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그라드 전투
Schlacht von Staling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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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의 상징인 바말리 분수. 1943년 촬영
기본 정보
날짜 1942년 8월 21일 ~ 1943년 2월 2일
장소 소련 스탈린그라드
결과 소련의 결정적인 승리
  • 독일 제6군의 궤멸
  • 소토성 작전을 비롯한 소련군의 반격 작전 시작
교전국
독일 국기.jpg 독일 제3제국
루마니아 국기.jpg 루마니아 왕국
이탈리아 국기.jpg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국기.jpg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국기.jpg 크로아티아 독립국
지휘관
군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돈 전선군
제28군
제51군
제57군
제62군
제64군

남서부 전선군
병력
초기

병력 270,000명
야포 3,000문
전차 500대
항공기 600대 - 1,600대
소련군의 반격 당시
병력 ~600,000~1,011,000명

독일 제3제국 400,000명+
루마니아 왕국 143,296명
이탈리아 왕국 220,000명
헝가리 왕국 200,000명
히비 40,000명

야포 10,250문
전차 640대+

항공기 732대(402대 운용 가능)
초기

병력 187,000명
야포 2,200문
전차 400대
항공기 300대

소련군의 반격 당시
병력 1,143,500명+
야포 13,451문
전차 894대

항공기 1,115대
피해 규모
735,154~1,068,374명

독일 제3제국 300,000~600,000명
루마니아 왕국 158,854명
이탈리아 왕국 114,000~114,520명
헝가리 왕국 143,000명
히비 19,300~52,000명


항공기 900대, 전차 1,500대, 야포 6,000문 파괴됨

항공기 744대, 전차 1,666대, 야포 5,762문 적이 노획
1,347,214~2,672,224명+

674,990~2,000,000명+ 전사
672,224명 부상/병듦


항공기 2,769~5,654대 손실
전차 4,341대 손실

야포 15,728문 손실

스탈린그라드 전투(독일어: Schlacht von Stalingrad, 러시아어: Сталинградская битва)는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8월 21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시내와 근방에서 소련군과 독일 제3제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추축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8월 21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스탈린그라드 시내와 근방에서 유럽 추축군소련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최소 200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2차대전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1][2]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후 벌어진 약 6개월의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막을 내렸으나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본격적인 미국의 렌드리스 지원을 받아 전투력이 대폭 향상되어 독일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독일군의 상승세를 꺾고 전세를 역전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3] 이 때 미국이 무기대여법을 통해 소련에 과도한 전략 물자 지원과 기술이전을 한 것은 전략적인 실책이었다는 평가가 냉전 시기부터 제기되고 있다.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8월 독일 제3제국소련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한 후,[4] 같은해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5] 다음해에 독일은 공중폭격과 기갑부대의 기동력을 앞세워 속전속결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수중에 넣은 후, 벨기에 지역으로 우회하여 마지노선을 무력화시키며 프랑스를 공격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독일군 방어에 실패하며 됭게르크 철수작전을 통해 6월 4일부로 유럽 대륙에서 철군하였고, 독일군은 6월 14일에 파리를 점령하며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냈다.[6]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독일 측에 가담하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으며, 1940년 9월 27일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삼국 동맹 조약을 맺었다. 나치 독일은 영국과 화해정책을 수립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5] 소련이 영국과 연대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소련에 대한 선제공격을 계획하였다.[7] 그러나 이탈리아가 단독으로 독일에 우호적이던 그리스를 침공하여 발칸 전선을 열었다가 패퇴하기 시작했고 연합군의 발칸 반도 상륙을 우려한 독일이 참전하여 발칸 반도를 제압하는 1개월 동안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 개시가 지연되었다.

모스크바 공방전

1941년 6월 22일 독일군과 추축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했다.[6] 독일은 연전연승하였고 기습을 당한 소련은 1941년 여름과 가을에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12월에 치룬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밀리며 개전 후 첫 패배를 기록하였다.[8] 겨울 전투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데다가 보급까지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 공방전을 기점으로 소련은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1942년 봄까지 독일군은 전선 안정화에 주력했다. 중부 집단군의 손실이 컸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대한 재공격은 포기하였다. 독일군의 기본 전략은 방비가 허술한 곳을 집중 공략하여 최대의 성과를 얻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은 적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봤다. 게다가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1941년 12월에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9] 미국이 참전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히틀러는 미국이 유럽전에 참전하기 전에 동부 전선을 끝내거나 또는 최소화하려고 했다. 그래서 코카서스의 대유전 지대를 점령하여 소련군의 연료를 고갈시키고 부족한 독일군의 연료 문제도 해결하며 가능하다면 북아프리카에서 동진하는 에르빈 롬멜독일 아프리카 군단(DAK)과 중동에서 합류를 꾀하기도 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 제3제국이 소련의 유럽 영토를 점령하고자 시작한 바르바로사 작전모스크바 공방전의 실패와 함께 끝나자, 방어 대비가 되지 않은 약점에 공격을 집중하는 독일군의 전통적인 정책에 따라 히틀러는 소련 중서부 정면인 모스크바나 이미 포위를 진행중인 소련 북서부 레닌그라드 대신 소련 남서부의 바쿠, 마이코프, 그로즈니 등의 소련 최대 유전들이 밀집된 카프카스 유전지대를 점령함으로서 중동에서 소련으로 올라오는 미국산 렌드리스 보급로까지 차단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고 결정하였으며 이는 청색 작전으로 명명된다.

독일 국방군 남부집단군의 청색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남북으로 길게 뻗은 볼가 강을 낀 스탈린그라드가 당시 남아 있었던 유일한 소련 남서부 운수의 중심지이자 핵심 도시였으므로 독일 제6군에 스탈린그라드의 점령 명령 역시 하달된다.

스탈린그라드의 중요성

러시아 내전에서 스탈린은 백군의 공세로부터 짜리친(당시 스탈린그라드의 명칭) 방위에 큰 공훈을 세웠다. 그 뒤에 스탈린이 산업화를 밀어붙이면서 이곳은 각종 산업시설이 건설되어 급속도로 개발되었고,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이름은 1925년 그 밑의 공산당 당수가 스탈린에게 선물한 결과이다.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카스피 해와 북부 러시아를 잇는 수송로인 볼가강의 주된 산업 도시였고, 이곳을 점령하면 코카서스로 전진하는 독일군 좌익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게다가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도시를 점령한다는 것은 이념적으로나 선전 면으로 소련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스탈린도 이 점을 알고 있었고, 총을 들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이곳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10]

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 기갑부대의 능력은 떨어졌으나 짧은 소화기(小火器)가 위력을 발휘하는 시가전에서는 독일군에게 크게 뒤지지 않았다.

청색 작전

독일 남부 집단군은 코카서스의 유전 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러시아 남부의 스텝 지대를 꿰뚫는 공세를 시작하였다. 히틀러에게 유전 지대의 점령은 다른 장군들이 권고하는 모스크바 점령보다 더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러시아 남부 전선에 더 많은 병력과 지원을 했다. 여름 공세의 암호명은 “청색 작전”(독일어: Fall Blau)이었다. 여기에는 독일 6군, 17군, 4기갑군, 1기갑군이 참가했다. 1941년 점령한 우크라이나의 각 지점에서 공세를 개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작전에 참견해서 집단군을 두 개로 나누었다.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남부 A 집단군은 제17군과 제1기갑군과 함께 코카서스로 진격을 계속하도록 했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제6군과 호트4기갑군을 포함하는 남부 B 집단군은 동진하여 볼가강 연안의 스탈린그라드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B 집단군은 막시밀리안 폰 바이크스가 지휘했다.

청색 상황의 원래 이름은 지크프리트 작전(독일어: Unternehmen Siegfried)이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5일, 히틀러는 이 작전명을 청색 작전으로 바꾸고, 각 부대에 명령서를 하달했다. 작전은 4단계로 나뉘었다.

  1. 보로네시를 점령하여 측면에서의 소련군의 위험을 제거한다.
  2. 돈강을 도하하여 돈 강 너머의 소련군을 격파한다.
  3.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여 철로를 점거한다.
  4. 소련 남부 코카서스 유전 지대를 장악하고, 이란 국경까지 진격한다.

청색 상황의 개시일은 원래 1942년 5월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이 크림반도세바스토폴 포위에 참가 중이었기 때문에 6월에 세바스토폴이 함락될 때까지 몇 차례 연기되었다. 이 동안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소련군의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으나, 독일군은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하지 않고 이미 배치되어 있던 병력으로도 소련군 공세를 막아냈다. 그래서 제2차 하리코프 전투에서 소련군의 돌출부를 잘라 버리는 전투가 행해져 5월 22일에는 소련군의 대규모 병력이 포위되었다.

청색 상황은 최종적으로 6월 28일에 개시되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넓은 스텝 초원에서 거의 저항을 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무질서한 패주를 시작했다. 저항선을 구축하려는 여러 시도가 다른 독일군 부대의 측면 포위로 좌절되었다. 소련군은 7월 2일 하르코프 북방의 포위망과 일주일 후 밀레노보로스토프 근방의 포위망에 갇혀 각각 섬멸되었다.

그동안 헝가리 제2군과 독일 제4기갑군은 보로네시 공세를 개시하여 7월 5일 함락시켰다.

파일:Eastern Front 1942-05 to 1942-11.png
독일 청색 상황 상황도

스탈린그라드를 향하는 B 집단군의 초기 진격은 매우 순조로워 히틀러는 이에 소속된 제4기갑군이 코카서스로 동진하는 A 집단군에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6군과 4기갑군이 같은 도로를 사용하게 되어 지역의 부족한 도로 사정과 맞물려 대규모의 교통 정체를 야기했다. 이 지연은 매우 길어서 적어도 1주간의 진격이 지체되었다. 이렇게 되자 히틀러는 다시 마음을 바꿔 다시 4기갑군에게 스탈린그라드 공략에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7월의 하순까지 독일군은 소련군을 돈강까지 밀어붙였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은 동맹국인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을 이용하여 방위선을 구성하고 있었다.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로부터 수십 킬로미터까지 접근했고 그들의 남방에 있던 4기갑군은 시의 공략을 위해 북방으로 진격로를 돌렸다. 남방에서는 A 집단군이 코카서스를 향해 돌진 중이었으나 진격속도는 둔화되었다. A 집단군은 B 집단군을 지원할 수 없는 먼 남쪽까지 진출하였다.

이제 독일군의 의도는 소련군 지휘관들에게 분명해졌다. 소련군의 7월 작전 계획은 스탈린그라드를 방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독일군의 공세 앞에 동쪽으로 후퇴하던 소련군 부대는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스탈린그라드의 동쪽은 폭이 넓은 볼가 강이었고, 강을 넘어 다른 소련군 부대들이 배치되었다. 이런 부대들이 새로 62군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인근의 64군(슈밀로프 중장 지휘)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이루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은 안드레이 예료멘코 대장이 지휘했고, 시내에 포진한 62군은 처음에 로파틴 중장이 사령관이었으나 그가 수비에 비관적이었고 병력을 볼가 강 너머로 후퇴시켰기 때문에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으로 교체되었다. 소련군의 목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스탈린그라드 시를 사수하는 것이었다.

이쯤되니 독일군의 의도를 눈치챈 스탈린도 스탈린그라드 결사 사수를 명령하며 독소전쟁 개전 당시 내렸던 후퇴 금지령에 더해 스탈린그라드 인민 피난 금지령과 소련 최초의 형벌부대 창설 명령까지 내리며 말 그대로 후퇴하는 자들은 모조리 사살하는 독전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독일 국방군은 막대한 양의 폭격이 끝나자마자 스탈린그라드 시가지 점령을 위해 진입하나 무장한 주민들과 소련군 모두를 상대해야 했고 도망갈 곳이 없는 소련인들은 좀비 떼처럼 달려들며 진격이 예상보다 지연되기 시작했다.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초기 전투

전투는 시가지에 대한 독일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도심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스탈린은 방위 부대의 사기를 위해 민간인이 시를 떠나 피난 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피난 행렬이 방위 부대의 소통에 방해되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방위망을 구성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8월 23일 단 하루의 대규모 폭격으로 많은 인명이 죽고 많은 건물이 돌과 잿더미로 변했다. 이날 독일 공군 폭격기 600대가 도시에 공격을 개시해서 불지옥으로 만들었고, 시민 약 4만여 명 이상이 사상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11]

소련군의 초기 방어 임무는 제1077방공연대가 맡았는데, 이 부대는 주로 고사포를 보유하여 지상 목표에 대한 교전법은 거의 훈련받지 않은 여성 지원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 부대원들은 그들의 위치를 고수하여 진격해 오는 독일 전차와 교전했다. 독일군 제16기갑사단은 제1077연대의 모든 37개의 고사포를 모두 파괴하거나 우회할 때까지 이들과 싸워야 했다고 한다.[12] 전투의 초기에는 직접적으로 군수 물자를 생산하지 않는 노동자들이 대거 도시 방위에 참가하였다. 한동안 탱크는 계속 시내의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도색도 되지 않거나 조준경도 없는, 갓 출고된 탱크를 공장 노동자 가운데 자원자들이 몰고 전선에 나갔다.

8월 하순까지 독일 B 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볼가 강에 이르렀다. 남쪽을 향한 다른 진격도 이어졌다. 9월 1일까지 소련군은 독일군의 포병과 폭격에 노출되어 위험한 볼가 강 도하를 통해서만 스탈린그라드 내의 부대들에게 보급과 지원을 행할 수 있었다.

치열한 시가전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 위에서 소련군 제62군과 제64군은 무너진 집과 공장을 이용하여 방어 거점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전투는 치열했고 잔혹했다.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예상 생존 시간은 24시간 미만이었다. 1942년 7월 27일에 내려진 스탈린의 227호 명령에 따르면 상부의 명령 없이 위치를 벗어나는 모든 자는 즉결 처분에 처해졌다. 사수 아니면 죽음이었다. 어쨌든 수많은 소련군 후퇴병과 탈주병이 이런 즉결 처분으로 사살되었다. 물론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독일군도 커다란 손실을 보고 있었다.

독일군의 군사 원칙은 기갑, 보병, 공병, 공군의 지상 지원이 잘 조화된 협공 작전이었다. 소련군은 여기에 대응하여 항상 독일군에게 가능한 가깝게 근접전을 시도했다. 추이코프는 이런 전법을 '껴안기'라고 불렀다. 이런 전법 때문에 독일군 보병은 홀로 화력 지원 없이 싸우거나 혹은 아군의 화력 지원에 따른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법은 독일군의 근접 지상 지원과 포병 지원을 무력화했다. 모든 거리와 공장, 집, 지하실, 계단에서 사람과 사람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이런 시가전을 농담 삼아 생쥐 전쟁(Rattenkrieg)이라고 불렀다. 부엌에서 쥐가 도망가면 또다시 거실에서 쥐잡기를 해야 하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마마이 언덕이었다. 이곳은 주인이 수없이 바뀌었다.[13] 어떤 반격 때에는 소련군이 하루에 1개 사단을 잃기도 했다. 또한 거대한 사일로로 만들어진 곡물 저장소에서는 전투가 너무 근접전으로 벌어져 소련군과 독일군은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전투는 여기서 2주간 계속되었고, 독일 제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에게 점령되었다. 시의 다른 부분에서는 야코프 파블로프가 지휘하는 소련군 소대가 한 아파트 빌딩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이 빌딩은 시의 중앙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병사들은 이곳을 지뢰밭으로 둘러싸고 창문에 기관총을 배치하였고, 지하실의 벽에 틈을 내어 통신을 용이하게 했다. 이 빌딩은 나중에 '파블로프의 집'이라고 불렸다.

소련군은 미국산 렌드리스로 고가치 전투식량을 대량으로 공급받으며 안정적인 지구전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스탈린그라드로 보내기 시작했다. 곧 전투는 거대한 규모의 소모전으로 돌입했고 독일 국방군 측도 사상자 수가 누적되며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물러서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으므로 독일 제6군은 모든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스탈린그라드로 투입하기 시작했으며 독일 제6군에 엄청난 양의 병력 증강이 이루어지기 시작되며 양측의 사상자 수는 눈덩이가 설산을 구르듯 불어났다.

양군의 손실은 막심했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부대가 시내로 투입되었다. 특히 소련군은 수천 킬로미터 밖의 시베리아나 극동에서 지원군을 끌어오기도 했고, 심지어는 해군의 수병까지도 동원했다. 시베리아에서 달려온 알렉산드르 로딤체프 지휘하의 제13근위소총병사단은 마마예프 언덕을 비롯한 각종 시가전에서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활약했다. 그는 생사기로의 위기에서 15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 스탈린그라드 중앙역 벽에 "로딤체프의 근위부대원들이 여기서 조국(로디나)을 위해 싸웠고 잠들다."라고 갈겨썼다.

독일군은 돌파구가 보이지 않자 중화기를 시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구경 800 mm의 구스타프 열차포(별명 도라)도 있었다. 한편 소련군도 독일군이 도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볼가강 동안에 대규모의 포병을 배치하여 독일군을 계속 포격하였다. 독일군의 전차는 높이가 8미터가 넘는 폐허 더미 속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부서진 빌딩에 대전차포를 엄폐해 두었다가 전진해 오는 독일군 전차를 공격했다.

독일 국방군은 무장도, 전술도 이러한 대규모 시가전에 최적화되지 않았으며 시가전 경험도 소련군보다 유의미하게 많다고 할 수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격측임에도 수적으로 2배 가량 불리한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의 악조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겨우 독일 1 : 소련 2~3의 사상자 비율로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의 90% 이상을 점령하였다. 이는 과연 전성기이자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독일 국방군의 놀라운 시가전 전투력을 보여준 것이지만 외부 위키들에서는 독일군이 이 악조건 속에서 이룬 놀라운 교환비를 따로 언급하지도 않고 넘어가고 있다.

스탈린과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는 실제 전략 목표보다 더 중요한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전략 예비군을 모스크바 방면에서 볼가강 저지로 이동시켰고, 항공기도 모든 지역에서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동원했다. 양군의 지휘관들은 막대한 긴장에 시달렸다. 독일군 지휘관 파울루스는 눈가에 심한 경련이 생겼고, 추이코프는 습진 때문에 양손을 붕대로 완전히 감쌀 정도였다. 양측의 병사들도 근접 전투가 야기하는 심한 긴장감 속에 지냈다.

11월의 소련군 위기

독일군은 3개월 동안 수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느리고 값비싼 대가를 치른 전진 끝에 11월에 최후로 볼가 강의 강둑에 도달했고, 폐허로 변한 시의 90%가 넘는 곳을 장악하여 남아 있는 소련군을 두 개의 고립 지대에 가두었다. 더욱이 볼가강의 유빙이 볼가강 동안에서 시내로 보급을 실어 나르는 소련 배들의 도강을 방해했다. 그러나 시내, 특히 마마이 언덕과 북쪽의 공장 지대에서는 계속 전과 다름없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붉은10월 공장'과 '펠릭스 제르진스키 트랙터 공장', '바리카디 대포 공장' 주위의 전투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소련군과 독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바로 옆의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전차와 무기를 수리했고, 공장 자체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도 있었다. 한편 코카서스(최종 목적지는 바쿠)로 향하는 A 집단군의 진격은 청색 작전 초기 몇달간의 진격속도와 다르게 11월 이후로는 눈에 띄게 진격 속도가 느려졌다. 11월 이후 A 집단군은 카프카스 산맥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천왕성 작전

그러나 독일 국방군의 전략적 정찰 능력과 정보력의 한계로 미국의 렌드리스 능력을 과소평가했고 이것이 변수가 되어 예상보다 훨씬 많이 동원된 소련군 100만 대군이 독일 B 집단군의 측면을 노리고 있었다. 1942년 11월 19일, 길게 노출된 독일 제6군의 측면을 지키던 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군의 부실한 방어선을 뚫고 진격하기 시작하자 포위 위기에 놓였고[14]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버리고 긴급히 후퇴하거나 포위된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 남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했고,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상급대장은 시가지에 남는 선택을 하고 만다.

독일 제6군을 구하기 위해 항공보급을 진행하였으나 목표한 보급량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고, 제6군은 점점 더 심각하게 굶주리며 동사자와 아사자 수가 점점 더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제6군을 구출하기 위한 겨울폭풍 작전을 진행했으나 병력이 너무 적었고 소련군의 인해전술에 이것마저 실패하자 히틀러는 파울루스가 최후까지 싸우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프로이센의 (야전)원수는 항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라는 암묵적인 뜻으로 야전원수로 진급시키지만 파울루스에게 전달되지 못했고 독일 제6군 휘하의 제51보병군단장 발터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 포병대장이 항복을 주장하자 파울루스가 소련군에 항복해버리며 결국 91,000명의 독일 국방군이 항복하고 말았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항복 소식을 듣고 격노하였다.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 B집단군에 이어 카프카스 유전지대로 향하던 독일 A집단군까지 포위당할 뻔 했으나 다행히도 A집단군은 로스토프 근방에서 닫히려는 포위망을 강제로 열어젖히고 성공적으로 퇴각하여 독일 남부집단군의 붕괴를 막았다. 이들은 곧이어 벌어진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소련 선봉 추격 기갑군단들에 역습을 가해 포위하고 소련군 10만명을 섬멸하며 동부전선의 주도권을 되찾아오며 전선을 안정화시켰다. 이후 독일군은 하리코프 북부에 남은 쿠르스크 돌출부에 거대한 반격을 준비하는데, 이는 쿠르스크 전투라고 불리며 이는 단일 규모로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기갑전투가 된다.

독일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가 소련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11,000명의 B집단군 및 제6군 잔존 병력은 항복을 거부하고 파울루스의 항복 이후 한 달이 지난 1943년 3월까지 지하실과 하수도 등에 은신하며 소련군을 계속해서 괴롭히며 저항전을 펼쳤는데 이들 중 2,500여 명의 독일군은 1943년 3월 이후에도 항복을 거부하며 본국에 "우리는 의무를 다했다."는 무전을 보내고 나서야 전사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의 약 3배에 달하는 인명을 손실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독일 국방군 최대의 비극이 되었다. 또한 소련의 승리로 스탈린 체재만 공고해지며 한반도 분단과 냉전이라는 재앙만 보며 지금 와서 봐도 인류 모두에게 풀리지 않는 비극적인 결과만을 계속해서 초래하고 있다.

영향

사상자의 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전투였다. 이 전투는 199일간 지속되었다. 전투의 범위가 광대했고, 사상자 수가 지나치게 많을 것을 두려워한 소련 정부의 사상자 수 집계 중단 명령 때문에 정확한 집계도 어려웠다. 전투 초기에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심한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소련군이 독일군의 측면(주로 루마니아군)을 돌파하여 독일 제6군의 나머지를 포위하기 전에도 독일 제6군은 이미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어떤 때는 독일군이 시의 90%를 장악하기도 했으나 소련군 장병들은 독일군의 점령 지구 안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독일 제4기갑군의 일부도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다. 독일이 40만 명, 루마니아가 20만 명, 이탈리아가 13만 명, 헝가리가 12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본 것이다.[13]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9만 명도 1943년 봄에 대부분 티푸스로 사망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소련에 억류되어 전후 복구 사업에 강제 동원되다가 최종적으로 1955년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자는 5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독일도 소련군 포로를 가혹하게 다루긴 마찬가지였다. 5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 출신의 독일 부역자인 히비(Hiwi)들도 소련군에 사살되거나 잡혀 처형되었다.

과거 소련 관리들이 제공한 기록 보관 수치에 따르면 소련군의 손실은 총 사상자 수 1,129,619명이었으며, 이 중 478,741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고 650,878명이 부상당하거나 병들었다고 한다. 소련군은 4,341대의 전차, 15,728문의 야포, 2,769대의 전투기를 잃었다.[15] 또한, 독일 제6군과 제4기갑군이 시내로 진격해 온 첫 주의 공습에서 4만여 명의 소련 민간인이 시내나 교외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 소련 측 자료에서 시 이외의 민간인의 총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 관리들이 제공한 손실 자료는 소련 측 손실의 부정확성과 과소 보고로 인해 학계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16][17][18] 최근의 데이터 설명과 손실 보정에 따르면 전투 동안 소련군에서 총 1,347,21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그 중 674,990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고 672,224명이 부상당하거나 병들었다.[19][17] 이 데이터에 NKVD 군대와 자원 봉사대를 포함시키면 총 사상자는 136만~137만 명으로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데이터 역시 여전히 과소평가되었다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20][21] 영국의 역사가 로렌스 리스는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소련군 100만 명이 죽었다고 말한다.[22]

러시아 역사학자인 보리스 바디모비치 소콜로프는 차리친-스탈린그라드 국방 박물관의 전임 관장의 회고록을 인용했는데, 그는 200만 명이 넘는 소련군 사망자가 소련 정부에 의해 사상자 수 집계 중단 명령을 받기 전에 집계되었으며 아직도 수개월의 작업이 남았다고 언급했다. 소콜로프는 소련 관리들의 심각한 과소 보고로 인해 200만 명 이상의 소련군 사망자가 소련 공식 통계보다 실제 사망자 수에 더 가깝다고 말했다.[17]

볼고그라드 공산당 기록 보관소의 불완전한 데이터에 따르면, 전투 중에 소련 민간인 42,754명이 사망했다.[23] 그러나 러시아 역사학자인 타티아나 파블로바의 연구에 따르면 8월 23일에 도시에는 710,000명의 주민이 있었고, 그 중 185,232명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사망했으며, 스탈린그라드 농촌 지역의 약 50,000명을 포함하여 총 235,232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24] 또한 파블로바는 그녀의 연구에서 "스탈린그라드의 민간인 인구 손실은 원자 폭탄으로 인한 히로시마 인구 손실보다 32.3% 더 높습니다."라고 말하며 "스탈린그라드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민간인 대량 살상 분야에서 절대적인 세계 기록이 세워졌습니다."라고 말했다.[25] 2018년 연구에서는 전투로 인한 인구 손실이 250만~300만 명에 달한다고 결론내리고 이를 '실제 인구 재앙'이라고 설명했다.[26]

여담

굉장히 유명한 시가전으로 지금도 처절한 시가전하면 대명사처럼 쓰이는 전투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최소 200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쳐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낳은 참혹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독소전쟁 자체가 처절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이후에도 처절한 시가전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바흐무트 전투가 현 시대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다, 북한이 쳐들어오면 일산같이 서울시를 둘러 쌓고 있는 신도시 때문에 제2의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된다 뭐 이런 식으로.

시가전은 도시를 완전 초토화하지 않는 이상, 건물 숲 자체가 요새나 마찬가지이기에 공격측에게도 상당한 출혈이 강요되는 편이다.

미군 같은 경우에는 인권을 중시하고 국제여론을 신경 쓰기에 민간인이 죽든 말든 건물을 다 초토화 시킬 수도 없다.


(특히 병원이나 유치원 학교 같은데를 공격하거나 해서 아이나 환자가 희생자가 나오면 더더욱 국제적으러 비난을 받기 쉬워서 미국이 이런데는 폭격하거나 하지 않는데 보통. 미국에 대항하는 테러리스트도 바보는 아니기에 , 이런 걸 알고 일부러 병원이나 학교 방패삼아 근처에 아지트를 만들기도 한다)

또 방어자 입장에서는 도시 자체가 거의 순소비를 하는 곳이기에, 포위 될 경우 물자가 급속히 고갈되어 고통스러운 처지가 될 수 있다. 물론 포위해서 굶어 죽이는 것도 국제적으로 비난을 들을 수 있다. 이러면에서 전근대 시절 공성전과 비슷한 편이다.

스탈린그라드라는 지명은 스탈린의 도시라는 뜻으로 스탈린을 개인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붙인 지명이다. 흐루초프 때 스탈린을 격하하면서 다시 지명이 볼고그라드로 환원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지금도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도 한 때 지명이 레닌의 도시라는 뜻의 레닌그라드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는 다시 환원이라도 됐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를 주위를 에워싼 레닌그라드주는 환원이 안 되어서 지금도 레닌그라드주라고 한다.

참고 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talingrad


각주

  1. Why Stalingrad Was the Bloodiest Battle of World War II (and Perhaps of All Time)》.  2016-11-28.  2022-03-17에 확인함.

  2. {{인용 |인용할 내용 |(출처) |(따옴표색) |(글자색) }}
  3. 최성락 <말하지 않는 세계사> 페이퍼 로드 2016년 p242~247
  4. [네이버 지식백과] 독 · 소 불가침 조약 (독일사, 2005. 4. 28., 권형진, 위키미디어 커먼즈).....히틀러는 자신의 외무 장관 리벤트로프(1893~1946)를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스탈린이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하였다. 그 제안에 의하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경우 소련은 발트 해 연안국을 차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폴란드도 독일과 분할하여 동부 폴란드와 베사라비아 지역을 소련이 차지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독일은 서부 폴란드 전역을 점령하고 양국은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5. 5.0 5.1 박래식 <이야기 독일사> 청아출판사 2006년 p301
  6. 6.0 6.1 이무열 <한권으로 보는 러시아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4.10.20, p396
  7. 박래식 <이야기 독일사> 청아출판사 2006년 p302
  8. 이무열 <한권으로 보는 러시아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4.10.20, p399
  9. 강창일,하종문 <한 권으로 보는 일본사 101 장면> 가람기획 1998.11.20 p392
  10. MacDonald, John, Gerat Battles of World War II, 1986, Michael Joseph, London, pp.94
  11. G.Zhukov, Reminiscences and reflections (Moscow, 1985) pp.83-4; Werth, Russia at War, pp.448-9.
  12. stalingrad1942》. 2012년 5월 26일에 원본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31일에 확인함.
  13. 13.0 13.1 Craig, William, Enemy at the Gates: the Battle for Stalingrad, 1973, Penguin Books, New York.
  14. 1941년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에 의해 소련의 곡창이라고 불리던 우크라이나를 순식간에 상실한 소련은 극심한 식량 위기에 놓였었는데, 전체 렌드리스로 보면 적어 보이지만 소련이 더할 나위 없이 긴급히 필요로 했던 고가치 전투식량을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으로 원조받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모할 식량 부족 위기를 넘겨 천왕성 작전까지 버티는 게 가능했었던 것이다.
  15. (1993). 《Poteri Vooruzhonnykh Sil SSSR v voynakh, boyevykh deystviyakh i voyennykh konfliktakh》. [Losses of the Armed Forces of the USSR in wars, hostilities and military conflicts]. Voenizdat, 178–82, 369–70쪽. ISBN 5-203-01400-0
  16. Weinberg, Gerhard L.; (2001-10-01). "Soldiers in Cities: Military Operations on Urban Terrain". 《Monographs, Collaborative Studies, & IRPs》
  17. 17.0 17.1 17.2 Соколов, Борис (2014). 《Чудо Сталинграда》. [The Miracle of Stalingrad]. Алгоритм, 235–236쪽. ISBN 978-5-4438-0489-7
  18. (2017). 《The Price of Victory: The Red Army's Casualties in the Great Patriotic War》. Pen & Sword Books, ix쪽. ISBN 978-1-47389-966-7
  19. (2005). 《Сталинград: цена победы》. [Stalingrad: The Price of Victory]. Terra Fantastica, 118쪽. ISBN 5-7921-0673-8
  20. (2005). 《Сталинград: цена победы》. [Stalingrad: The Price of Victory]. Terra Fantastica, 118쪽. ISBN 5-7921-0673-8
  21. Соколов, Борис (2014). 《Чудо Сталинграда》. [The Miracle of Stalingrad]. Алгоритм, 236쪽. ISBN 978-5-4438-0489-7
  22. Hitler's Invasion of Russia in World War Two》.  2011-03-30.  2024-04-03에 확인함.
  23. Самсонов А.. Сталинградская битва (стр. 42) - ModernLib.Net》.  2024-02-23에 확인함.
  24. Анваровна, Такташева Флюра; (2018). "Динамика демографических показателей Сталинградской области в 1940-х - 1950-х гг". 《Известия Волгоград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педагогическ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9 (132)ISS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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