이조린(李兆麟, 1910~1946)의 아내인 김정순(金貞順, 金伯文)[39][44][47]이나, 1940년 10월 23일 김일성, 김정숙 부부와 함께 소련으로 넘어갔던 서순옥(徐順玉)[48]도 김정일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49][50]

이처럼 빨치산 여대원들의 1990년대에 나온 후일 증언도 역시 믿을만하지 않다. 이들은 당시에는 김정일의 출생지를 알았을 것이나, 1990년 이후의 증언에서는 기억이 흐려져 50~60년 전의 일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후일 증언보다는 당대의 기록이 더 믿을만하다는 생생한 실례이다.

김정일의 출생지가 오케안스카야라는 주장

김정일의 출생지가 블라디보스톡 인근의 오케안스카야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이는 김일성이 1942년 7월 88여단 창설 이전에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에 있었다고 한 일부 첩보 기록들에 근거한다. 그러나 남야영은 오케안스카야 아닌 라즈돌노예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51]

일본군이 1937년 그린 지도에 나오는 소련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북쪽 교외의 오케안스카야.

6.25 때 평양에 진주한 미군이 1950년 10월 16일 ~ 10월 20일간에 노획한 북한 문서[52] 중에 김정일의 생년과 출생지에 관해 나오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 방송에서 우종창 기자는 노획문서 중에 "김정일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오케안스카야 야영지(군대 주둔지)에서 1941년 2월 16일 출생했다 (16분 25초)"고 나오는 것이 있다 한다.

오케안스카야가 어디를 가리키는가가 문제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조금만 북상하면 교외에 오케안스카야(Океанская, Okeanskaya, オケヤンスカヤ)라는 기차역이 있는 마을이 나온다.

그러나 김일성이 실제로 여기에 머물렀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없다. 그가 실제로 머무른 남야영이 있었던 하마탄(라즈돌노예)은 위 지도에 오케안스카야보다 조금 북쪽에 나오는데 역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리 멀지는 않다.

1941년 3월 1일에 찍은 김일성 부부의 사진 옆에 김일성 자필로 B 야영(남야영)에서 찍었다고 써 놓았으므로 김정일 출생 당시 그들은 남야영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러시아 출신의 북한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박사도 김정일 출생지가 오케안스카야라고 주장한다.

  •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광명성’ 김정일 진짜 출생지는 어디일까? 주간조선 [제2796호] 2024.02.16
    • 위 글에서는 김정일의 출생지를 남야영이라 하면서도 남야영이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 인근의 라즈돌노예가 아닌 블라디보스톡 인근의 오케안스카야라고 주장하는데, 여러 문제점들이 있다.
    • 김정일의 2002년 8월 방러 일정은 8월20일 러시아 하산역에 도착, 다음날 콤소몰스크나아무레[53] 방문. 그 뒤 하바롭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8월 23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당시 김정일은 전용열차로 하바롭스크와 연해주 여러 곳을 들렀으므로, 단지 그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길에 인근 오케안스카야 역에 잠간 들렀고, 역사에 방문기념 현판이 부착되어 있다고 해서 거기가 김정일의 고향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하다.[54] 러시아가 하바롭스크나 아무르주 부레야역[55] 등 김정일이 방문한 지역에 기념비나 현판을 설치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국내 언론은 당시 그가 방문한 하바롭스크를 그의 출생지인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다.[56]
    • 2019년 4월 김정은이 블라디보스톡에서 푸틴 대통령과 회담할 때도 그의 전용열차가 인근 오케안스카야 역에 정차하기도 했다.[57][58]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는 김정일이나 김정은의 열차가 오케안스카야 역에 일시 정차하는 것은 보안 관계나 회담 시간에 맞춘 일정 조정상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이를 오케안스카야가 김정일의 출생지인 증거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추측이다.
    • 김정일의 출생지가 남야영이라는 것은 위 글의 필자도 동의한다. 그런데 남야영이 하마탄(라즈돌노예)에 있었다는 것은 1980년대부터 간행된 소련군 88여단 출신 중국인들의 회고담에 많이 나온다. 이들의 회고담에 남야영이 오케안스카야에 있었다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이들의 증언으로부터 남야영은 하마탄에 있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김일성 회고록에도 남야영은 보로실로프 근처 철길과 기차역에서 서편으로 얼마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했는데, 오케안스카야는 이 조건에 맞지 않으므로 남야영이 거기에 있었을 가능성은 없다.

김정일 본인이 하바로프스크 출생이라 했다는 증언에 대해

1993년 1월 중앙일보는 러시아에 사는 김정일과 남산고급중학 동창생이 김정일의 중-고교 학적부 등의 출생지 난에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로 기록돼 있었다고 증언했다는 보도를 했다.[59][60][61]

김정일의 중-고교 학적부 등 출생지 난에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로 기록돼 있고 김정일도 교내 토론회 등에서 자신의 고향은 하바로프스크라고 소개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김정일은 고등학교 때까지 소련이름「유라」를 사용했던 것도 처음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중앙일보가 최근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김정일의 중·고교 동기 동창생들로부터 입수한 졸업앨범과 동창생들의 증언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북한은 김정일이 민족의 영산 백두산 밀 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밀 영 부근의 산봉우리를 구월 봉으로 지정, 선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국내외에서는 김정일이 5세 때인 1947년까지 소련이름「유라」로 쓰다 김정일로 개명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1960년 7월 발행한 김정일의 남산고급중학교(우리의 중·고교) 졸업앨범에는 김정일의 이름이 「김유라」로 적혀 있다,

또 김단(金丹, 51)씨 등 러시아에 살고 있는 김정일의 중-고교 동창생들에 따르면 60년 7월 중순 졸업을 앞두고 졸업생들의 장래 진로문제 등을 발표하는 발표회에서 그는 『나의 조선이름이 김정일로 결정돼 이 이름으로 최근 공민증까지 발급됐으니 앞으로는 김정일로 불러 달라』고 개명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했었다고 한다.

또 그는 학적부 등에 자신의 출생지를 하바로프스크로 기록했고 자신을 소개할 때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련군에 복무할 당시인 l942년 2월 16일 하바로프스크 병영에서 태어났다』고 밝히고 『때문에 나의 고향은 소련 땅 하바로프스크』라고 말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증언이 사실이라 해도 김정일 본인이 정확히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1941년 2월 16일 라즈돌노예에서 태어나 불과 1년 5개월 후인 1942년 7월 중순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에 88여단이 창설되면서 그곳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라즈돌노예에서의 일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로도 부모나 88여단 출신자들 가족으로부터 88여단 시절 이야기는 자주 들었겠지만 라즈돌노예나 남야영의 일은 거의 듣지 못하여 자신의 출생지를 하바로프스크로 잘못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은 그의 출생지가 아니라 유년기를 보낸 곳이지만, 아마도 자신의 고향 마을 정도로 김정일의 기억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백두산 밀영

북한은 1982년부터 김정일의 출생지가 백두산 밀영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63]

참고 자료

[씨박스] '백두혈통' 김정은, 본적지는 러시아? TV조선 2023.09.13
김정일의 출생지가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여 km 떨어진 아무르강가의 비야스크(뱌츠코예) 마을이라 하고 있으나, 잘못 안 것이다. 뱌츠코예에서는 김정일의 동생 김슈라가 태어났다.
뱌츠코예 마을의 김일성이 살았다는 집과 묘지도 잠간 나온다.
뱌츠코예에는 김일성88여단 시절 깊이 사귀었다는 한 여인의 무덤이 있다고 황장엽이 증언했다는 말도 나온다.
2019_조중러접경지역답사(1) 2019. 7. 29.
北역사교과서 "김일성 축지법…김정은 3세에 사격" 연합뉴스 2015-10-14
그러나 일본 관동군과 만주군의 문서, 옛 소련정부 기록 등에 따르면 김정일은 북한이 주장하는 1942년 2월 16일이 아니라 1941년 같은 날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사이 하마탄이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일본군 토벌대의 공격으로 패주한 김일성이 1940년 10월 소련에 들어간 뒤 저우바오중(周保中) 휘하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1년 반 가량 야영생활을 하던 곳이다.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2. 2.0 2.1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3.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p.206~207
  4. 김정일 연구 (통일부, 1999.12) p.12
  5. 5.0 5.1 5.2 5.3 "金正日(김정일) 출생지는 蘇(소)「하마탄」마을" 동아일보 1992.06.13 9면 : 재일 한국인 논픽션 작가 金賛汀(김찬정)씨와 증언자 金善(김선) 여사
  6. “김일성 축지법·김정은 3살에 사격을 했다니…” KBS News 2015.10.14
  7. 7.0 7.1 김일성의 입소 과정과 소련 생활 : 1940 ~ 1945
  8. 8.0 8.1 이세르게이 교수, "김정일 출생지 소련 극동군 정보 부대안" [김상철] MBC 1996-07-25
    KBS취재팀, 김정일 실제 출생지 확인 위해 러시아 비야스크 마을 촬영 1997.03.03 (21:00)
  9. 러시아 김정일 생가 방문 RFA 2019-10-02
  10. 『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③폐허가 된 김일성 유적 자유일보 2018-08-16
  11. [포토] 북한 김정일 실제 출생지, 러시아 라즈돌리노예 연립주택 뉴데일리 2019-01-09
  12. 12.0 12.1 12.2 抗联余辉 北京日报 2014-01-14
  13. 北韓政治史硏究 序論(梁好民) > Ⅱ. 東北抗日聯軍과 金日成의 人蘇 國史館論叢 第27輯 (국사편찬위원회, 1991-11-05)
  14.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더불어 8권》 p.88 :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3.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15. 人物(인물)탐구 金正日(김정일) (2) 전문가들이 말하는「모든것」 出生(출생)·성장환경 : 蘇領(소령) 연해주 병영서 태어나 1994.07.14 경향신문 3면
  16. 北傀(북괴) 金正日(김정일) 생일 祝賀(축하) 日革新系(일혁신계)서 파티열어 1981.02.17 동아일보 5면
  17. 푸틴, 2차대전 전승절 맞아 북한 '항일 빨치산'에 축전 연합뉴스 2021-05-08
    푸틴, 北항일빨치산 원로 이영숙에 '2차대전 승전' 축전 뉴스1 2021-05-08
  18.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91年 人民出版社)⟩ p.644의 1942년 1월 12일자부터 이어지는 남야영 방문 당시의 일기.
  19. 진짜 김정일이 태어난 곳 글쓴이 : 아나톨리 李 (2009. 12.28.) / 옮긴이 : (재)국제농업개발원 원장 李秉華 - 민주평통 통일발언대 2009년 12월 29일 : 아나톨리 李는 연해주 고려인으로 안기부 직원이 조산원 엘냐의 증언을 듣고 김정일 생가를 현지 확인할 당시 안내한 사람이다.
    진짜 김정일이 태어난 곳 : 아나톨리 李 (2009. 12.28.) : 생가 건물 사진 있음
  20. 20.0 20.1 20.2 [황호택 칼럼] 유라의 탯줄을 길게 자른 조산원 엘냐 동아일보 2015-08-05
  21. 식량기지 개척자 이병화(李秉華)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 : “푸틴 대통령, 남북한 연해주 공동 진출하면 통일 도울 것” 월간조선 2016년 10월호
  22. [초대석] 이병화 국제농업개발원장 동아일보 2008-04-26
  23. 하마탕(蛤蟆塘), 영문 Razdolnoye 세계한민족문화대전
  24. Первое знакомство с Раздольным 30.06.2014, автор Ксения Амельшина: 구글 영역 The first acquaintance with Razdolniy 30/06/2014 , author Xenia Amelshina
  25. 고려인 강제이주를 보는 눈 RFA 2017-09-01
  26. 김정일생가 터엔 대학시설물, 본사취재팀, 하바로프스크 현지 확인 조선일보 1993.06.30 / 23 면
  27. 이수석, 김정일연구에 대한 비판적 고찰: 기존 쟁점들을 중심으로 統一問題硏究 2004년 하반기호 (통권 제42호) p.86
  28. 오기완(吳基完), 《김정일(金正一) 스토리》, 『북한(北韓)』 제41호 (4권 5호) (서울 : 북한연구소, 1975-05-01) pp.152-161
  29. an American and Canadian journalist, who worked for The Toronto Star for 30 years. He traveled to Korea while head of the Chicago Sun's Tokyo Bureau in 1945~1946. Mark Gayn은 1972년에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
  30. Mark Gayn Papers, MS Coll. 215 / Series 5: Subject Files / Folder 12: Biographical Material. Kim Il Sung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p.20
  31. Vintage: North Korea Industries (1972) Monovisions
  32. In June 1972, The Toronto Star’s veteran Asia correspondent Mark Gayn was one of four reporters allowed into North Korea. The trip yielded four lengthy feature stories, published in The Star in July 1972, where Gayn detailed the country’s political landscape, then dominated by Kim Il Sung, and its people.
  33. 김일성후계체제와 김정일 (국토통일원, 1980년 8월, 관리번호 : C11M33830) p.29 : 국가기록원
  34. 북한연구소, 『북한총감(北韓總鑑)』, 서울 : 北韓硏究所, 1983 p.1891
  35. 김정일 권력승계 언제, 어떻게 - 시사저널 1990. 4. 15
  36. 81년부터 「권력」전면에 부상/후계승계 김정일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1994. 7. 9.
  37. [김일성사망] 국제사회 '분석불가능한 인물'..김정일은 누구 한국경제 1994.07.10
  38. 北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가 한국경제 2003. 9. 3
  39. 39.0 39.1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신동아 2000년 8월호
  40. 정창현, 《김정일의 성장과정과 후계체제 확립》 『김정일 연구』 (통일부, 1999.12) p.8
  41. 조선족 항일투사 리민 여사 타계 동포투데이 2018.07.22
  42. [피터 玄의 하얼빈 특종 인터뷰] 『나의 전우 金日成은 개인숭배와 후계자를 잘못 선택한 과오를 범했다』 월간조선 2000년 2월호
  43.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 빨치산부대 : 조선족 항일투사 李敏여사의 ‘60년만의 증언’ 신동아 2000년 3월호
  44. 44.0 44.1 “북한 김정일 출생지 조작”/북경거주 유모 이재덕씨 첫 증언 중앙일보 1991.10.04 / 1면 ◎“백두산 태생”은 거짓 / 원래 소 하바로프스크서 출생
    김정일 낳자마자 탁아소로/당시 유모 이재덕씨 하바로프스크생활 회고 중앙일보 1991.10.04 종합 5면 ◎산속의 황량한 야영천막서 태어나/몸약한 김정숙 젖 모자라 대신 젖줘
  45. 김찬정, 《빨치산 만가, 김일성과 88독립여단》, 신동아 1992년 7월호
  46. 金正日(김정일) 乳母(유모) 北京(북경)에 거주 1994.07.17 동아일보 3면
  47. [항일녀걸10]3로군의 출중한 지하공작자 ■ 리 함 길림신문 2015-05-13
  48. 김일성주석 연고자 김명주 서순옥 항일투사 가족 막내아들 김진송 선생이 회고한 부모. 유튜브
  49.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p.206~207
  50. 김정일 연구 (통일부, 1999.12) p.12
  51. 남야영의 위치에 대한 자세한 고증은 "김일성의 소련내 이동 경로 및 체류지"를 참고하라.
  52. 국회도서관에 "한국전쟁시 미군 노획 문서"라는 제목의 [마이크로자료] 총 101권이 소장되어 있다 : 한국전쟁시 미군 노획 문서. v.1 [마이크로자료] ~ 한국전쟁시 미군 노획 문서. v.101 [마이크로자료] (서울 : 국회도서관, 2002)
  53. 콤소몰스크나아무레(Комсомольск-на-Амуре) 구글지도
  54. [김정일과 닮은 듯 다른 김정은 방러…15일 군사·산업도시 시찰] 한겨레신문 2023-09-14
  55. Bureya(Бурея), 아무르스카야 구글지도
  56. '김정일 고향' 하바롭스크에 기념비 설치 YTN 2014년 12월 20일
  57. "김정은 전용열차 블라디 교외지역으로 이동…보안조치" 연합뉴스 2019/04/25
  58. “김정은 전용열차 블라디 교외지역으로 이동…보안조치” KBS뉴스 2019.04.25
  59. (5) 성장과정(상) 중간성적의 평범한 중고시절 [중앙일보] 1993.01.28 종합 11면
  60.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한반도 절반의 상속인 김정일』, (중앙일보사, 1994) pp.52~53
  61. 정창현, 《김정일의 성장과정과 후계체제 확립》 『김정일 연구』 (통일부, 1999.12) p.18
  62. 김정일 출생(1941.2.16) DailyNK - 2005.02.16
  63. 英(영)신문 「金日成父子(김일성부자) 우상화」연쇄보도 1982.03.17 경향신문 4면
    1942년 2월 16일은 北傀(북괴)의 경우 우주적 의의를 지닌 날이었다. 바로 그날 신성한 산속에 있는 비밀진지에서 金日成(김일성)의 한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40년 뒤 그 아들은 성장하며 嚮導星(향도성)이 되었다. 올해 金正日(김정일)의 생일은 「北韓(북한) 주민의 최대 祝日(축일)」로 기념행사를 가졌으며 1주일후 송림지구 유권자들은 1백% 대의원 선거에 참가하여 金正日(김정일)에게 1백%의 지지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