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경비진 주파기(國境警備陣 走破記)는 1939년 6월 조선일보에 5회에 걸쳐 연재된 기사로, 당시 함경북도 국경 경비를 담당하던 경찰대와 두만강 대안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 부대와의 대치 상황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당시 김일성 부대는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 납치를 자행하며 일본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아래는 각 회별 기사 내용이다.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 1939년 6월 20일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1939.06.20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만주국의 치안이 점점 확립하여지는 반면에 여기서 몰려나게되는 비적들이 궁지에 빠진 남어지 차츰 백두산을 중심삼은 함경남북도 대안에 집결하여 조선 안을 호시탐탐하고 때로는 만용을 부려 월경침범까지 감행한다는 사실은 제일선의 치안유지에 적지안흔 두통꺼리가 되고잇다. 특히 지난 오월 하순 이래로 한 달 가까이 끄러나오는 김일성(金日成) 일파의 준동은 다만 치안유지에 지장이 될 뿐외라 나아가서는 북조선의 산업개발에도 크다란 지장이 생길 우려가 잇서 제일선 경비진은 갑짜기 긴장하여 이 화근을 근본적으로 절멸시키겠다고 철통가튼 경비진에 한 거름을 더 나아가 토벌대를 파견하여 일만양군(日滿兩軍) 호응아래 섬멸전을 게획하고 연안 수백리의 포위진을 베풀고 그물을 치고 조이드시 사방에서 차츰 조이고 잇다. 이 작전게획을 현지에 나아가 독려하고 또 제일선에서 분투하는 특별경찰대를 위문하게된 통정(筒井) 함북경찰부장 일행을 따라 기자는 삼엄하고 치떨리는 두만강 상류의 국경선을 빼지안코 답사할 기회를 어덧다. 이제 김일성 일당이 조선 안을 침범한 당시의 상황과 여기저기서 어든 정보를 종합하여 그들에 대한 약간의 시식을 전달하고저 한다.
지난 오월 이십이일 나제(낮에) 삼장(三長) 경찰서 관내인 개척동(開拓洞)에 비단의 주력부대가 침입하여 그곳에 잇는 북선제지회사 벌목장의 벌부(伐夫) 합숙소를 습격하여 남자만 열여덟 명을 붓드러가지고 그길로 가면서 구암(篝岩)에서 열아홉 명을 또 심포골(深浦谷)에서 두명 - 도합 서른아홉 명을 납치하여 약탈한 양식과 기물흘 질머지우고 대로은산(大蘆隱山) 등을 타고가고 또 한 부대는 원사동(元四洞) 골목에서 때를 가치하여 약탈하려 하엿스나 이때는 벌써 토벌대가 급보를 밧고 농사동(農事洞)에서 달려드는 순간이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형세를 관망하던 차에 오후 여덟시쯤 되어 토벌대의 추격이 점점 급박해젓스나 벌써 날이 저물어 행방을 모색하다가 이튼날 새벽에 이르러 증산(甑山) 근방에서 비단을 발견하여 격렬한 조우전이 전개되엇다.
격전 두시간 반 후에 비단은 마침내 이십삼일 석양에 장산령(長山嶺)으로 도망하니 조선 안에 침범한지 이틀만에 적은 완전히 퇴치하게 되엇다. 그러나 한편 그들은 국경은 넘엇스나 다시 그 길을 취하여 침범하려는 견제수단으로 이십오일 오후 아홉시 사십분 경에는 장산령 하류인 상삼수(上三水)에 나타나 월경을 꾀하엿스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장산령에 주력이 모여 동북방으로 이동하여 이십칠일 오후 여덟시 반쯤해서 칠십 여명의 비단이 상사동(上四洞) 대안인 상대동(上大同)에 들어와 이십구 명을 또 이와 동시각에 상일동(上一同) 대안의 동경평(東京坪)에서 아홉 명을 납치하고 식량 다수를 약탈하고 이십구일 오후 아홉시에는 삼장대안 이수평(二水坪)에서 열아홉 명을 또 그와 가튼 시각에 소옥석동 상촌(小玉石洞 上村)에서 주민 오십명을 제각금 붓드러 부락에 잇는 식량품을 약탈하여 가드니 --
삼십일 그 시각이 되자 다시 소옥석동 하촌에서 삼십삼 명을 노전동(蘆田洞)에서 아홉 명을 또 중촌(中村)에서 이십삼 명을 납치하고 그 다음날인 삼십일일 오후 일곱시에는 삼장대안의 홍기하(紅旗河) 경찰분주소(警察分駐所)에서 대마록구(大馬鹿溝)에 잇는 삼림경찰대(森林警察隊)에 보내는 식량품 수송대를 도중에서 기다리다가 말까지 아울러 약탈해가지고 다라낫다. 유월일일 오후 아홉시 반에는 사십여명의 비단이 삼장 대안에서 이십리쯤 되는 시만동(詩滿洞)에 침입하여 식료품과 주민 열네 명을 또 그날밤 열한시 지나서 이수평에 나타낫다가 경비대에 격퇴되고 그 다음날 새벽에는 대마록구에 나아가려다가 그곳 삼림경찰대에 격퇴 당하고 그뒤로는 두만강 대안부락에 즉접 나타나지는 못하고 근방에서 잠복하고 잇는 모양인데 그 동안 대안의 만주측락에서 납치한 주민만 일백 팔십구 명의 다수에 달하고 식량, 소, 말, 도야지 닭 등등의 피해는 자세히 조사할 방법조차 업스나 막대한 수효에 달할 것이라 한다.
조선에서 붓들려 간 자 중에는 오직 한 사람인 내지인으로서 굴본철차(堀本鐵次)군이 탈주해 오다가 발목에 총알을 밧고 경상을 당하고 개척동에서 붓들려간 전치원(全致元, 三〇)이 도망하다가 권총에 마저 즉사한 외에 나머지 삼십칠 명을 붓들린 뒤 일주일쯤되어 전부 무사히 석방되어 다시 못볼 줄만 알엇던 제집에로 돌아왔다.
나지면(낮이면) 밀림과 산속에 업디렷다가 석양부터 밤중까지 맹렬한 활동이 전개되면 여기저기어 거이(거의) 가튼 시각에 이처럼 막대한 피해를 보게되니 전전긍긍하는 주민의 불안은 더 말할 것도 업지만 종적을 몰라 추궁하지 못하거나 혹은 만나서 추궁하여도 번개가치 다라나버리는 그들을 토벌하는 경찰대의 고심이란 상상외에 큰 것이다. (게속)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 1939년 6월 21일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여름 업는 제일선(第一線) / 난로(暖爐) 불은 경비대(警備隊)의 유일(唯一)한 벗 1939.06.21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여름 업는 제일선(第一線)
난로(暖爐) 불은 경비대(警備隊)의 유일(唯一)한 벗

무산을 떠난 일행 일곱명(통정 경찰부장(筒井 警察部長), 편산 경부(片山 警部), 빈전 경일(濱田 京日), 김 매신(金 每新), 고교 북일(高橋 北日), 사지 북일일(士至 北日日) 급 오기자(及 吳記者))은 토비사령부(討匪司令部)가 잇는 삼장(三長)에 향하엿다.
도중에 요소요소 빈틈업시 째워진 경비진을 뚤코 두만강을 여페(옆에) 끼고 구비구비 양의 창자가튼 산비탈길을 달려 세 시간만에 목적지인 삼장에 도달하엿다. 삼륜(三輪) 고등과장 편강 서장(片岡 署長) 이하 다수의 영접을 바더 토벌대 본부인 삼장서에서 잠시 쉬인 뒤에 두만강을 건너 그 대안에 잇는 만주국의 부락 홍기하(紅旗河)에 건너가 역시 만주측의 토벌대 사령부에 경의를 표하엿다.
조선 안의 경비도 무던하지만 대안인 홍기하 시가는 완연 큰 전쟁이나 당하듯이 몹시도 긴장되어 잇섯다 길까에 지나는 사람 얼굴이라던가 점방에 안즌 사람 얼굴 할 것업시 아직도 불안과 초조한 가운데 잇다는 표정을 여실히 나타내이고 잇섯다.
〇〇부대에 경의를 표한 우리 일행은 누구나 호기심에 끌려서 만주담배를 사려고 점방에 들어갓는데 눈치빠른 장사치들은 우리가 뭇기도 전에 담배를 사자는줄 알고서 『론톤데 메유라—』하며 손을 내둘으는데 놀라지 안흘 수 업섯다.
세상이 소란하니 담밴들 제마음껏 배급이 될 리 잇스랴만 갑짜기 『토벌경기』 때문에 담배 재고품이 업서진 탓이겟지—〇〇부대장 역시 조선담배의 "마코—"로 견대는(견디는) 것이 도리켜 생각킨 바 잇섯다.
대안에 이처럼 소란 정경을 보면서도 태연스런게 자리잡은 삼장 시가가 얼마나 우리에게 위안을 주엇는지는 새삼스럽게 국경이 가로노혀 잇는 것을 늣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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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삼장을 떠난 일행은 농사동을 거처 그곳에서 다시 멀리 백두산의 기슭에 잇는 조선에서는 제일 끗다는 부락인 삼수펑(三水坪)과 상삼수(上三水) 두 부락을 향하여 고원지대를 올으고 또 올라 전후 여섯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두고 자동차를 억지로 모라 보앗다.
여기쯤 와서는 두만강도 한줄기의 개울로 변하여 아므런 각도로 보아도 강물이라는 명칭을 부처 부르기는 힘드럿다. 차라리 강물이라기 보다는 욱어진 숩(숲) 사이에 흐르는 잔잔한 시내물이라고나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너무도 떠러저 보이는 격에는 놀라지 안흘 수 업섯다.
아프로 한업시(한없이) 터저 보이는 개마고원(蓋馬高原)의 웅대하고 찬연한 광경에 부닥치자 일행은 이땅을 밟고 달고 잇는 순간에 『비적』이니 『토벌』이니 하는 술어를 모조리 이저버리고(잊어버리고) 다만 대자연에 혼연히 일치된 늣김박께는(느낌밖에는) 아무 것도 늣길 수 업섯다. 적은 시내물을 곳곳에 막어서 언(堰)을 만들어 떼(벌(筏))를 흘려 나리기에 편리하도록 해노흔(해놓은) 정경을 나려다보면서 또는 툭터진 고원에 제멋대로 자라난 고산식물(高山植物)의 가지가지 —— 뜰쭉, 은로매(銀露梅) 금로매(金露梅) 천년죽(千年竹) — 등을 비롯하여 여름도 모를 여러 가지의 초목이 무성하여 완연히 천연의 식물원(植物園)을 이루고 잇는 광경을 또는 길좌우에 욱어진 원시림(原始林)의 장관을 보면서 천왕당(天王堂) 홍암동(紅岩洞)를 거처 삼수령에 도달하엿다.
해는 벌써 서산에 기우러지고 이야기는 김일성 일당의 랑자한 횡포를 응징하자던 토벌대의 무용담으로 걸직하여젓섯다.
그러나 여기가 국경이요 또 백두산의 막다른 골목이라는 늣김을 주는데는 누구나 감격에 자자진 순간을 안가질 수 업섯는
어느 철을 구별할 것 업시 사시장동(四時長冬)인 이곳인지라 경비대가 들어잇는 곳곳마다 난로(暖爐)불이 피워저 잇고 게다가 요사이 온도를 무르니(물으니) 농사동에서 벌써 최저 령하 십이도요 최고 십이도라 하므로 그보담 상류인 삼상수나 상수평은 더 무러볼 것도 업시 조선에서는 제일 기후가 고르지 못한 걸로 자랑을 삼는 지방이니 인적은 끈허진 곳에 경비대만 강물을 바라보고 난로불을 벗삼아 물그럼이 서잇는 것이 한갓 기이한 늣김을 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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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은 다시 삼장을 출발하여 산골짝이를 더듬어서 이번에 비적의 습격을 바든 부락인 개척동(開拓洞) 구암(篝岩)과 또 신개척동(新開拓洞) 등지를 돌아서 흡사 고전장을 탐사하는 늣낌으로 답사를 게속하엿다. 가는 곳마다 『감회기픈 것은 청진이나 나남에서 일상 맛나는(만나는) 경관들을 그곳 현지에서 맛나는 늣김이다.
우선 원일동(元一洞)과 개척동에서 맛난 경비원들에 청진서원과 경찰부원들이 석겻는데(섞였는데) 한치나 자라난 수염 틈으로 이를 내노코 우스면서 반겨하는 광경에는 그들의 고초는 물론이어니와 국경경비의 어려운 직무임에 다시금 그들의 노력이 커 보엿섯다. 두만강의 본류 기를(길을) 막다른데 때까지 다다르고 또는 그 지류인 홍단수(紅湍水)를 또한 제일 상류까지 다달러서 두만강의 상류지방을 삿삿치 뒤지는 이번 행보의 우연이 아님을 늣기면서 일행은 악가도(아까도) 말한 바와 가치 국경이라던가 비적과 토벌이라던가 하는 늣김에서 해방되어 대자연에 도취하고 대자연의 방대한 규모에 또는 멀리 바라보이는 백두령봉(白頭靈峰)의 운표에 나타난 자태에 머리를 숙이고 뒷거름질을 하여 다시 삼장에으로 향하엿다.
(사진은 개척 피비적해가에 도착한 일행)
"개척동의 비적 피해가(被害家)에 도착한 일행"의 의미인 듯.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③➌ : 1939년 6월 22일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③➌ 일화(逸話)도 가지가지 / 항복권고(降服勸告)에 분반(噴飯)할 비단(匪團)의 진답(珍答) 1939.06.22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③➌ :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일화(逸話)도 가지가지
항복권고(降服勸告)에 분반(噴飯)할 비단(匪團)의 진답(珍答)

이처럼 대담무쌍하게도 조선 안의 경비진을 틈타서 침범한 그들과 토벌대인 조선경찰부대와의 조우전(遭遇戰)은 얼마만한 정도로 전개되엇던가—또는 그들 비단의 전투력은 어느 정도의 것인지가 시험되엇는가? 하는 점이 흥미를 끌게한다. 이제 이르러서는 〇〇〇과 합류제휴하여 일만(日滿) 군경으로 된 토벌단에 포위되어 오직 독안에든 쥐처럼 되어 잇지만 그들은 궁경에 빠질사록 더욱 본래의 표한하고 횡폭한 행동을 감행하여 문자그대로 신출귀몰하는 바 잇스니 이점은 절대로 소홀히 취급하고 말 것이 아니라고 토벌대 사령부측에서 말하는 걸 보아 당분간 이 토벌대의 역할이 커야할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래 조선경찰대와 부닥처 싸워본 일은 전후 합해 열한 번 그중 여섯 번은 조선 안에서 싸운 것이라 한다 당시 토벌대와 사이에는 상당한 전투가 일어낫던 모양인데
그중 몃 가지를 드러보면 다음과 가치 "유—모러스"한 전투담이 숨어 잇다.
(가) 오월 이십오일 밤 열시 좀 못되어서 상삼수평(上三水坪)의 강안을 경비중이던 모리부대(毛利部隊)는 약 열 명쯤 되어 보이는 비적가튼 부류들이 떼(벌(筏))를 타고 강을 건너 들어오는 걸 보고 즉시 비적이라 단정하고 연속사격을 삼십여 발이나 한 결과 그들은 무난이 배후의 밀림지대로 피신하는 체 하더니 근거지를 잡고나서는 경기관총을 내두르며 맹렬한 포탄을 보내고 잇더니 승산이 업섯던지 백색지대(白色地帶)로 들어가고 말앗다. 상당한 격전이메도 불구하고 쌍방에 손해개무(損害皆無)..
(나) 가튼 모리부대가 유월 초하로날 저녁 여덟시 반쯤 적을 찻느라고 강을너머 삼수평 대안에서 들어가는 기동령(箕洞嶺)에로 향하는 도중 강가에서 이십여 명의 적부대를 만낫스므로 교전하기 이십분 동안에 상당한 타격을 주엇다는데 그 다음날 다시 현장에 가본 결과
그곳에는 비단이 사용하던 물건으로 유기품(遺棄品)이 다음과 가치 흐터저 잇섯다 한다.
(一) 륙삭크(배낭(背囊)) 다섯개가 잇고 그 가운데는 암염(岩鹽)——다섯되, 엽연초(葉煙草)——오백 "몬메", 좁쌀(속(粟))——넉되, 고추가루——스홉, 면경(거울)—— 하나, 화장품——약간
(二) 밥짓는데 스는 세수대야 일곱개
(三) 만주경관의 정모 한 개, 외투 두벌, 담요 한 벌, 노루가죽 한장, 등등이 던더저잇는 걸로 보아 모리부대의 추격은 상당히 맹렬햇던 것이 알려진다.
조선과는 상관업는 이야기나 만주경찰대가 근거지인 홍기하(红旗河, 삼장 대안(三長 對岸))에서 석인구(石人溝)에 잇는 삼림경찰대에 식량품을 수송하는데 열 마리의 말을 련대하여 네 사람의 마부를 시켜 끌리고 오월 삼십일일 오후 네시 홍기하를 출발시켯든바 석인구에 못미처 오리 지점에 이르자마자 수십 명의 비단이 복병해 잇다가 쪼차나와 말과 식량품과 마부까지 모조리 채가지고 다라낫다. 그중에는 백미 여섯 섬과 밀가루 세 포대, 통조림 마흔여덟 개, 게다가 석유(石油) 스무 관 등이 끼어 잇섯다 한다.
지금까지의 토벌대 가운데는 만주 경관대에 한하여 이와가튼 장면이 간간히 번복되고 잇서 만경(滿警)의 질적 향상이 식자간에 부르지저지는(부르짖어지는) 소치라 한다 여기에 진기한 일화(逸話) 한 구절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우리 일행이 차저가기 얼마 전에 만경토벌대장 〇〇씨가 김일성 비단에 대하여 항복권고서(降服勸告書)를 써서 보내어 김일성 일파의 인식 부족함을 지적하여 깨우친 바 잇섯는데 거즛말가튼 참말로 그 회답이 〇〇씨에게 돌아왓다. 회답에 말하기를 『……네가 권고한데 대하여 답장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로서 이 기회에 우리의 하고저하는 바를 선명히 알려주자는데서 회답을 쓴다……너이들이 우리를 비적이라고 부르고……또 우리를 토벌한다고 하지만은 결국은 너이들은 우리에게는 우수한 무기 운반대에 불과한 역할박게(밖에) 아무 것도 못 할 것이다……』 그리고 피봉에는 『〇〇〇〇견(見)』이라 쓰고 발신자 명의는 역시 김일성의 부하인 오백룡(吳白龍)으로 되어 잇섯다 한다.
이말은 만경(滿警)을 모욕한 것이지만 적적한 국경경비진에서는 그 불순하기 짝이업는 호언이 한 화제꺼리가 되어 웃기고 잇다. 이것도 역시 권고문의 하나로 유명해진 것인데 만경(滿警) 내부의 요직에 잇는 조선인 부대장 〇〇〇씨가 오백룡에게
『……나는 귀하을 존경하고 잇스나 환경의 구속을 바다 본의에 어긋진 토벌행동까지를 귀하에게 감히 하게되니 민망하기 짝이 업소……빨리 귀하도 귀순(歸順)하여서 가치 일하는 것이 어떳소……나 역시 토벌대가 아니엇더면 귀하에 가담할 사람이엿소……』 운운의 가장 편지를 햇더니 경각에 회답을 보내 말하기를
『〇〇〇선생! 선생이 가정 사정으로 또는 주위 사정으로 우리와 가치 행동을 못 취한다는 데는 참으로 동정 안흘 수 업소……선생이 진실한 말로 사실이 그럿타면
우리와 언제나 손잡는 날이 잇겟지요………아프다 토벌대를 큼직하게 데리고 우리를 차저오시요. 일정한 장소에서 우리가 상봉하게 되어 손을 맛잡게 된다면 피차의 소원은 달할 수 잇서요…』라는 엉터리 답서를 보냇다 하는데 그 글 속에는 상당한 정도까지 세게 정세나 동양 정세를 알고 잇다는 것을 엿볼 수 잇섯다 한다. 이로서 산에서 산으로 약탈행각에 골몰하면서도 정신적으로 여유를 가젓다는 것은 주목할 현상이다.
——(계속)——
(사진은 농사동 망루와 보초병)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 1939년 6월 23일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후방교란(後方攪亂)을 몽상(夢想) / 수수께끼가튼 김일성(金日成)의 정체(正體) 1939.06.23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후방교란(後方攪亂)을 몽상(夢想)
수수께끼가튼 김일성(金日成)의 정체(正體)

비적이라 하면 누구나 마적(馬賊)을 연상하게 되지만 오늘의 만주국 특히 조선 대안에서 줄몰하고 잇는 비적이란 시간적으로 보아 매우 내용이 달러저 오늘의 비적은 공산군 즉 공비(共匪)를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잇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공비가 잇고 또는 종래로 뿌리박혀 잇던 민족주의 단체의 영향을 바든 분자가 끼어서 조선출생의 멤버를 구성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적으로 나려오던 분자가 개화(?)하여 시대의 탈을 쓰고 나타난 지나인 혹은 종래의 만주인으로 된 소위 청인부대(淸人部隊)의 두 가지 게통으로 나누어 잇스나 편성방법이나 훈련방식이 통일되어 공비로 나타난 오늘에 일으러서는 중공(中共)의 한 지대(支隊)라고도 볼 수 잇고 또는 소연(蘇聯)과 일맥상통한는 존재나 아닌가도 보이고 잇서 이러한 각도로 보는한 비적의 치안공작에 미치는 영향이란 경솔하게 보아치울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비적들 자신에 그 이름을 뭇는다면 그들은 말하기를 동북항일인민××군(東北抗日人民××軍)이요 그중 김일성 일파는 제육사에 소속되고 김일성 자신이 제육사장(第六師長)이란 직함을 가지고 잇다.
『그러면』 김일성이란 대개 어떠한 인물인가?
그는 본적을 함남 갑산군(甲山郡)에 두엇다 하는 말도 잇스나 평남 출생이란 말이 더 근사하다고 한다. 금년 서른 한 살 전후의 청년으로 일찌기 소연(蘇聯)에 가 『막사과』 공산대학에 배운 일이 잇다하나 그 진부는 가려낼 방도가 아즉 업다. 그리고 그 성과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는 말도 미들만한 자료가 업다. 다만 그가 오늘과가치 비단의 수령으로 투신하게 된 동기가 그 아버지가 일찌기 기미년(1919년)에 간도에서 총알에 마저 너머진데 잇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보고 잇다.
제육사장이라는 요직에 잇는 김일성은 누구의 명령에 움지기며 그가 호령하는 부대는 얼마나 되는가?
일설에 의하면 그는 양정우(楊靖宇)란 중국인의 지휘를 밧고 잇다하니 양정우란 동북총지휘(東北總指揮)나 아닌가 추측하고 잇다. 이래 김일성의 부하와 우군(友軍) 관게를 살펴보면 최현(崔賢) 일파와 오백용(吳白龍) 일파가 확실한 그의 부하임을 알 수 잇는 외에 나서지 안흔 부대와의 관게를 명백하게 알 방법은 업스나 지금에 간도성(間島省)을 중심으로한 동만일대에 출몰하는 비단으로 알려진 자를 드러보면 다음과 가튼데 적어도 김일성 부대와 즉접간접으로 연락이 잇지나 안흔가 보이는 정도로 그 이상은 상세치 못하다.
『전만주』를 통하여 토질이 제일 비옥하다는 평을 밧는 경백호(鏡泊湖) 가까히 잇는 비단으로 구점부대(九占部隊)와 안상길 비단(安尙吉 匪團) 주보중 비단(周保中 匪團) 진한장 비단(陳翰章 匪團) 등이 준동하고 잇는데 이들의 총세력은 약 육백명 내지 팔백명으로 취찰되고 잇다. 또 돈화현(敦化縣)과 연길현(延吉縣)의 경게선 근방을 근거로하는 양정우 별동부대(楊靖宇 別動部隊)와 왕련장 부대(汪連長 部隊)가 잇서 그 병력은 약 이백 내지 삼백명이 잇고 안도현(安圖縣)과 무송현(撫松縣) 사이에 끼인 일대에는 양정우 부대와 마덕전 부대(馬德全 部隊) 이사령 비단(李司令 匪團) 만순 비단((萬順 匪團)안악정(安岳亭) 비단 서장승 비단(徐長勝 匪團) 등이 약 팔백명 내지 천명이 잇고 화전현(樺甸縣)과 안도현 사이에 끼워 준동하는 최현 비단(崔賢匪團) 약 사오백 명이 잇는 외에 왕청현(汪淸縣)에서 작난을 잘 부리고 잇는 오개기 비단(吳開起 匪團)이 잇고 『그박게』도 소속불명의 비단이 다수히 잇는데 이들을 제외하고 나타난 것만을 합처도 이천 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산재한 비적들은 공비, 토비, 마적의 후예 등으로 간단히 중국공산당의 지령이나 "소련"의 후원과 지지아래 움지긴다고만 단정하기에는 어려운 점도 업지 안흐니 이리되면 일종 기괴한 존재라할 수박게(수밖에) 업다. 다만 그들은 만주국의 후방교란을 책동하는 항일반만 운동에 이용되고 잇는 것만은 숨길 수 업는 사실이라 하겟다.
—(계속)—
(사진은 원사동에 도착한 일행과 경비대)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⑤❺ : 1939년 6월 24일

  • 1939.06.24 조선일보 7면 (이미지)
1939.06.25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⑤❺ :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