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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경비진 주파기(國境警備陣 走破記)'''는 1939년 6월 [[조선일보]]에 5회에 걸쳐 연재된 기사로, 당시 함경북도 국경 경비를 담당하던 경찰대와 두만강 대안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 부대와의 대치 상황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당시 김일성 부대는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 납치를 자행하며 일본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아래는 각 회별 기사 내용이다.
'''국경경비진 주파기(國境警備陣 走破記)'''는 1939년 6월 [[조선일보]]에 5회에 걸쳐 연재된 기사로, 당시 함경북도 국경 경비를 담당하던 경찰대와 두만강 대안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 부대와의 대치 상황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당시 김일성 부대는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 납치를 자행하며 일본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아래는 각 회별 기사 내용이다.
* [https://www.google.com/maps/place/Hongqi+River/@42.069197,128.8732842,13.25z/data=!4m5!3m4!1s0x5fcb216523f63ebd:0x92c54ba9c8962e24!8m2!3d42.115317!4d128.938008 홍기하 (红旗河, Hongqi River) :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 허룽 시(延边朝鲜族自治州和龙市)] 구글지도


==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 1939년 6월 20일 ==
==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 1939년 6월 20일 ==

2022년 3월 17일 (목) 18:25 판

국경경비진 주파기(國境警備陣 走破記)는 1939년 6월 조선일보에 5회에 걸쳐 연재된 기사로, 당시 함경북도 국경 경비를 담당하던 경찰대와 두만강 대안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 부대와의 대치 상황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당시 김일성 부대는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 납치를 자행하며 일본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아래는 각 회별 기사 내용이다.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 1939년 6월 20일

국경경비진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1939.06.20 조선일보 7면
국경경비진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만주국의 치안이 점점 확립하여지는 반면에 여기서 몰려나게되는 비적들이 궁지에 빠진 남어지 차츰 백두산을 중심삼은 함경남북도 대안에 집결하여 조선 안을 호시탐탐하고 때로는 만용을 부려 월경침범까지 감행한다는 사실은 제일선의 치안유지에 적지안흔 두통꺼리가 되고잇다. 특히 지난 오월 하순 이래로 한 달 가까이 끄러나오는 김일성(金日成) 일파의 준동은 다만 치안유지에 지장이 될 뿐외라 나아가서는 북조선의 산업개발에도 크다란 지장이 생길 우려가 잇서 제일선 경비진은 갑짜기 긴장하여 이 화근을 근본적으로 절멸시키겠다고 철통가튼 경비진에 한 거름을 더 나아가 토벌대를 파견하여 일만양군(日滿兩軍) 호응아래 섬멸전을 게획하고 연안 수백리의 포위진을 베풀고 그물을 치고 조이드시 사방에서 차츰 조이고 잇다. 이 작전게획을 현지에 나아가 독려하고 또 제일선에서 분투하는 특별경찰대를 위문하게된 통정(筒井) 함북경찰부장 일행을 따라 기자는 삼엄하고 치떨리는 두만강 상류의 국경선을 빼지안코 답사할 기회를 어덧다. 이제 김일성 일당이 조선 안을 침범한 당시의 상황과 여기저기서 어든 정보를 종합하여 그들에 대한 약간의 시식을 전달하고저 한다.
지난 오월 이십이일 나제(낮에) 삼장(三長) 경찰서 관내인 개척동(開拓洞)에 비단의 주력부대가 침입하여 그곳에 잇는 북선제지회사 벌목장의 벌부(伐夫) 합숙소를 습격하여 남자만 열여덟 명을 붓드러가지고 그길로 가면서 구암(篝岩)에서 열아홉 명을 또 심포골(深浦谷)에서 두명 - 도합 서른아홉 명을 납치하여 약탈한 양식과 기물흘 질머지우고 대로은산(大蘆隱山) 등을 타고가고 또 한 부대는 원사동(元四洞) 골목에서 때를 가치하여 약탈하려 하엿스나 이때는 벌써 토벌대가 급보를 밧고 농사동(農事洞)에서 달려드는 순간이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형세를 관망하던 차에 오후 여덟시쯤 되어 토벌대의 추격이 점점 급박해젓스나 벌써 날이 저물어 행방을 모색하다가 이튼날 새벽에 이르러 증산(甑山) 근방에서 비단을 발견하여 격렬한 조우전이 전개되엇다.
격전 두시간 반 후에 비단은 마침내 이십삼일 석양에 장산령(長山嶺)으로 도망하니 조선 안에 침범한지 이틀만에 적은 완전히 퇴치하게 되엇다. 그러나 한편 그들은 국경은 넘엇스나 다시 그 길을 취하여 침범하려는 견제수단으로 이십오일 오후 아홉시 사십분 경에는 장산령 하류인 상삼수(上三水)에 나타나 월경을 꾀하엿스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장산령에 주력이 모여 동북방으로 이동하여 이십칠일 오후 여덟시 반쯤해서 칠십 여명의 비단이 상사동(上四洞) 대안인 상대동(上大同)에 들어와 이십구 명을 또 이와 동시각에 상일동(上一同) 대안의 동경평(東京坪)에서 아홉 명을 납치하고 식량 다수를 약탈하고 이십구일 오후 아홉시에는 삼장대안 이수평(二水坪)에서 열아홉 명을 또 그와 가튼 시각에 소옥석동 상촌(小玉石洞 上村)에서 주민 오십명을 제각금 붓드러 부락에 잇는 식량품을 약탈하여 가드니 --
삼십일 그 시각이 되자 다시 소옥석동 하촌에서 삼십삼 명을 노전동(蘆田洞)에서 아홉 명을 또 중촌(中村)에서 이십삼 명을 납치하고 그 다음날인 삼십일일 오후 일곱시에는 삼장대안의 홍기하(紅旗河) 경찰분주소(警察分駐所)에서 대마록구(大馬鹿溝)에 잇는 삼림경찰대(森林警察隊)에 보내는 식량품 수송대를 도중에서 기다리다가 말까지 아울러 약탈해가지고 다라낫다. 유월일일 오후 아홉시 반에는 사십여명의 비단이 삼장 대안에서 이십리쯤 되는 시만동(詩滿洞)에 침입하여 식료품과 주민 열네 명을 또 그날밤 열한시 지나서 이수평에 나타낫다가 경비대에 격퇴되고 그 다음날 새벽에는 대마록구에 나아가려다가 그곳 삼림경찰대에 격퇴 당하고 그뒤로는 두만강 대안부락에 즉접 나타나지는 못하고 근방에서 잠복하고 잇는 모양인데 그 동안 대안의 만주측락에서 납치한 주민만 일백 팔십구 명의 다수에 달하고 식량, 소, 말, 도야지 닭 등등의 피해는 자세히 조사할 방법조차 업스나 막대한 수효에 달할 것이라 한다.
조선에서 붓들려 간 자 중에는 오직 한 사람인 내지인으로서 굴본철차(堀本鐵次)군이 탈주해 오다가 발목에 총알을 밧고 경상을 당하고 개척동에서 붓들려간 전치원(全致元, 三〇)이 도망하다가 권총에 마저 즉사한 외에 나머지 삼십칠 명을 붓들린 뒤 일주일쯤되어 전부 무사히 석방되어 다시 못볼 줄만 알엇던 제집에로 돌아왔다.
나지면(낮이면) 밀림과 산속에 업디렷다가 석양부터 밤중까지 맹렬한 활동이 전개되면 여기저기어 거이(거의) 가튼 시각에 이처럼 막대한 피해를 보게되니 전전긍긍하는 주민의 불안은 더 말할 것도 업지만 종적을 몰라 추궁하지 못하거나 혹은 만나서 추궁하여도 번개가치 다라나버리는 그들을 토벌하는 경찰대의 고심이란 상상외에 큰 것이다. (게속)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 1939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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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③➌ : 1939년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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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 1939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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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⑤❺ : 1939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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