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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十七日부터는 朝鮮人의 興奮도 좀 꺽기고 十八日에 李範奭將軍이 왓다갓다는 것도 쎈프란씨스코 放送으로 겨우 나중에야 알앗섯습니다. 그런데 그때 서울 거리에는 박헌영(朴憲永, 1900~1955)동무여! 地下에서 빨리 나오너라 하는 삐라가 鐘路에 붓고 이어 東震共和國이라하고 大統領에 이승만(李承晩) 副統領에 누구 內閣에는 누구누구를 써노흔 것이 붓기 시작햇는데 이것이 아마 壁報의 시작일 것입니다.}} | ||
===채만식(蔡萬植)의 중편소설 《소년은 자란다》=== | ===채만식(蔡萬植)의 중편소설 《소년은 자란다》=== |
2022년 2월 3일 (목) 16:00 판
동진공화국 조각명단(東震共和國 組閣名單)은 해방 당시 유포된 수많은 유언비어 중 하나이다. 해방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부터 동진공화국이 수립되며, 대통령 누구, 주요 각료는 누구라는 출처불명의 벽보와 비라가 전국 도처에 나돌았다. 명단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일성(金日成) 등 4인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 김일성의 존재가 국내에 아직 알려지기도 전에 그와는 다른 김일성이 해방 정국의 유력 인물로 거론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김일성 가짜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자료이다.
개요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의 동진(東震)은 동쪽 진방(震方)[1]의 나라 즉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일성 등 4인을 포함한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은 해방 이튿날부터 벽보와 비라 형태로 전국 각지에 나돌았지만, 실물이나 사진은 현재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안은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과 6.25 남침전쟁을 겪으면서 잊혀졌는데, 일본 패전 후 1946년 3월말까지 서울에 남아 일본인들의 본국 귀환 업무를 도운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가 1964년에 간행한 『조선 종전의 기록(朝鮮終戰の記錄)』[2]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유언비어에 불과한데다 후대의 기록이라 김일성 진위 문제와 관련해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근래의 문헌 전산화 덕에 해방 직후 북한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대중앞에 처음 출현하기 이전에 이를 기록한 문헌들이 몇 건 발굴되었다. 이는 북한에 김일성을 자칭하는 인물이 등장하기 전부터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이 각료로 거론될 정도로 유명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 김일성은 이승만 김구 여운형 급의 유명인물이어야 하므로 당시 국내 사람들이 그 존재를 전혀 모르던 소련군 88여단의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북한 김일성) 대위가 아니라, 바로 1920년대부터 이름이 유명했으나 실제 누구인지는 불분명한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으로 볼 수 있다.
동진공화국 각료명단에는 북한 김일성(1912~1994)보다 훨씬 더 나이도 많고 항일투쟁 경력도 길며 지명도도 높은 김규식(1881~1950), 조만식(188~1950), 김두봉(金枓奉, 1889 ~ 1961 ?), 김원봉(1898~1958), 박헌영(1900~1956)이나 김무정(1904~1951) 같은 사람들조차 거론되지 않으므로 여기의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될 수는 없다. 이 김일성은 빠짐없이 거론되는 이승만, 김구, 여운형 정도로 일찍부터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라야 하며, 연배도 그들과 비슷한 정도는 되어야 한다.
소련 군함을 얻어타고 비밀리에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하여 평양에 온 소련군 진지첸(김일성) 대위는 국내에서 무명인사에 불과했고,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으로 민심을 살피며 다니다 사람들이 김일성 장군을 주요 각료로 거론하며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같은 이름을 사용하여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한 것이다. 어릴 때 만주로 가서 거기서 성장하고 이후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에 있었던 북한 김일성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어린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고향마을 사람들 몇몇 외에는 국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진공화국 각료명단을 기록한 문헌들은 북한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증거이며, 현재까지 발굴된 기록들은 아래와 같다.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기록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의 동진을 東振 또는 東辰으로 쓴 기록도 있다.
북한에 김일성이라 자칭하는 자가 등장하기 전인 1945년 10월 14일 이전 기록이 특히 중요하다. 북한 김일성이 등장하기 전에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한 신문 기사도 몇 건 있는데[3][4][5], 거의 전설화된 인물이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정관해(鄭觀海)의 《관란재 일기(觀瀾齋日記)》
정관해(鄭觀海, 1873~1949)의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6]에는 동진공화국 조각명단과 함께 김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7][8]
1945년 8월 24일 (음력 7월 17일) : "신문을 얻어서 보니 쇼와(昭和) 천황이 4개국에 항복을 청한 것이 명확하다. 국호, 연호, 대통령, 내무 외무 대신의 설은 믿기 어렵다. [得新聞見之, 則昭和, 請降於四箇國明確, 若其國號, 年號, 統領, 內大外大之說, 皆不足信也.]"
김일성 군대는 말타고 천리마에 준하는 속도인 하루 5백리를 달릴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김일성은 거의 전설화된 인물이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만주 빨치산이나 소련군 시절 말타고 다니거나 기병부대를 거느린 적이 없다.
《최병채 일기(崔炳彩日記)》
전라북도 진산군(珍山郡, 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거주했던 최병채(崔炳彩, 1907~1974)가 쓴 《최병채 일기(崔炳彩日記)》 1945년 8월 18일(음력 7월 11일)자에도 아침 식사 후 지인들과 대전에 나갔다가 들은 바를 적고 있다.[9][10]
오윤환(吳潤煥)의 《매곡일기(梅谷日記)》
《매곡일기(梅谷日記)》는 강원도 양양(襄陽), 오늘날의 속초시 도문동에 살았던 유학자 오윤환(吳潤煥, 1872.11.16~1946.7.12)이 1891년 2월부터 사망하기 바로 전날인 1946년 7월 11일까지 쓴 약 56년 간의 일기이다.
- 《(國譯) 梅谷日記 : 梅谷 오윤환 유고집》, 속초 향토사연구소 엮음, (속초시, 속초문화원, 2007)
[p.1405 원문] 十二日 陽 出亭 在龍去。 自京來人 示以廣告書 東震共和國 大統領金玖(九) 總理大臣李承萬(晚) 內務大臣呂運亨 陸軍大臣金日成 外務大臣安在鴻。 宿亭家兒同仲元興實。
(원문의 김구와 이승만의 이름 한자 오자를 괄호 속에 바로 잡았다.)
- '매곡일기' 속 해방공간 < 명경대 < 오피니언 : 강원도민일보 2021. 6. 28

《중선일보(中鮮日報)》 1945년 8월 17일자
《중선일보(中鮮日報)》 1945년 8월 17일자는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 탄생(誕生)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11] 《중선일보(中鮮日報)》는 일제시대에 대전에서 일본어로 간행되던 신문이나[12] 해방 직후에는 우리말 기사와 일본어 기사를 섞어 보도했고, 간행 연도도 일본 연호 아닌 동진 원년(東辰 元年)이라 했다.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 탄생(誕生)
세기적 거보(世紀的 巨步) 반도(半島)에 진감(震撼)
........
조각 착착 진행중(組閣 着々 進行中)
금17일 조각완료 예정(今十七日 組閣完了 豫定)
조각 명단은 나오지 않는다.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안재홍(安在鴻)과 여운형(呂運亨)이 조각 작업중이며 17일에 발표 예정이라고 하였다.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이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정한 국호인 것으로 잘못 안 듯하다.
《주한미군사》
미군정청 사람들도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이 든 비라 하나를 얻어 보고 《주한미군사(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 Ⅰ > CHAPTERⅢ INTERMEZZO: AUGUST 1945 > The Russian Scare 1945년 9월 17일
- 한국현대사 사료총서2 주한미군사 1 > Ⅲ. 간주곡 : 1945년 8월 >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 1945년 9월 17일
원문 |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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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gratulations on the Independence of Chosen: The Dawn of Democracy in the East |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며: 동방 민주주의의 새벽 |
"동방 민주주의의 새벽(The Dawn of Democracy in the East)"이란 말은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을 번역한 말로 보인다. 辰은 보통 "진"으로 읽지만 "새벽 신"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晨(새벽 신)"과 같이 쓰이기도 한다. 황운(黃雲)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1944년 여운형 등과 함께 건국동맹(建國同盟) 설립에 참가한 사람으로 여운형계로 보인다.
미군은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을 박헌영, 여운형 등이 임의로 작성한 조선인민공화국 조각명단과 비교하며, 김구와 이승만을 명목상 지도자로 내세웠지만 공산당 계열이 작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인민해방보(人民解放報)
부산(釜山)에서 1945년 10월 8일 창간된 좌익지 『인민 해방보(人民解放報)』도 김구, 김일성, 여운형, 이승만 등으로 구성된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의 조각 명단(組閣名單)을 부산에서 처음 보도했다고 한다.[13] (보도 일자는 미상)
만주에까지 퍼진 동진공화국 루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비라는 국내 뿐만 아니라 만주에까지 퍼졌던 모양이다. 동아일보 1947년 1월 7일자 4면에 실린 만주에서 귀환한 유수생(流水生, 필명)의 수필(隨筆) 《전재민(戰災民) : 만주잔류동포(滿洲殘留同胞)를 생각하며》에는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을 때 들려온 국내 소식으로 다음과 같이 나온다.[14]
만주군 장교 출신으로 해방 직후 만주에서 동진공화국 수립 소식을 방송으로 들었다는 백선엽 장군의 증언과[15], 예비역 준장 이기건(李奇建, 1919~ ?) 의 증언도 있다.[16]
『신천지(新天地)』 1948년 8월호
김찬승(金燦承) 외, 《신문기자(新聞記者)가 겪은 8·15 <좌담(座談)>》, 『신천지(新天地)』, 제3권 제7호 (서울신문사, 1948년 8월) pp.74-81
- ..十七日부터는 朝鮮人의 興奮도 좀 꺽기고 十八日에 李範奭將軍이 왓다갓다는 것도 쎈프란씨스코 放送으로 겨우 나중에야 알앗섯습니다. 그런데 그때 서울 거리에는 박헌영(朴憲永, 1900~1955)동무여! 地下에서 빨리 나오너라 하는 삐라가 鐘路에 붓고 이어 東震共和國이라하고 大統領에 이승만(李承晩) 副統領에 누구 內閣에는 누구누구를 써노흔 것이 붓기 시작햇는데 이것이 아마 壁報의 시작일 것입니다.
채만식(蔡萬植)의 중편소설 《소년은 자란다》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이 1949년 2월 25일 탈고한 미발표 유고(遺稿)인 중편소설 《소년은 자란다》에도 해방 당시 떠돌던 뜬소문들 중에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이야기가 나온다.[17][18]
..........
고국에는 벌써 정부가 서 상해·중경(上海·重慶)에 가 있던 임시정부의 김구(金九)가 대통령으로, 김일성이 육군대신으로 모두들 들어앉았다더라.
국호를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라고 정하였다더라.
기차가 도문(圖們)까지는 겨우 가나, 조선 땅 남양 (南陽)에서부터는 일체로 불통이 되어 시방 수만 명이 남양에 모여 오지도 가지도 못한다더라.경향신문 기사
- 광복 10주년(光復十周年)의 발자취 (1) 8·15광복(八·一五光復) 1955.08.01 경향신문 2면
- 여적(餘滴) 1965.08.02 경향신문 1면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종전(朝鮮終戰)의 기록(記錄)》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19][20]는 경성제대 사학과(京城帝大 史學科 朝鮮史 전공) 출신으로 다년간 조선에서 살았고, 일본 패전 후 1946년 3월말까지 서울에 남아 일본인들의 본국 귀환 업무를 도운 사람이다.[21] 당시 일들을 기록해 두었다가 1964년 《조선종전의 기록(朝鮮終戰の記錄)》이란 책으로 간행했다. 해방 직후의 일에 대한 중요한 참고문헌이다. 여기에 나오는 동진공화국 각료명단을 종전까지 다수의 사람들이 인용하고 있었다.[2][22]
모리타 요시오는 퇴직 후 한국의 성신여대(誠信女大)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김효숙(金孝淑)의 증언
김붕준(金朋濬, 1888~1950)의 딸 김효숙(金孝淑, 1915~2003)의 증언이다.
- 반세기(半卋紀) 의 증언(証言) : 횃불은 흐른다 (24) 해방(解放) - 김효숙(金孝淑) 조선일보 1964.12.15 조간6면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1966년에 간행된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23]에도 다음과 같이 나온다.
- 평양 천지에서는 八월 二十五·六일 경까지의 해방 十일간이 자유의 황금시대(黃金時代)였다. 그러나 열흘 동안을 「시대」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짧고, 허무한 기간이었다
- ....
- 그러나 평온한 거리에도 때때로 정체불명의 정치적 벽보가 나붙어서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혼란된 정치정세를 의미하는 오보(誤報)였다.
- 「김일성 장군이 평양에 입성한다」
-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내각 명단」
- 그런 종류의 오보가 흥분된 민심을 자극했다.
당시 평양에도 동진공화국 내각명단 벽보가 나붙었으며, 김일성 장군이 곧 평양에 입성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평양에 온 소련군 진지첸 대위(북한 김일성)도 이런 상황을 당연히 보았을 것이고, 자신이 사람들이 귀국을 기다리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기로 한 것이다.
송남헌(宋南憲)의 『해방 30년사(解放三十年史)』
송남헌(宋南憲, 1914-2001)은 해방 직후 김규식(金奎植)의 비서였다.
- 송남헌 김운태 이정식 최창규 저, 『解放三十年史. 第1 - 4卷』, 성문각(成文閣), 1976.
- 송남헌 저, 제1권 《건국전야(建國前夜)》 p. 67
放送을 들은 일반국민은 總督政治는 물러가고 日本軍은 武力을 포기하여 당장 朝鮮獨立이 실현되어 新政府가 수립된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리하여 군중들은 노도와도 같이 흥분하고 獨立萬歲를 외쳤다.
송남헌의 아래 책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송남헌(宋南憲, 1914~2001), 《해방 3년사(解放 三年史) 1945 – 1948》, (서울, 까치, 1985) p.39
고하 송진우(古下宋鎭禹) 전기 《독립을 향한 집념(執念)》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의 전기(傳記) 《독립을 향한 집념(執念)》(1990) p.221에 나오는 내용이다.[24]
- 1. 아아, 8월 15일
최영희(崔永禧)의 《격동의 해방 3년》
최영희(崔永禧, 1926-2005)의 《격동의 해방 3년》(1996)에 나오는 내용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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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불명의 조각명단의 벽보가 곳곳에 나붙었다. 이 벽보에는 국호를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대통령 이승만, 총리대신 김구, 육군대신 김일성, 외무대신 여운형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이런 류의 벽보 조각이 많이 나타났다.김형수의 《문익환(文益煥) 평전》
문익환(文益煥, 1918~1994) 목사의 부친 문재린(文在麟, 1896~1985) 목사도 8.15 해방 직후 만주에서 방송으로 동진공화국 소식을 들었다.
- 김형수, 《문익환 평전》, (실천문학사, 2004) p. 234
그에 문재린 목사는 즉각 용정에 돌아와서 경호대장 전윤필을 찾았으 나 면회를 거절당했다.
손세일의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
- 孫世一의 비교 評傳 (7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建國準備委員會 3週日 -1945年 8月(中) - 월간조선 2010년 4월호
8월 16일부터 서울은 광복의 흥분으로 들끓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우고 태극기를 만들어 행진하기 시작했다. 건준은 서둘러 시민들의 자중을 당부하는 전단을 만들어 서울시내에 뿌렸다.
때를 같이하여 “해방된 조선에 곧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 수립된다”는 전단이 뿌려지고 요소요소에 ‘동진공화국’에 대한 벽보가 나붙었다. 미국의 이승만, 중국의 김구, 소련의 김일성(金日成)이 국내의 여운형과 손을 잡고 ‘동진공화국’을 세운다는 내용이었다. ‘동진공화국’ 소문은 서울시내는 물론 지방과 만주의 옌볜(延邊) 등지에까지 급속히 유포되었다. ‘동진공화국’의 대통령은 이승만이고, 총리대신은 김구, 육군대신은 김일성, 외무대신은 여운형, 그 밖에는 미정이라는 벽보도 있었다.김사묵(金思默)의 해방 당시 회고
김사묵(金思默, 1930~ )은 함경남도 고원 출생으로 1977년 육군 중령 예편 후 기아자동차에서 근무했다.
- 70년 전 기억을 더듬어 작성한 나의 8.15 이야기 Pub 조선 2015-08-28
그리고 나서 점심을 먹고 큰 형님과 집에서 약 30리(7.5 마일) 떨어져 있는 미둔리라는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 길은 부래산이라는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미둔리에는 저의 작은아버지가 사셨는데 그 날은 그 동네에서 기형제를 지내는 날이어서 돼지를 잡기에 다같이 식사를 위해 떠난 것이었고, 우리 형제는 저녁 무렵에 미둔리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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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날 저녁에는 우리 형제뿐만 아니라 다른 사촌 형제, 친척들이 모여서 오랫만에 돼지 국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음식을 나누면서 이야기 꽃이 피기 시작하였고, 어디에서부터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국호를 “동진 공화국”으로 한다느니, “고려공화국”으로 한다느니, 총리대신(국무총리의 일본식 직명)은 김구가 되고, 육군대신은 김일성, 농림대신은 강기덕이 된다느니 하면서 그전에는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이름들도 거론되었습니다.
물론 김일성이란 이름은 그 때 당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요. 그는 축지법을 써서 하루 밤에 몇 백 리를 갈 수 있는 독립군으로 신화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편, 저희 사촌 형 중에 말이 조금 빠른 분이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조선사람들 별 수 있겠니. 며칠만 있으면 또 서로 싸울텐데…”라고 하자 저는 속으로 얼마나 화가 나던지 그가 몹시 미웠어요.동진공화국과 조각명단이 나오는 기타 문헌
- 유병석(柳炳奭, 1936~1995), 《동진공화국》, 『철학과 현실』 1990년 봄호(통권 제4호, 1990.03) pp.278 - 281
- 《동진공화국》, 『왕빠 깝빠 : 유병석 에세이집』 (서울: 한양대학교출판원, 1996) p.304
-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 (서울, 나남, 1996) : 2권 p.227
- 강원용(姜元龍, 1917~2006), 『역사의 언덕에서 ─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 체험(1) 엑소더스』, (한길사, 2003) p. 185
- 《조만제(趙萬薺) 증언(證言)》, 정신문화연구원 편, 『내가 겪은 건국과 갈등』, (선인, 2004) pp. 62~63
- 조만제(趙萬薺, 1923~2021)[26]는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의 조카이며,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숙부의 평양행을 수행했다.
참고 사항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은 비록 유언비어에 불과하지만, 해방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일성을 들고 있었다. 이들 중 이승만, 김구, 여운형은 남한의 해방정국을 주도하였고, 명성만 있고 실체는 불분명한 김일성의 이름을 소련군이 데려온 꼭두각시 진지첸 대위가 사칭하면서 소련군의 도움으로 북한의 실권을 장악했다.
1944년 미군이 작성한 유력 조선인 명단
1944년에 미군이 만든 참고자료에는 한국이 해방될 경우 가장 유력한 인물로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3~1950),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 양주삼(梁柱三, 1879~?) 박사,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6~1945) 등 5인을 들고 있는데, 모두 당시 국내에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는 조만식은 북한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으나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김성수는 대한민국 건국 후 2대 부통령을 지냈고, 다른 사람들은 정치활동은 하지 않았다.
- 美, 1944년 조선 유력인사 성향평가표 작성 연합뉴스 2008-08-08 06:37
- <조선 유력인사 5명 美 인물평가 내용> 연합뉴스 2008-08-08 06:42
- 일제강점기 한국 지도자 평가 1944년 미군문서 발굴 동아일보 2008-08-09
- 광복 1년전 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人' 평가표 조선일보 2008.08.09 / 종합 A2 면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조각명단
- 조선인민공화국 조각명단
-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명단 1945.09.06 발표 : 매일신보 1945년 09월 07일자
- 전국인민위원 명단 기사 원문에는 김일성(金日成) 아닌 김일성(金一成)으로 되어 있다.
- 조선인민공화국 조각 명단 매일신보 1945.09.15 일자
- 조선인민공화국 조각 명단 : 朝鮮人民共和國發表(九月十四日午後三時)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년 09월 24일 1면
9월 14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조각 명단은 박헌영 계열이 임의로 작성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에 빠짐없이 나오는 사람 중 유독 육군대신 김일성만 나오지 않는다. 유언비어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과 달리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작성한 명단이므로 이름은 유명하나 실제로는 누군지 잘 모르는 김일성은 제외했을 것이다. 이보다 앞선 9월 6일에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명단에는 김일성(金一成)이 들어 있는데,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 동진공화국 육군대신으로 거론되던 김일성으로 보이며, 직무가 특정되지 않는 자리에는 지명도만으로 선임해도 별 문제될 것이 없어서 일 것이다. 당시는 이승만, 김구 등 해외에 있던 인사들이 귀국하기 전이므로 본인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임의로 작성한 명단이다. 명단 작성에 간여한 박헌영이나 여운형도 당시까지는 소련군 88여단의 존재나 진지첸 대위(북한 김일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88여단의 존재나, 김일성의 소련군 경력이 제대로 밝혀지는 것은 1990년 이후이고, 당시 소련군정이나 김일성 본인도 그의 소련군 경력을 극구 숨겼기 때문에 외부 사람들은 북한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귀국길의 북한 김일성 일행이 거명한 유력 인물
진지첸(북한 김일성) 대위를 비롯한 소련군 88여단 조선인들은 1945년 9월 중순 육로로 입북을 위해 하바로프스크를 떠나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 도착했으나 일제가 기차 터널을 파괴하여 북한으로 가는 철길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역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이기건(李奇建, 1919~ ?)이 그때의 대화에 대해 증언했다.[16][27]
......
「하루빈」가는 기차를 타려고 목단江驛前(강역전)을 서성거릴 때입니다. 그때가 아마 八月(팔월) 하순경이 아닐까요. 驛構內(역구내)에 소련군장교 三(삼), 四十(사십)명 가량이 몰려있어요. 가까이갔더니 中國(중국)말로 얘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 어투로 봐서 韓國人(한국인)임이 틀림없었읍니다. 나는 中國語(중국어)에 능했지요. 그래서 그중 인상이 좋아보이는 자에게 다가가 우리말로
"당신 朝鮮(조선) 사람 아니요"
하고 반갑게 말을 붙였더니 그 말엔 대꾸를 않고
"당신은 누구요"
하고 우리말로 되물어요. 그래서
"나도 조선사람이요"
했더니
"우리가 급히 조선으로 들어가려는데 왜놈들이 기차터널을 폭파해서 못 가고 있소"
라고 대답합디다. 당시 목단江(강)에서 韓國(한국)의 청진 회령으로 들어가는 철도가 있었지만 咸鏡道(함경도)에서 가까운 老松嶺(노송령) 터널을 日軍(일군)이 폭파해서 막히는바람에 교통이 두절됐었지요.
그리고는 이어 "지금 朝鮮內部事情(조선내부사정)이 어떻게 됐느냐"고 캐물어요. 그래서 목단江市(강시)에서 "朝鮮(조선)에 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이 탄생됐다"【注(주) : 해방직후인 八(팔)월하순 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이라는 벽보내각이 나붙었으나 그 출처는 모른다】는 放送(방송)을 들은 기억이 떠올라 그 말을 전했더니 그 소련軍上尉(군상위) 복장을 한 韓國人(한국인)은 "金九(김구)요, 李承晩(이승만)이요"하고 물읍디다. 모른다고 했읍니다.
"우리는「블라디보스독」으로 일단 가서 거기서 배타고 朝鮮(조선)으로 들어가겠소"
라고 말한 일이 있읍니다. 그런데 그 일당이 누구인지 모르고 헤어졌다가 내가 四七(사칠)년 북한에가서 소위 人民軍(인민군) 창설에 관여하면서 보니까 그때 목단江驛(강역)에서 보았던 그 蘇聯軍上尉(소련군상위)가 바로 北傀(북괴) 괴뢰軍總參謀長(군총참모장)으로 올라앉은 안길(安吉, 1907~1947)이었읍니다. 安吉(안길)이와 함께 있던 中尉(중위)에서 소좌에 이르는 三十(삼십)여명의 소련군 장교중엔 나중에 北韓(북한)을 틀어쥔 金日成(김일성) 金策(김책) 金一(김일) 崔賢(최현) 林春秋(임춘추)등도 서있었다고 봅니다. 아마도 金日成(김일성) 일당이 韓國(한국)으로 나오고 있던 한 장면이었다고 여깁니다.
귀국길에 오른 북한 김일성 일행은 오랜 외국생활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세가 이승만, 김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이 국내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이기건이 위와 같은 증언을 할 1972년 당시에는 김일성 일행이 기차로 귀국하려고 실제로 만주 무단장 역까지 갔다가 철로가 막혀 블라디보스톡에서 소련 군함을 타고 입북했다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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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진방(震方)은 팔방(八方)의 하나로 정동을 중심(中心)으로 한 45도 각도(角度) 안의 방위(方位)를 가리킨다.
- ↑ 2.0 2.1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 『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東京 : 巖南堂書店, 昭和39 [1964] : p.81
-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1권 일본 · 미국보도기사 / 일본보도기사 / 165. 피로 물들인 조선의 독립운동, 전쟁과 함께 치열화, 앞길에 여전히 수많은 파란 : 『朝日新聞』(東京版), 1945년 10월 3일. 국사편찬위원회 2011년 06월
- ↑ 名士의 片影(其五), 金日成氏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1면 기사.
- ↑ 莫府(모스크바)서 작전을 연구(作戰을 硏究) / 김일성 장군(金日成 將軍)은 건재 활동 중(健在 活動 中) 자유신문(自由新聞) 1945년 10월 17일자 2면
- ↑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 해제(解題) 국사편찬위원회
- ↑ 정관해(鄭觀海, 1873~1949),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 한국사료총서 제44집 (국사편찬위원회 , 2001년 12월 30일)
- ↑ 鄭觀海 著, 觀瀾齋日記 : 韓國史料叢書 第44 (과천 : 國史編纂委員會, 2001) pp.1055 ~ 1057. (국회도서관 온라인 원문보기)
- ↑ 崔炳彩日記 5 (한국사료총서 제59집) > 崔炳彩日記(一九四五年 下) > 七月 > 七月十一日己未(陽八月十八日、土曜日) 국사편찬위원회 2017년 12월 22일
- ↑ 崔炳彩日記. 3-5 : 韓國史料叢書 ; 第59 (과천 : 국사편찬위원회, 2017) pp.529~531. (국회도서관 온라인 원문보기)
- ↑ 11.0 11.1 국호(國號)를 동진(東辰)으로 표기한 1945년 8월 17일자 [중선일보(中鮮日報)] Kobay Auction 126회 2010년 6월 19일
- ↑ 일제강점기 일어신문기사 수록 대전사료총서 발간 연합뉴스 2015-11-08
- ↑ 『인민 해방보』 : 부산향토문화백과
- ↑ 유수생(流水生, 필명) 수필(隨筆) 《전재민(戰災民) : 만주잔류동포(滿洲殘留同胞)를 생각하며》 1947.01.07 동아일보 4면
- ↑ 白善燁(백선엽) 回顧錄(회고록) 軍(군)과 나 (11) 5년만의 平壤(평양) 1988.09.01 경향신문 5면
- ↑ 16.0 16.1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 ↑ 채만식의 미발표 유고(遺稿) 「소년은 자란다」발견 중앙일보 1972.08.05 종합 4면
- ↑ 채만식(蔡萬植, 1902~1950), 「소년은 자란다」
- ↑ 모리타 요시오 세계한민족문화대전
- ↑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
- ↑ 조갑제(趙甲濟), 일본인들이 잊지 못하는 安在鴻의 8.15 연설 조갑제닷컴 2013-03-01
- ↑ 日人 森田(일인 삼전)씨가 간추린 「朝鮮終戰(조선종전)의 記錄(기록)」 (上) 1967.08.15 동아일보 4면
- ↑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고당전·평양지간행회(古堂傳·平壤誌刊行會), 평남민보사(平南民報社),서울, 1966 : pp.170~171
- ↑ 《독립을 향한 집념(執念) : 고하 송진우 전기(古下宋鎭禹 傳記)》 (東亞日報社, 1990년 5월) p.221
- ↑ 최영희(崔永禧, 1926-2005), 《격동의 해방 3년》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p.6
- ↑ [가신이의 발자취] 조만제 삼균학회 이사장을 보내며 한겨레신문 :2021-07-11
-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