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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경상북도 안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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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김숙승(金叔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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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시조 |
김방경(金方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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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인물 |
김영돈, 김영후, 김수동, 김제갑, 김찬, 김시민, 김응하, 김시양, 김자점,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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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974,440명 (2000년) |
다른 뜻에 대해서는 안동 김씨 문서를 참조하세요.
구 안동 김씨 (舊 安東 金氏)는 경상북도 안동시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
신라 경순왕의 후예인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고,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을 중시조로 한다.
분파
- 파조 김숙영(金叔永) : 경순왕 후손으로 벼슬이 공부시랑(工部侍郎)이었다. (구)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일파를 이루었다.
- 파조 김장(金萇) :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벼슬이 장령(掌令)이었으며, 일파를 이루었다.
- 김희수(金希壽) : 김장의 5세손으로 문과 급제후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었다.
- 김홍도(金弘度) : 김희수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한(典翰)이었으며, 호당(湖堂)에 뽑혔다.
- 김첨(金瞻) : 김홍도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校理)였으며, 호당(湖堂)에 뽑혔다.
- 김수(金睟) :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였으며, 시호가 소의공(昭懿公)이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 파조 김용(金龍) : 벼슬이 방약박사(方藥博士)였으며, 일파를 이루었다.
- 파조 김정(金挺) : 벼슬이 지보주사[知甫州事였으며, 일파를 이루었다.[보주(甫州)는 지금의 예천(醴泉)으로, 지보주사는 지금의 예천 군수이다.]
- 파조 김구정(金九鼎) : 벼슬이 직장(直長)이었으며, 일파를 이루었다.
- 김광수(金光睟) : 김구정의 현손으로 진사(進士)이며, 서원에 배향되었다.
- 파조 김유선(金惟詵) : 벼슬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었으며, 일파를 이루었다.
- 파조 김이생(金理生) : 벼슬이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이었으며, 일파를 이루었다.
- 후손 김선(金宣)[선(愃)이라고도 쓴다.] : 벼슬이 전법판서(典法判書)이었으며, 수안(遂安)으로 분적(分籍)하였다.
익원공파(翼元公派)
- 익원공파(翼元公派) 파조 김사형(金士衡, 1341~1407) : 김방경의 현손으로 조선 개국공신이다.
- 김방경(金方慶, 1212~1300) - 김순(金恂) - 김영후(金永煦, 1292~1361) - 김천(金蕆) - 김사형(金士衡, 1341~1407)
- 김사형의 아들 김승(金陞)은 김종준, 김종한, 김종윤, 김종숙 등 네 아들을 두었다.
- 장남 김종준(金宗浚) --> 18대손 김구(金九, 1876~1949)
- 막내 김종숙(金宗淑) - 김질(金礩, 1422∼1478) - 김성동(金誠童) - 김언(金漹) - 김억령(金億齡) - 김탁(金琢) - 김자점(金自點, 1588~1651)
백범 김구는 자신의 방계 선조 김자점이 역신으로 처형 당하는 때에 같은 집안으로 몰려 쫓겨서 황해도로 이주하게 됐다고 하였으나, 김자점 쪽과는 계보가 나뉘어진지 오래라서 사실로 보기 어려운 것 같다. 김자점과, 같은 대의 김구의 선조는 사실상 남남 수준인 14촌간으로 벌어져 있으므로 한쪽이 역신으로 몰렸다고 해도 다른 쪽이 연좌죄로 연루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와 같은 이들의 관계는 구 안동 김씨 족보에서 확인이 가능하며[1], 인터넷에서도 확인된다.[2]
또한 치하포 사건 당시 3번째 조사 진술서에 김구는 자신이 7대 독자라 했으나[3][4], 족보에는 부친이나 조부 모두 형제들이 다수 나오므로 사실이 아니다.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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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보기
각주
- ↑ 안동김씨대동보( 安東金氏大同譜), 1979, 권 8 p.48 : 김만묵 - 김재하 - 김구 - 김인, 김신
- ↑ 구 안동김씨 익원공파 세계도 네이버 블로그
- ↑ 건명 : 金昌洙 三招. : 015a
- ↑ 김창수(金昌洙)와 치하포 여점(旅店) 주인 이화보(李化甫)에 대한 취조 기록 : 『報告書』 0001권, 奎26048, 010a-020a면,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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