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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 1939년 6월 20일 ==
==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 1939년 6월 20일 ==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9062000239207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9-06-20&officeId=00023&pageNo=7&printNo=6508&publishType=00020 국경경비진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1939.06.20 조선일보 7면 (이미지)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9062000239207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9-06-20&officeId=00023&pageNo=7&printNo=6508&publishType=00020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1939.06.20 조선일보 7면 (이미지)
: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650819390620e1073&set_date=19390620&page_no=7 국경경비진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1939.06.20 조선일보 7면 (텍스트)
: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650819390620e1073&set_date=19390620&page_no=7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1939.06.20 조선일보 7면 (텍스트)


{{인용문|'''국경경비진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br>
{{인용문|'''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br>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br>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br>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br>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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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 1939년 6월 21일 ==
==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 1939년 6월 21일 ==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906210023920701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9-06-21&officeId=00023&pageNo=7&printNo=6509&publishType=00020 국경경비진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여름 업는 제일선(第一線) / 난로(暖爐) 불은 경비대(警備隊)의 유일(唯一)한 벗] 1939.06.21 조선일보 7면 (이미지)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906210023920701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9-06-21&officeId=00023&pageNo=7&printNo=6509&publishType=00020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여름 업는 제일선(第一線) / 난로(暖爐) 불은 경비대(警備隊)의 유일(唯一)한 벗] 1939.06.21 조선일보 7면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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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650919390621e10710&set_date=19390621&page_no=7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여름 업는 제일선(第一線) / 난로(暖爐) 불은 경비대(警備隊)의 유일(唯一)한 벗]  1939.06.21 조선일보 7면 (텍스트)


{{인용문|'''국경경비진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br>
{{인용문|'''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br>
'''여름 업는 제일선(第一線)'''<br>
'''여름 업는 제일선(第一線)'''<br>
'''난로(暖爐) 불은 경비대(警備隊)의 유일(唯一)한 벗'''<br>
'''난로(暖爐) 불은 경비대(警備隊)의 유일(唯一)한 벗'''<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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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06.22 조선일보 7면 (텍스트)
: 1939.06.22 조선일보 7면 (텍스트)


{{인용문|'''국경경비진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③➌'''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br>}}
{{인용문|'''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③➌'''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br>}}


==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 1939년 6월 23일 ==
==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 1939년 6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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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06.23 조선일보 7면 (텍스트)
: 1939.06.23 조선일보 7면 (텍스트)


{{인용문|'''국경경비진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br>}}
{{인용문|'''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br>}}


==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⑤❺ : 1939년 6월 24일 ==
==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⑤❺ : 1939년 6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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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06.25 조선일보 7면 (텍스트)
: 1939.06.25 조선일보 7면 (텍스트)


{{인용문|'''국경경비진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⑤❺'''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br>}}
{{인용문|'''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⑤❺'''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br>}}

2022년 3월 17일 (목) 18:44 판

국경경비진 주파기(國境警備陣 走破記)는 1939년 6월 조선일보에 5회에 걸쳐 연재된 기사로, 당시 함경북도 국경 경비를 담당하던 경찰대와 두만강 대안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 부대와의 대치 상황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당시 김일성 부대는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 납치를 자행하며 일본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아래는 각 회별 기사 내용이다.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 1939년 6월 20일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1939.06.20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만주국의 치안이 점점 확립하여지는 반면에 여기서 몰려나게되는 비적들이 궁지에 빠진 남어지 차츰 백두산을 중심삼은 함경남북도 대안에 집결하여 조선 안을 호시탐탐하고 때로는 만용을 부려 월경침범까지 감행한다는 사실은 제일선의 치안유지에 적지안흔 두통꺼리가 되고잇다. 특히 지난 오월 하순 이래로 한 달 가까이 끄러나오는 김일성(金日成) 일파의 준동은 다만 치안유지에 지장이 될 뿐외라 나아가서는 북조선의 산업개발에도 크다란 지장이 생길 우려가 잇서 제일선 경비진은 갑짜기 긴장하여 이 화근을 근본적으로 절멸시키겠다고 철통가튼 경비진에 한 거름을 더 나아가 토벌대를 파견하여 일만양군(日滿兩軍) 호응아래 섬멸전을 게획하고 연안 수백리의 포위진을 베풀고 그물을 치고 조이드시 사방에서 차츰 조이고 잇다. 이 작전게획을 현지에 나아가 독려하고 또 제일선에서 분투하는 특별경찰대를 위문하게된 통정(筒井) 함북경찰부장 일행을 따라 기자는 삼엄하고 치떨리는 두만강 상류의 국경선을 빼지안코 답사할 기회를 어덧다. 이제 김일성 일당이 조선 안을 침범한 당시의 상황과 여기저기서 어든 정보를 종합하여 그들에 대한 약간의 시식을 전달하고저 한다.
지난 오월 이십이일 나제(낮에) 삼장(三長) 경찰서 관내인 개척동(開拓洞)에 비단의 주력부대가 침입하여 그곳에 잇는 북선제지회사 벌목장의 벌부(伐夫) 합숙소를 습격하여 남자만 열여덟 명을 붓드러가지고 그길로 가면서 구암(篝岩)에서 열아홉 명을 또 심포골(深浦谷)에서 두명 - 도합 서른아홉 명을 납치하여 약탈한 양식과 기물흘 질머지우고 대로은산(大蘆隱山) 등을 타고가고 또 한 부대는 원사동(元四洞) 골목에서 때를 가치하여 약탈하려 하엿스나 이때는 벌써 토벌대가 급보를 밧고 농사동(農事洞)에서 달려드는 순간이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형세를 관망하던 차에 오후 여덟시쯤 되어 토벌대의 추격이 점점 급박해젓스나 벌써 날이 저물어 행방을 모색하다가 이튼날 새벽에 이르러 증산(甑山) 근방에서 비단을 발견하여 격렬한 조우전이 전개되엇다.
격전 두시간 반 후에 비단은 마침내 이십삼일 석양에 장산령(長山嶺)으로 도망하니 조선 안에 침범한지 이틀만에 적은 완전히 퇴치하게 되엇다. 그러나 한편 그들은 국경은 넘엇스나 다시 그 길을 취하여 침범하려는 견제수단으로 이십오일 오후 아홉시 사십분 경에는 장산령 하류인 상삼수(上三水)에 나타나 월경을 꾀하엿스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장산령에 주력이 모여 동북방으로 이동하여 이십칠일 오후 여덟시 반쯤해서 칠십 여명의 비단이 상사동(上四洞) 대안인 상대동(上大同)에 들어와 이십구 명을 또 이와 동시각에 상일동(上一同) 대안의 동경평(東京坪)에서 아홉 명을 납치하고 식량 다수를 약탈하고 이십구일 오후 아홉시에는 삼장대안 이수평(二水坪)에서 열아홉 명을 또 그와 가튼 시각에 소옥석동 상촌(小玉石洞 上村)에서 주민 오십명을 제각금 붓드러 부락에 잇는 식량품을 약탈하여 가드니 --
삼십일 그 시각이 되자 다시 소옥석동 하촌에서 삼십삼 명을 노전동(蘆田洞)에서 아홉 명을 또 중촌(中村)에서 이십삼 명을 납치하고 그 다음날인 삼십일일 오후 일곱시에는 삼장대안의 홍기하(紅旗河) 경찰분주소(警察分駐所)에서 대마록구(大馬鹿溝)에 잇는 삼림경찰대(森林警察隊)에 보내는 식량품 수송대를 도중에서 기다리다가 말까지 아울러 약탈해가지고 다라낫다. 유월일일 오후 아홉시 반에는 사십여명의 비단이 삼장 대안에서 이십리쯤 되는 시만동(詩滿洞)에 침입하여 식료품과 주민 열네 명을 또 그날밤 열한시 지나서 이수평에 나타낫다가 경비대에 격퇴되고 그 다음날 새벽에는 대마록구에 나아가려다가 그곳 삼림경찰대에 격퇴 당하고 그뒤로는 두만강 대안부락에 즉접 나타나지는 못하고 근방에서 잠복하고 잇는 모양인데 그 동안 대안의 만주측락에서 납치한 주민만 일백 팔십구 명의 다수에 달하고 식량, 소, 말, 도야지 닭 등등의 피해는 자세히 조사할 방법조차 업스나 막대한 수효에 달할 것이라 한다.
조선에서 붓들려 간 자 중에는 오직 한 사람인 내지인으로서 굴본철차(堀本鐵次)군이 탈주해 오다가 발목에 총알을 밧고 경상을 당하고 개척동에서 붓들려간 전치원(全致元, 三〇)이 도망하다가 권총에 마저 즉사한 외에 나머지 삼십칠 명을 붓들린 뒤 일주일쯤되어 전부 무사히 석방되어 다시 못볼 줄만 알엇던 제집에로 돌아왔다.
나지면(낮이면) 밀림과 산속에 업디렷다가 석양부터 밤중까지 맹렬한 활동이 전개되면 여기저기어 거이(거의) 가튼 시각에 이처럼 막대한 피해를 보게되니 전전긍긍하는 주민의 불안은 더 말할 것도 업지만 종적을 몰라 추궁하지 못하거나 혹은 만나서 추궁하여도 번개가치 다라나버리는 그들을 토벌하는 경찰대의 고심이란 상상외에 큰 것이다. (게속)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 1939년 6월 21일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여름 업는 제일선(第一線) / 난로(暖爐) 불은 경비대(警備隊)의 유일(唯一)한 벗 1939.06.21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여름 업는 제일선(第一線)
난로(暖爐) 불은 경비대(警備隊)의 유일(唯一)한 벗

무산을 떠난 일행 일곱명(통정 경찰부장(筒井 警察部長), 편산 경부(片山 警部), 빈전 경일(濱田 京日), 김 매신(金 每新), 고교 북일(高橋 北日), 사지 북일일(士至 北日日) 급 오기자(及 吳記者))은 토비사령부(討匪司令部)가 잇는 삼장(三長)에 향하엿다.
도중에 요소요소 빈틈업시 째워진 경비진을 뚤코 두만강을 여페(옆에) 끼고 구비구비 양의 창자가튼 산비탈길을 달려 세 시간만에 목적지인 삼장에 도달하엿다. 삼륜(三輪) 고등과장 편강 서장(片岡 署長) 이하 다수의 영접을 바더 토벌대 본부인 삼장서에서 잠시 쉬인 뒤에 두만강을 건너 그 대안에 잇는 만주국의 부락 홍기하(紅旗河)에 건너가 역시 만주측의 토벌대 사령부에 경의를 표하엿다.
조선 안의 경비도 무던하지만 대안인 홍기하 시가는 완연 큰 전쟁이나 당하듯이 몹시도 긴장되어 잇섯다 길까에 지나는 사람 얼굴이라던가 점방에 안즌 사람 얼굴 할 것업시 아직도 불안과 초조한 가운데 잇다는 표정을 여실히 나타내이고 잇섯다.
〇〇부대에 경의를 표한 우리 일행은 누구나 호기심에 끌려서 만주담배를 사려고 점방에 들어갓는데 눈치빠른 장사치들은 우리가 뭇기도 전에 담배를 사자는줄 알고서 『론톤데 메유라—』하며 손을 내둘으는데 놀라지 안흘 수 업섯다.
세상이 소란하니 담밴들 제마음껏 배급이 될 리 잇스랴만 갑짜기 『토벌경기』 때문에 담배 재고품이 업서진 탓이겟지—〇〇부대장 역시 조선담배의 "마코—"로 견대는(견디는) 것이 도리켜 생각킨 바 잇섯다.
대안에 이처럼 소란 정경을 보면서도 태연스런게 자리잡은 삼장 시가가 얼마나 우리에게 위안을 주엇는지는 새삼스럽게 국경이 가로노혀 잇는 것을 늣끼게 한다.
×
다음날 삼장을 떠난 일행은 농사동을 거처 그곳에서 다시 멀리 백두산의 기슭에 잇는 조선에서는 제일 끗다는 부락인 삼수펑(三水坪)과 상삼수(上三水) 두 부락을 향하여 고원지대를 올으고 또 올라 전후 여섯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두고 자동차를 억지로 모라 보앗다.
여기쯤 와서는 두만강도 한줄기의 개울로 변하여 아므런 각도로 보아도 강물이라는 명칭을 부처 부르기는 힘드럿다. 차라리 강물이라기 보다는 욱어진 숩(숲) 사이에 흐르는 잔잔한 시내물이라고나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너무도 떠러저 보이는 격에는 놀라지 안흘 수 업섯다.
아프로 한업시(한없이) 터저 보이는 개마고원(蓋馬高原)의 웅대하고 찬연한 광경에 부닥치자 일행은 이땅을 밟고 달고 잇는 순간에 『비적』이니 『토벌』이니 하는 술어를 모조리 이저버리고(잊어버리고) 다만 대자연에 혼연히 일치된 늣김박께는(느낌밖에는) 아무 것도 늣길 수 업섯다. 적은 시내물을 곳곳에 막어서 언(堰)을 만들어 떼(벌(筏))를 흘려 나리기에 편리하도록 해노흔(해놓은) 정경을 나려다보면서 또는 툭터진 고원에 제멋대로 자라난 고산식물(高山植物)의 가지가지 —— 뜰쭉, 은로매(銀露梅) 금로매(金露梅) 천년죽(千年竹) — 등을 비롯하여 여름도 모를 여러 가지의 초목이 무성하여 완연히 천연의 식물원(植物園)을 이루고 잇는 광경을 또는 길좌우에 욱어진 원시림(原始林)의 장관을 보면서 천왕당(天王堂) 홍암동(紅岩洞)를 거처 삼수령에 도달하엿다.
해는 벌써 서산에 기우러지고 이야기는 김일성 일당의 랑자한 횡포를 응징하자던 토벌대의 무용담으로 걸직하여젓섯다.
그러나 여기가 국경이요 또 백두산의 막다른 골목이라는 늣김을 주는데는 누구나 감격에 자자진 순간을 안가질 수 업섯는
어느 철을 구별할 것 업시 사시장동(四時長冬)인 이곳인지라 경비대가 들어잇는 곳곳마다 난로(暖爐)불이 피워저 잇고 게다가 요사이 온도를 무르니(물으니) 농사동에서 벌써 최저 령하 십이도요 최고 십이도라 하므로 그보담 상류인 삼상수나 상수평은 더 무러볼 것도 업시 조선에서는 제일 기후가 고르지 못한 걸로 자랑을 삼는 지방이니 인적은 끈허진 곳에 경비대만 강물을 바라보고 난로불을 벗삼아 물그럼이 서잇는 것이 한갓 기이한 늣김을 갓게 한다.
×
그 다음날은 다시 삼장을 출발하여 산골짝이를 더듬어서 이번에 비적의 습격을 바든 부락인 개척동(開拓洞) 구암(篝岩)과 또 신개척동(新開拓洞) 등지를 돌아서 흡사 고전장을 탐사하는 늣낌으로 답사를 게속하엿다. 가는 곳마다 『감회기픈 것은 청진이나 나남에서 일상 맛나는(만나는) 경관들을 그곳 현지에서 맛나는 늣김이다.
우선 원일동(元一洞)과 개척동에서 맛난 경비원들에 청진서원과 경찰부원들이 석겻는데(섞였는데) 한치나 자라난 수염 틈으로 이를 내노코 우스면서 반겨하는 광경에는 그들의 고초는 물론이어니와 국경경비의 어려운 직무임에 다시금 그들의 노력이 커 보엿섯다. 두만강의 본류 기를(길을) 막다른데 때까지 다다르고 또는 그 지류인 홍단수(紅湍水)를 또한 제일 상류까지 다달러서 두만강의 상류지방을 삿삿치 뒤지는 이번 행보의 우연이 아님을 늣기면서 일행은 악가도(아까도) 말한 바와 가치 국경이라던가 비적과 토벌이라던가 하는 늣김에서 해방되어 대자연에 도취하고 대자연의 방대한 규모에 또는 멀리 바라보이는 백두령봉(白頭靈峰)의 운표에 나타난 자태에 머리를 숙이고 뒷거름질을 하여 다시 삼장에으로 향하엿다.
(사진은 개척 피비적해가에 도착한 일행)
"개척동의 비적 피해가(被害家)에 도착한 일행"의 의미인 듯.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③➌ : 1939년 6월 22일

  • 1939.06.22 조선일보 7면 (이미지)
1939.06.22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③➌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 1939년 6월 23일

  • 1939.06.23 조선일보 7면 (이미지)
1939.06.23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⑤❺ : 1939년 6월 24일

  • 1939.06.24 조선일보 7면 (이미지)
1939.06.25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⑤❺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