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글 (더 이해하기 쉽고 자세한 서술로 업데이트함)
편집 요약 없음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3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4번째 줄: 14번째 줄:
유대인들의 사악한 세계 지배 계획서인 '시온장로회 수칙', 일명 '시온 의정서'가 유럽에 폭로되자 히틀러는 강렬한 반유대주의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공산주의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유대인의 세계 지배 수단으로 보고 강렬한 반마르크스주의와 반공주의 또한 가지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사악한 세계 지배 계획서인 '시온장로회 수칙', 일명 '시온 의정서'가 유럽에 폭로되자 히틀러는 강렬한 반유대주의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공산주의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유대인의 세계 지배 수단으로 보고 강렬한 반마르크스주의와 반공주의 또한 가지게 되었다.


히틀러는 극렬한 반마르크스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단순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는 절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을 박멸할 수 없으며 결국 나라를 빼앗길 수 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우파들도 공산주의자의 대중선동에 맞서 보복하기 위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똑같이 전체주의적인 대중운동의 힘으로 싸워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국민 대중 전체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제3의 위치라는 표어를 이용했다.
히틀러는 극렬한 반마르크스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단순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는 절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을 박멸할 수 없으며 결국 그러한 내부의 적들에게 나라를 빼앗길 수 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우파들도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대중선동에 맞서고 보복하기 위해 마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방식으로 오히려 더욱 과격하고 전체주의적인 대중운동의 힘으로 싸워야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국민과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내야 했기 때문에 제3의 위치라는 특별한 사상과 표어를 사용했는데, 동시에 이는 국가 경제에 있어 국가 전체의 양적 성장을 통한 국력 증진에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했으며 실제로 히틀러 정부 집권 5년 이내에 모든 계층의 독일 국민 전체가 부유해지는 결과로 나타났고, 이는 히틀러가 집권 이전에 주장하고 계속 밀어붙인 경제 정책과도 동일했다.


이후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뒤 1934년 6월 30일, 일명 [[장검의 밤]]사건을 일으켜 나치당 내 좌익세력들을 박멸해 나가기 시작했다. 장검의 밤에 히틀러는 나치당 내 좌익 성향인 [[슈트라서주의]]자들 등과 좌파 성향을 띄며 논란이 많은 돌격대 지휘관 에른스트 룀을 제거하였고 나치당은 강경 우파로 인정받게 된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뒤 1934년 6월 30일에 일명 [[장검의 밤]]({{llang|de|Nacht der langen Messer}})이라는 사건을 일으켜 나치당 내 좌익 성향인 [[슈트라서주의]]자들 등과 좌파 성향을 띄며 나치당 휘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llang|de|Sturmabteilung, SA}}) 지휘관인 [[에른스트 룀]]과 80여 명의 돌격대 간부들을 제거하였다. 히틀러는 순식간에 나치당 내 좌익세력들을 박멸해버렸고 나치당은 명백한 강경 우파로 널리 인정받게 된다. 히틀러는 휘하의 돌격대(SA) 지도자들이 정권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숙청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에른스트 룀의 지도 하에 돌격대는 정권이 아니라 독일의 정규군인 [[국가방위군]]({{llang|de|Reichswehr|라이히스베어}})에 맞먹거나 대신하려고 모색중이었다. 룀을 숙청함으로써 히틀러는 독일 국민 뿐 아니라 독일 국가방위군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까지 얻을 수 있었다. 장검의 밤 사건은 1934년 7월 2일에 조선의 동아일보에도 보도될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분류:사상]][[분류:파시즘]][[분류:전체주의]][[분류:반유대주의]][[분류:반공주의]][[분류:반마르크스주의]][[분류:인종주의]][[분류:국민사회주의]][[분류:극우]]
1934년 8월 2일,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가 87세의 나이로 서거하고 히틀러가 대통령의 권한을 넘겨받아 총리직과 대통령직을 겸직하는 총통이 되자 독일 국가방위군은 이제 헌법이 아닌 히틀러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각주}}
 
[[분류:사상]][[분류:파시즘]][[분류:전체주의]][[분류:극우]]

2024년 7월 13일 (토) 16:42 판

독일어: Nationalsozialismus

영어: National Socialism

개요

나치즘은 후에 독일 제3제국을 건국하고 총통이 된 아돌프 히틀러가 만든 인종주의 및 반유대주의, 반마르크스주의, 반공주의, 반자유주의가 결합된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분파이다. 나치즘(Nazism)은 독일어가 아닌 외래어이자 멸칭으로, 나치당원들은 스스로 NS라고 불렀다.

원래 국민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와 동일시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제2제국 내부에서 쿠데타를 선동하여 독일 제2제국의 '등 뒤에서 칼을 꽂은' 범인들이 유대인들과 공산주의자들로 밝혀지자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반유대주의와 반공주의, 반마르크스주의를 기본으로 삼았다. 나치즘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독일의 민족주의인 범게르만주의 또한 국민사회주의(NS)에서 파생된 파시즘 민족주의 분파이기도 하다. 좌익 성향의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와 우익 성향의 국민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는 좌우가 다른 개념으로, 나치즘은 국민사회주의(NS)를 따랐기 때문에 히틀러는 나치당 내 좌익들을 정권을 잡을 때만 잠시 이용하고 가차 없이 숙청해버렸다.

나치즘과 극우

대다수가 나치즘을 파시즘과 결부된 것이자, 극우라고 여기고 있으나, 이는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기도 한 이데올로기이다. 나치즘을 극우라고 주장한 것은 나치즘보다 좌익집단들이었다. 나치즘이 주장하던 강한 국방력의 근간은 대독일 신질서 건설과 반마르크스주의라는 명분이었으며, 이러한 주장으로 말미암아 당시 나치당 이외의 당보다 보수적이라고 인식됐다. 이런 보수적인 주장을 나치와 결부지어 우익으로 규명한다. 그러나 보수적이라 함은 상대적(relative)표현으로 우익을 100% 대변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실제로도 히틀러는 좌파와 우파의 이분법을 멸시하며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도움만 된다면 좌우에 개의치 않고 가져와서 이용하는 일명 '제3의 위치'를 추구하는 혼합주의를 기본 노선으로 삼았고, 나치즘을 소개할 때 제3의 위치라고 강조해서 표현했다.

유대인들의 사악한 세계 지배 계획서인 '시온장로회 수칙', 일명 '시온 의정서'가 유럽에 폭로되자 히틀러는 강렬한 반유대주의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공산주의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유대인의 세계 지배 수단으로 보고 강렬한 반마르크스주의와 반공주의 또한 가지게 되었다.

히틀러는 극렬한 반마르크스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단순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는 절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을 박멸할 수 없으며 결국 그러한 내부의 적들에게 나라를 빼앗길 수 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우파들도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대중선동에 맞서고 보복하기 위해 마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방식으로 오히려 더욱 과격하고 전체주의적인 대중운동의 힘으로 싸워야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국민과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내야 했기 때문에 제3의 위치라는 특별한 사상과 표어를 사용했는데, 동시에 이는 국가 경제에 있어 국가 전체의 양적 성장을 통한 국력 증진에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했으며 실제로 히틀러 정부 집권 5년 이내에 모든 계층의 독일 국민 전체가 부유해지는 결과로 나타났고, 이는 히틀러가 집권 이전에 주장하고 계속 밀어붙인 경제 정책과도 동일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뒤 1934년 6월 30일에 일명 장검의 밤(독일어: Nacht der langen Messer)이라는 사건을 일으켜 나치당 내 좌익 성향인 슈트라서주의자들 등과 좌파 성향을 띄며 나치당 휘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독일어: Sturmabteilung, SA) 지휘관인 에른스트 룀과 80여 명의 돌격대 간부들을 제거하였다. 히틀러는 순식간에 나치당 내 좌익세력들을 박멸해버렸고 나치당은 명백한 강경 우파로 널리 인정받게 된다. 히틀러는 휘하의 돌격대(SA) 지도자들이 정권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숙청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에른스트 룀의 지도 하에 돌격대는 정권이 아니라 독일의 정규군인 국가방위군(독일어: Reichswehr 라이히스베어)에 맞먹거나 대신하려고 모색중이었다. 룀을 숙청함으로써 히틀러는 독일 국민 뿐 아니라 독일 국가방위군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까지 얻을 수 있었다. 장검의 밤 사건은 1934년 7월 2일에 조선의 동아일보에도 보도될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1934년 8월 2일,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가 87세의 나이로 서거하고 히틀러가 대통령의 권한을 넘겨받아 총리직과 대통령직을 겸직하는 총통이 되자 독일 국가방위군은 이제 헌법이 아닌 히틀러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