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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宗[1] | |
지위 |
|
재위 |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 (양력) |
즉위식 |
경복궁 근정전 |
재위 |
1418년 7월 6일 ~ 9월 9일 (양력) |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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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이도(李祹) |
묘호 |
세종(世宗) |
군호 |
충녕대군(忠寧大君) |
시호 |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
능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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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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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397년 5월 15일 (양력)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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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일 |
1450년 3월 30일 (양력) |
사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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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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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소헌왕후 심씨 |
자녀 |
18남 4녀 (18남 7녀) |
개요
조선(朝鮮)의 4대 군주.
행적
노비고소금지법 제정
1420년 예조판서 허조의 건의에 따라 노비고소금지법을 제정하였다. 내용은 노비가 주인을 관청에 고소하거나 고발하면 고소·고발 접수를 거부하고 즉시 사형시키는 법이다. [3] 이 법이 특히 잔인한 점은 노비가 주인을 고소했을 경우 평민인 노비의 배우자 또한 사형에 처했다는 점[4]이다. 이 법이 제정된 이후 주인들이 노비를 때려죽이는 일이 빈번[5] 했다.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부민고소금지법 제정
1420년 예조판서 허조의 건의에 따라 노비고소금지법을 제정할때 부민고소금지법도 함께 제정[6]하였다.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라 함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백성들이 고을 수령을 고소할 수 없게 하는 법이다. 이 법으로 인해 지방관들이 백성들을 착취하거나 부당한 지시를 하더라도 백성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관리들의 노예가 되어갔다.
한글창제
한글을 창제하였다. 일반인의 상식과 달리 세종의 한글 창제목적은 자주적인 글자를 만들어 한국어를 제대로 표기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조선에서 쓰이던 한자음이 중국의 것과 너무나 달랐기에 중국 한자음을 조선에 도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일종의 발음기호로서 만든 것[7]이었다.
총평
세종은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민본주의나 자주적 군주와는 거리가 멀고 유교적 가치에 충실하였던 임금이다. 외교관계에 있어서도 상국인 명나라에 대해 사대를 아끼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도 관리의 권한을 확대하고 노비의 권리를 박탈하는 등 엄격한 신분제도를 도입하였다. 다만 이는 이미 조선의 건국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조선은 다원적 사회인 고려의 각종 사회질서를 배척하는 강경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개국되었으며 건국 초기부터 그들에 의해 기초가 다져져 왔기에 국가체제가 공고해짐에 따라 성리학적 질서는 끊임없이 강화될 운명이었다. 다만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한 인물이 세종인 것이다.
역사를 기록한 사관 또한 성리학자였다. 사대부 성리학자 입장에서는 세종은 성군이다. 하지만 일반 민중 민초 입장에서도 성군이었으냐 하면 그건 논란이 있을 것이다. 사대부 양반과 민중들간의 이해 관계가 충돌 할 때 예를 들어 종모법 같은 경우 대부분 사대부의 입장에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 세종이었기 때문이다. 사대관계나 노비문제 등등 조선시대 내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게 세종이다.
사실 한글 말고는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이 적은 왕이다. 마치 한국사에서 손꼽히게 위대한 인물인냥 취급을 받기도 하는데. 우리는 조선시대 신민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이 우리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이 훨씬 크다. 하지만, 세종이라는 말은 곳곳에서 쓰이지만 우남이나 박정희의 이름을 기념하는 것은 보기 힘들며 전두환은 있는 것도 반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종의 가계도
세종은 1명의 왕비와 5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자녀는 18남 4녀로 적자녀는 8남 2녀이고, 서자녀는 10남 2녀이다.
세종 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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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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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 태종대왕 太宗大王 |
전주 | 1367년 - 1422년 | 태조대왕 太祖大王 신의왕후 한씨 神懿王后 韓氏 |
제3대 국왕 |
모 |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 후덕왕대비 厚德王大妃 |
여흥 | 1365년 - 1420년 | 여흥부원군 민제 驪興府院君 閔霽 삼한국대부인 여산 송씨 三韓國大夫人 礪山 宋氏 |
원경왕태후 元敬王太后[8] |
왕비
정비 | 시호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소헌왕후 심씨 昭憲王后 沈氏 |
청송 | 1395년 - 1446년 | 청천부원군 심온 靑川府院君 沈溫 삼한국대부인 순흥 안씨 三韓國大夫人 順興 安氏 |
후궁
작호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
빈 | 신빈 김씨 慎嬪 金氏 | 청주 | 1406년 - 1464년 | 김원 金元 삭녕 고씨 朔寧 高氏 |
|
혜빈 양씨 惠嬪 楊氏 | 청주 | ? - 1455년 | 양경 楊景 이씨 李氏 |
세조 1년(1455년) 교수형에 처해짐[9] 숙종 38년(1712년) 신원됨[10] | |
영빈 강씨 令嬪 姜氏 | 진주 | ? - 1483년[11] | 미상 | ||
귀인 | 귀인 박씨 貴人 朴氏 장의궁주 莊懿宮主 |
밀양 | 생몰년 미상 | 박강생 朴剛生 파평 윤씨 坡平 尹氏 |
|
귀인 최씨 貴人 崔氏 명의궁주 明懿宮主 |
전주 | 최사의 崔士儀 순천 박씨 順天 朴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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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 | 숙의 조씨 淑儀 曺氏 | 미상 | 미상 | ||
소용 | 소용 홍씨 昭容 洪氏 | ? - 1452년 | |||
숙원 | 숙원 이씨 淑媛 李氏 | 생몰년 미상 | 성종 21년(1490년) 이후 사망[12] | ||
상침 | 상침 송씨 尚寢 宋氏 | 1396년 - 1463년 | |||
사기 | 사기 차씨 司記 車氏 | ? - 1444년[13] |
왕자
작호 | 이름 | 생몰년 | 생모 | 배우자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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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문종대왕 文宗大王 | 향 珦 | 1414년 - 1452년 | 소헌왕후 심씨 | 현덕왕후 권씨 顯德王后 權氏 | 제5대 국왕 |
2 | 세조대왕 世祖大王 수양대군 首陽大君 |
유 瑈 | 1417년 - 1468년 | 정희왕후 윤씨 貞熹王后 尹氏 | 제7대 국왕 | |
3 | 안평대군 安平大君 | 용 瑢 | 1418년 - 1453년 | 부부인 연일 정씨 府夫人 鄭氏 | 육종영 중 한사람 단종 1년(1453년) 사사됨[14] | |
4 | 임영대군 臨瀛大君 | 구 璆 | 1420년 - 1469년 | 의령 남씨 宜寧 南氏 제안부부인 전주 최씨 齊安府夫人 崔氏 부부인 안동 안씨 府夫人 安氏 |
연산군비 폐비 신씨의 외조부 중종비 단경왕후의 외증조부 | |
5 | 광평대군 廣平大君 | 여 璵 | 1425년 - 1444년 | 영가부부인 평산 신씨 永嘉府夫人 申氏 | ||
6 | 화의군 和義君 | 영 瓔 | 1425년 - ? | 영빈 강씨 | 군부인 밀양 박씨 郡夫人 朴氏 | 육종영 중 한사람 성종 20년(1489년) 이후 사망[15] |
7 | 금성대군 錦城大君 | 유 瑜 | 1426년 - 1457년 | 소헌왕후 심씨 | 완산부부인 전주 최씨 完山府夫人 崔氏 | 육종영 중 한사람 세조 3년(1457년) 사사됨[16] |
8 | 계양군 桂陽君 | 증 璔 | 1427년 - 1464년 | 신빈 김씨 | 정선군부인 청주 한씨 旌善郡夫人 韓氏[17] | |
9 | 평원대군 平原大君 | 임 琳 | 1427년 - 1445년 | 소헌왕후 심씨 | 강녕부부인 남양 홍씨 江寧府夫人 洪氏 | |
10 | 의창군 義昌君 | 공 玒 | 1428년 - 1460년 | 신빈 김씨 | 양원군부인 연안 김씨 梁源郡夫人 金氏 | |
11 | 한남군 漢南君 | 어 𤥽 | 1429년 - 1459년 | 혜빈 양씨 | 안동군부인 안동 권씨 安東郡夫人 權氏 | 육종영 중 한사람 |
12 | 밀성군 密城君 | 침 琛 | 1430년 - 1479년 | 신빈 김씨 | 풍덕군부인 여흥 민씨 豊德郡夫人 閔氏 | |
13 | 수춘군 壽春君 | 현 玹 | 1431년 - 1455년 | 혜빈 양씨 | 영천군부인 연일 정씨 榮川郡夫人 鄭氏 | |
14 | 익현군 翼峴君 | 련 璭 | 1431년 - 1463년 | 신빈 김씨 | 김제군부인 평양 조씨 金堤郡夫人 趙氏 | |
15 | 영응대군 永膺大君 | 염 琰 | 1434년 - 1467년 | 소헌왕후 심씨 | 대방부부인 여산 송씨 帶方府夫人 宋氏[18] 춘성부부인 해주 정씨 春城府夫人 鄭氏 연성부부인 연안 김씨 延城府夫人 金氏 |
영흥대군 永興大君 역양대군 歷陽大君 |
16 | 영풍군 永豊君 | 전 瑔 | 1434년 - ?[주 1] | 혜빈 양씨 | 군부인 순천 박씨 郡夫人 朴氏[19] | 육종영 중 한사람 |
17 | 영해군 寧海君 | 당 瑭 | 1435년 - 1477년 | 신빈 김씨 | 임천군부인 평산 신씨 林川郡夫人 申氏 | |
18 | 담양군 潭陽君 | 거 璖 | 1439년 - 1450년 | 미혼 |
왕녀
작호 | 생몰년 | 생모 | 배우자 | 비고 | |
---|---|---|---|---|---|
1 | 정소공주 貞昭公主 | 1412년 - 1424년 | 소헌왕후 심씨 | ||
2 | 정의공주 貞懿公主 | 1415년 - 1477년 | 연창위 延昌尉 안맹담 安孟聃 | ||
3 | 정현옹주 貞顯翁主 | 1425년 - 1480년 | 상침 송씨 | 영천위 鈴川尉 윤사로 尹師路 | |
4 | 정안옹주 貞安翁主 | 1441년 - 1461년 | 숙원 이씨 | 청성위 靑城尉 심안의 沈安義 | |
- | 옹주[20] | ? - 1426년 | 신빈 김씨[21] | ||
- | 옹주[22] | ? - 1429년 | |||
- | 옹주[23] | 1430년 - 1431년 | 사기 차씨 |
각주
각주
- ↑ 자세한 사용법은 틀:군주 정보 참조.
- ↑ 조선 세종의 릉
- ↑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 9월 13일 무인 4번째기사 1420년
- ↑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Ebook], 백년동안, 2018
- ↑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6월 8일 계축 5번째기사
- ↑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 9월 13일 무인 4번째기사 1420년
- ↑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Ebook], 백년동안, 2018
- ↑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8월 24일 (경신)
- ↑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11월 9일 (경진)
- ↑ 《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1712년 청 강희(康熙) 51년) 4월 28일 (경진)
- ↑ 《성종실록》 150권, 성종 14년(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1월 20일 (계축)
"전일 성상께서 이영(李瓔, 화의군)의 어머니 강씨(姜氏)가 나이 많아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또 이영이 이미 종편(從便)하였다 하여 특별히 이영에게 그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기한하여 서울에 살면서 효도를 다하게 하였는데,
이제 강씨가 죽어 장사를 이미 마쳤으니, 청컨대 영을 보내어 외방 종편(外方從便) 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명하여 상제(喪制)를 마친 뒤에 외방 종편하게 하였다."
- ↑ 《성종실록》 241권, 성종 21년(1490년 명 홍치(弘治) 3년) 6월 7일 (무자)
"심언(沈漹)이 공초(供招)하기를,
‘외조모 숙원 이씨(淑媛 李氏)가 봉보부인에게 편간을 청하여 영돈녕(領敦寧) 윤호(尹壕)에게 보내고 사복 판관(司僕判官)을 삼도록 요구하였습니다.’ 하였는데,(중략)
- ↑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1444년 명 정통(正統) 9년) 7월 10일 (정사)
- ↑ 《단종실록》 8권, 단종 1년(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10월 18일 (신축)
- ↑ 《성종실록》 228권, 성종 20년(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5월 9일 (병인)
- ↑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1457년 명 천순(天順) 1년) 10월 21일 (신해)
- ↑ 한확의 둘째 딸이자 인수대비의 언니
- ↑ 단종비 정순왕후의 고모
- ↑ 박팽년의 딸
- ↑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년 명 선덕(宣德) 1년) 3월 6일 (경자)
왕녀가 졸하다 - ↑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1월 27일 (병오)
소의 김씨를 귀인으로 삼다
소의 김씨(昭儀 金氏)를 귀인(貴人)으로 삼았다.(중략)
‘여섯 아들이 다 수(壽)할 것이다. ’고 하였다 하니,
내가 정궁(소헌왕후)에 아들이 많으니 소의의 자식을 자랑할 것은 없지만, 그러나 여섯 아들이 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요, 실로 하늘이 시키는 것이니 또한 소의의 명(命)은 귀한 것이다.
고금으로 궁인의 세계(世系)에 본래 귀천이 없는 것이었다.(중략)
- ↑ 《세종실록》 43권, 세종 11년(1429년 명 선덕(宣德) 4년) 2월 21일 (정유)
왕녀가 졸하니 상장의 예절을 의논하여 올리게 하다
왕녀가 졸(卒)하므로 예조에 명하여 상장(喪葬)의 예절을 의논하여 올리게 하였다. 왕녀는 궁인(宮人)의 소생이었다. - ↑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7월 6일 (무진)
사기 차씨의 소생인 왕녀가 죽다
왕녀가 죽었다. 나이가 두 살인데 사기 차씨(司記 車氏)의 소생이다.
주해
- ↑ 영풍군의 사망년도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1458년 영풍군의 아내를 그 가족에게 보내고 노비는 몰관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